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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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알렉산더’라는 영화가 있다. 흥행이 썩 잘되진 않았고 다소 지루한 것도 사실이지만 영화 초반부 가우가멜라 전투 장면만큼은 언제봐도 흥미롭다. 알렉산더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와 다리우스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가 기원전 331년 오늘날 이라크 아르빌 인근 가우가멜라라는 곳에서 맞붙었던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우익에 배치한 기병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쪽 좌익 기병대를 유인한 뒤 페르시아 본진과 좌익 사이에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다리우스3세 바로 앞까지 쇄도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전열이 무너지면서 페르시아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대오가 흐트러지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덕분에 그토록 기세등등했던 페르시아가 무너졌다. 군대에 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제식훈련이다. 조교들은 끊임없이 “오와 열을 맞추라”며 어그적거리는 훈련병들을 닦달한다. 줄이 조금 안맞는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만 지나놓고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줄을 맞춰서 움직이지 못하는 군대는 군대로서 기능을 할 수가 없다. 평소에도 줄이 안 맞는데 위기상황에서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줄이 무너져서 몰살당하는 얘기는 동서고금 흔하디 흔하다. 데모할 때 생각해보자. 가투(가두투쟁)에서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고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는 건 기본적으로 상대 진영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다. 축구도 크게 다르지 않다. 4-4-2나 4-3-3 같은 이른바 포메이션이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전투진형과 다르지 않다. 수비가 무너져서 실점을 했다는 건 수비 대오가 무너져 방어가 안되는 구멍이 뚫렸다는 의미다. 강한 압박과 속도, 패스를 통해 우리 공격대형은 제대로 작동하게 하면 승리할 수 있다. 한국과 포르투갈 경기 막판 역전골은 포르투갈 선수 7명이 손흥민 막느라 정신이 팔려서 수비대형이 무너진 게 원인이었다. 대오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짧은 군대 경험을 통해 생각해보면 내 옆에 있는 전우, 내 뒤에 있는 전우가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적군이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면 무섭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럴 때 한두명이 자리를 이탈해 버리면 공포가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퍼지기 마련이다. 그럼 전투는 하나 마나다. 반대로, 내 옆자리를 맡은 사람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면 그 용기 또한 퍼져나간다. 대오를 유지해야 내 목숨도 살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믿음직한 전우만큼 든든한 게 없다. 출처 - 천주교인권위원회 한 군인이 있었다. 세상은 남자라 여겼지만 자신은 여자이고 싶었다. 믿음직한 전우로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 하사 변희수로 남고 싶었다. 하지만 육군에선 하사 변희수가 성전환수술을 한 것을 ‘심신장애’로 규정했다. 강제전역시켰다. 육군의 논리는 이런 것일까. 하사 변희수는 남성의 상징인 ‘거시기’를 떼어냈다. 그는 이제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고, 믿음직한 전우도 될 수 없다. 성전환 수술 이후에도 계속 군복무를 하고 싶어했던 하사 변희수는 결국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 투성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듬직했던 전우가 어떻게 성전환 수술을 하고 나면 전우들의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없는 믿음직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육군이 생각하는 믿음직한 전우는 ‘생물학적 남성’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도 군대에서 성실하게 복무하는 여성 장교와 부사관들은 뭐란 말인가. 법원에서도 강제전역이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런데도 최근 육군은 고(故) 변희수 육군 하사가 ‘순직’이 아니라 ‘일반 사망’이라고 결론내렸다. 육군에선 “공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하는데, 군인사법에선 “고도의 위험을 무릅쓴 직무 수행 중 사망”한 사례 뿐 아니라 “국가의 수호·안전보장 또는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한 사람”도 순직 대상에 포함한다는 것과도 맞지 않는다. 인권침해나 관리소홀로 인한 자살을 순직으로 인용하는 최근 추세에 비춰보더라도 납득이 안된다. 육군은 여전히 하사 변희수를 전우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리라. 전우가 내 뒤에서 나를 지켜주고 나 또한 전우를 지킨다. '여자'냐 '남자'냐 하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직 내 옆 내 뒤에 있을 때 든든한, 목숨을 빚질 수 있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면 된 것 아닐까. 나를 지켜주는 건 '전우'로 충분하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12-14 | hrights | 조회: 803 | 추천: 6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 정부의 무차별 종북몰이, 공안몰이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권과 집권여당의 낮은 지지율에 따른 위기 탈출을 노린 사활을 건 종북몰이는 급기야 민중운동과 진보통일운동 진영에 대한 공안몰이 국가보안법 수사로 이어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극우보수정권은 통치 위기 국면에서 언제나 종북몰이, 공안몰이 카드를 꺼내 사이비 안보문제를 내세워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여론의 반전을 꾀해 왔다. 아무데나 시도 때도 없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 중이다. 늘 봐왔던 시대착오적 코믹 저질 수법이긴 한데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스릴러 공포 영화를 보는 오싹한 느낌이다. 느닷없이 전직 대통령조차 신영복 선생을 존경한다는 이유로 김일성주의자로 간주한다. 대통령이 여당 행사에서 종북 주사파와는 협치가 불가능하다는 발언으로 야당을 향한 종북몰이 공세의 앞장에 나선다. 심지어 안전 운행을 위해 안전운임제의 적용 확대를 요구하는 화물연대의 정당한 생존권 투쟁을 불법파업으로 매도하며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로 규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주노총의 국가보안법 폐지 성명에 이때다 하고 ‘민노총’이 하라는 노동자 대변은 하지 않고 북한을 대변하는 ‘조선로동당 2중대’라고 나무라며 ‘민로총’으로 이름을 바꾸라는 여당의 논평은 노동자를 위한다는 그 가식이 역겹기는 하지만 차라리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작금의 종북몰이 공세는 거의 실성한 수준의 황당무계하기 그지없고, 막무가내식 무식과 만용, 오만과 독선으로 점철된 것으로 최악으로 꼽힐 것이다. 출처 - Rev. Timothy's 묵상일기 중 윤석열 정부는 재벌 대기업 중심의 불평등 심화로 인한 민생 위기의 해소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고 그 어떠한 대책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임기 시작 고작 6개월 만에 정권의 무능함이 탄로 날까 두려워 오로지 종북몰이 공세로 정쟁을 불러오고 노동자 때려잡기에 혈안 돼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며 생존권을 위협하는 반민중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극우보수정권의 재집권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안수사기관들은 전방위적 국가보안법 수사를 노골화하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민중운동과 진보통일운동 진영에 대한 공안몰이가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민중운동과 진보통일운동 진영은 극우보수정권의 종북몰이, 공안몰이의 희생양이 되어 국가보안법의 위협과 처벌에 직면해 있다. 국가정보원, 경찰청 안보수사대, 검찰 등 공안수사기관은 그동안 오래도록 썩혀두었던 음습한 지하 저장창고에서 공안몰이 창고 대방출을 본격화하며 희생양을 취사, 선택하여 공안탄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국가정보원 안보수사국 및 국가정보원 대변인실은 향후 극우보수언론과 짬짜미가 되어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국면전환용 언론공작을 통해 반국가단체요, 북한 연계요 하며 온갖 종북몰이 보도로 국민의 눈과 귀를 어지럽힐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겪어왔건만 종북몰이, 공안몰이에 기댄 극우보수정권의 역사적 운명이 또다시 궁금해진다. 뻔하다. 자멸이다. 당장은 상책일 듯 보일지 몰라도 종북 공안몰이에 기대어 정권의 수명을 이어가는 것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자초했던 역사가 되풀이 될 것이다. 과거의 실패한 정책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 위기 고조 및 10. 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적대 강경 정책과 종북몰이 공세는 공안탄압의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 이상은 분단냉전체제의 적대관계를 배경으로 종북몰이, 공안몰이를 하기도 예전과 같지 않다. 더는 용납되지도 통하지도 않는다. 시대착오적 종북몰이, 공안몰이에 대응하여 그 근간이 되는 분단냉전체제를 청산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점점 더 활성화되고 있다. 분단냉전체제에 길들여진 나머지 종북몰이, 공안몰이에 취약해져 무기력한 상태로 적응해 살아온 어제의 한국 민중이 아니다. 바야흐로 종북몰이, 공안몰이가 기승을 부리고 반복되는 분단냉전체제 유지의 압도적 힘의 실체에 대한 본질적 문제인식에 기초해 무기력에서 벗어나 이에 대응할 역량을 키우며 그 극복의 대안과 힘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한국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분단냉전체제의 청산을 위한 핵심적 장애물인 국가보안법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저항력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비로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극우보수세력의 종북몰이, 공안몰이 공세에 맞서 능동적 힘으로 제동을 걸고 우리사회에서 종북몰이, 공안몰이 시도 자체를 뿌리 뽑을 수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분단냉전체제의 청산과 함께 이뤄질 근본적 과제이기에 한국 민중을 억압하는 분단 악법에 맞서 그 폐지를 위한 민중의 역량을 축적해 나갈 때 비로소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대등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할 수 있고, 민중운동과 진보통일운동 진영이 더는 종북몰이, 공안몰이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며, 국민의 일상은 물론 선거 등 정치적 공간에서 국민 누구나 정치사상의 표현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민주사회로 발전할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12-07 | hrights | 조회: 851 | 추천: 5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간은 자연 내 존재이다. 인간이 자연 안에서 생겼고 자연법칙에 따라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법칙을 대상화할 줄도 안다. 가령 고대인이 마른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았을 때, 그 고대인은 불이 붙는 자연의 법칙을 대상화하며 아는 것이다. 법칙을 대상화할 줄 아는 인간은 그 법칙을 하나의 ‘방법’으로 정리해 다른 이에게 전수한다. 이렇게 전수되는 자연법칙이 ‘기술’이다. 그 기술로 인해 ‘문명’이 발생한다.   인간은 전수된 자연법칙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통제한다. 불도 인간의 목적에 맞추어진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고 집을 데우기 위해 불을 일으킨다. 인간이 자연법칙을 자신의 의도에 어울리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을 자연에 대한 통제자나 조절자로 인식한다.   나아가 인간이 추상화한 기계적 법칙이 본래의 자연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인간의 문명은 더 복잡하고 정교해진다. 인간은 다시 자연을 대체한 기계적 자연법칙에 욕망과 환상을 투사한다. 욕망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럴수록 욕망과 환상이 투사된 자연법칙이 본래의 자연법칙을 통제한다. 인간은 다시 그 통제된 자연법칙, 즉 기술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래야 자신을 위한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이 자신을 위해 조작해낸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스스로 자연이 되어 간다.   여기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신조어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인류세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상에 축적되어 자연의 존재 방식을 바꾸고 이 바뀐 자연에 의해 인간이 영향을 받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시노하라 마사타케, 『인류세의 철학』) 지구의 지질학적 구조 안에서 살던 인간이 힘을 키워 지구의 지질 구조를 바꾸는 존재로까지 ‘발전’해 간 것이다. 지구온난화, 가뭄, 홍수 등은 인간이 바꾼 기계적 자연법칙의 효과들, 인간이 원하지 않았던 효과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처럼 여길 정도로 자연을 수단화하는 중에도, 본래의 자연은 숨죽이고만 있지 않았다. 본래의 자연은 인간의 수단에 갇히지 않고, 인간과의 경계를 뚫고 인간세계에 침입하여 인간의 지반을 뒤흔들고 때로는 붕괴시키기도 한다. 인간이 대상화시킨 자연법칙을 통해 자연 본연의 위력을 드러낸다. 지구온난화, 가뭄, 홍수는 물론 심지어 지진과 쓰나미도 인간이 자연을 객체화시키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자, 인간에 대한 본래적 자연의 역공이기도 하다. 출처 : 기업의 png에서 .pngtree.com/   희한하게도 똑같은 현상이 법과 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국민국가는 국민과 영토와 주권으로 구성된다. 주권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이다. 원칙적으로 이 권력은 국민 전체에게 평등하게 속해 있다. 그 국민적 평등성을 유지하는 상태가 정의이다. 정의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질서이기도 하다. 정의와 질서를 위해서는 사법(司法)과 정치가 필요하다. 사법과 정치는 국가 운영의 근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자연이 될 정도로 자연을 수단화하며 살아왔듯이, 이때 사법과 정치가 자신에게 더욱 유리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일종의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권력의 정점에서 법을 운용하는 세력일수록 법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을 가능성도 크다는 데 있다. 법의 운용 세력도 본래는 법의 영역 안에 있는 ‘법 내부적 존재’이지만, 법의 운용을 빌미로, 법의 이름으로, 법의 상위에 오른다는 데 있다. 인간에 의해 객체화된 자연법칙이 기술이듯이, 법 기술에 능한 이가 법의 이름으로 법을 통제하며 그들만의 법 세계를 이룬다. 본래의 법은 자연환경처럼 인간을 둘러싸고 있고, 모든 이가 같은 법의 통제와 견제 하에 있어야 하지만, 법 기술자들은 법 안에서 법의 이름으로 법을 통제하며 넘어선다. 법을 이용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유지하고 영향력을 확장한다.   수단화한 법으로 법의 이름으로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할 법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식으로 법과 하나가 된다. 자연 내 존재인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어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듯이, 특정세력에 유리한 법이 법의 이름으로 법 안으로 들어가 법의 주체자가 된다. 그러면서 법 본연의 평등성을 해친다.   어떤 사건의 위법성을 판단하는 주체인 검찰은 사법 권력의 정점에 있는 세력이다. 검찰 자신은 법질서 안에 있으되, 법을 운용하는 주체로서의 의식이 훨씬 강하다. 자신이 사법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별반 하지 않는다. 법의 원리를 활용해 법을 수단화하면서 법의 효과를 누리다가 급기야 법과 하나가 된다.   검찰 수장 출신인 대통령이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대표적인 언론인 MBC의 취재를 제한하고 제재까지 추진하려 하고 있다. 해외 순방을 위한 대통령 전용기에 MBC 기자를 배제한 이유에 대해 “헌법수호를 위한 조치”라고 강하게 성토한 바 있다. 수호해야 하는 헌법과 그 헌법을 수호하는 주체를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시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헌법의 이름으로 스스로 헌법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대통령이 된 이후 수도 없이 ‘자유’를 외쳤지만, 막상 자신에게 불리한 자유는 배제한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을 내세워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행태에서 헌법의 이름으로 헌법을 부정하는 모순을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대다수가 안다. 인간이 스스로 자연이 되어버릴 정도로 키운 힘이 사실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대통령이 수호하려는 헌법은 사실상 법을 앞세운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간을 위한 수단인 줄 알았던 자연이 기후위기의 형태로 인간의 지반을 공격하듯이, 자신을 위해 수단화한 법의 효과가 실질적 주권자인 국민 안에서 다양하게 파생되고 재이용되면서 더 큰 쓰나미로 변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자연의 질서는 물론, 사법과 정치 본연의 질서를 그 어떤 것보다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11-23 | hrights | 조회: 884 | 추천: 9
  최낙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얼마 전, 법무부 국정감사에 관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일개 임명직 국무위원이 "저는 다 걸겠다. 장관직을 포함해 앞으로 어떤 공직이든 다 걸겠다. 의원님은 무엇을 걸 것인가" 했다는 기가 막힌 기사를 보았습니다. “나는 몽땅 올인! 쫄리면 뒤지시든가” 하는 어떤 영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국정감사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무슨 화투판의 끗발을 확인하는 일과 같은 것일까요? 관련 동영상을 찾아봤더니 자신에게 뭔가 불리하다 싶으면 무조건 발끈하며 떼를 쓰는 철부지 같기도 해서 조금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그 기사와 동영상을 보고 나니 문득 30여 년 전에 시시비비를 가렸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기에 이야기가 분명하고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강의 줄거리는 이러했습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실향민의 자식으로 서울 변두리에서 나고 자란 저는 ‘고향’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읽은 듯한 A라는 친구가 자기 집으로 며칠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친구의 집은 경북의 P라는 시 근교였습니다.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당시 지방은 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거의 시골과 같았습니다. 친구의 기꺼운 초대로 P시의 시골 같은 근교에서 이틀 정도 고향의 맛을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A가 자신의 고교동창 B를 만나기로 했으니 P시에 나가 같이 술을 한잔하자고 했습니다. B는 우리와는 달리 전교 1, 2등을 다퉜으며 S대 법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했습니다. A는 자신이 B 같은 대단한 친구와 친하다는 것을 은근 자랑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녁 무렵 시내에서 처음 만난 B는 그야말로 자신감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습니다. 웃는 얼굴로 A와 저를 번갈아 보는 B의 눈빛과 표정은 뭔가 당당해 보였습니다. 간단한 수인사를 마친 후, 점잖게 말을 아끼던 B는 술 몇 잔을 마신 후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술도 잘 못하고, 말도 잘 못하지만...”이라고 시작된 그의 말은 곧 연설처럼 길어졌습니다. “이 사회라는 게 말야... 정의라는 게 말야...” 1차, 2차를 마치고 자정이 넘어 들어온 여인숙에서까지 B의 말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피곤했던 친구 A가 B에게 “그래, 니는 똑똑하니까... 알았다. 니 말이 다 맞다. 이제 그만 자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A의 얼굴을 쳐다보던 B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호통치듯 말했습니다. “알아? 니가 뭘 알아?” 갑작스런 B의 태도에 잠시 놀랐던 A가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뭘 알겠나, 됐으니까 그만 자자.” “되긴 뭐가 돼?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지금 잠이 오냐?” B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여인숙 유리창에 재떨이를 던졌습니다. 유리창이 깨지고 A와 B의 말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여인숙 주인이 올라왔습니다. 여인숙 주인을 보고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A와 달리 B는 더 흥분한 듯 보였습니다. B가 여인숙 주인에게 삿대질을 하며 퍼붓듯이 소리쳤습니다. “아저씨가 뭔데, 남의 방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오는 건데?” A와 B의 말다툼이 이제 B와 여인숙 주인의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숙 주인이 막무가내의 B를 감당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여인숙 주인의 속이 썩어들어갈 때쯤 다 필요없다는 듯이 대뜸 B가 말했습니다. 출처 : wallpaperbetter “아저씨, 우리 경찰에 가서 시시비비를 따져볼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B의 말에 A는 깜짝 놀라 여인숙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으나 결국 우리는 파출소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파출소장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저희를 불렀습니다. “니들 뭐 하는 쉐끼들이고?” 잔뜩 졸아 있던 저와 A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OO대학 OO과 1학년 학생입니다” “학생? 이 쉐끼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서운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던 그 경찰관은 고개를 돌려 우리와 달리 빳빳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B에게 물었습니다. “니는? 니는, 어느 학교 다니는데 그래 꼴값을 떨고 있나?” “지는 S대 법대 다니는데예.” B의 대답에 그 경찰관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A와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여인숙 주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 사장님, 혈기왕성한 젊은 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경찰관의 S대 사법고시... 수재... 크게 될... 어쩌구 하며 이어지는 말에 여인숙 주인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일 없이 파출소를 나왔습니다. 그때 소장쯤 되어 보이는 경찰관은 B에게는 어색한 미소와 격려의 말을, A와 저에게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파출소 문을 나서면서 A와 저를 쳐다보는 그 때 B의 표정은 “시시비비 확실히 가렸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해 가을에 자퇴했던 A는 바람대로 한의사가 되어 있는지, S대 법학과를 다녔던 B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고 있을까... 새삼 궁금해집니다. 30여 년 전 일을 곱씹어보자니 정말 시간은 쏜살같이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지 불과 6개월여... 시간은 마치 멈춰 있는 듯이 더디게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남은 4년 반이라니! 시간은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시비비(時時非非)라고 하면 엉터리 말장난이겠지요? 최낙영 위원은 도서출판 밭 주간에 재직 중입니다.
2022-11-10 | hrights | 조회: 816 | 추천: 9
이재성 / 인권연대 운영위원  10.29 이태원 압사 참사는 (일방통행 안내 같은) 간단한 조처만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참사보다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이 압도적으로 명백한 인재다. 나는 세월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관리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최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일부러 방치했다.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뻔한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질서를 책임지는 주최 쪽이 없다면 안전사고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주최자가 없다는 건 방치의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 개입의 사유로 삼아야 했다. 개입의 법적 근거가 없다는 변명 역시 해괴하기는 마찬가지다. 법적 근거가 있어야만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정부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법적 근거가 없으면 이번처럼 국민이 죽어가도록 내팽개쳐도 좋다는 말인가. 정치에 악용하지 말라는 정치적 주장 도처에서 세월호 데자뷔가 감지된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다가 비난 여론이 일자 축소와 왜곡에 나서는 것도 동일한 패턴이다. 이태원 참사를 축소왜곡하려는 준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단순 해상 교통사고라며 축소하는데 급급했던 바로 그들이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고 부르라며 추모 글씨 없는 근조 리본을 강요하고 있다. 경찰력으로 막을 수 없었던 사고라는 이상민의 발언은 세월호 당시 청와대는 콘트롤타워가 아니라던 반응을 떠올리게 한다. 11월 1일 경찰청장의 국회 답변을 보면, 아마도 경찰은 112 신고를 무시한 하급 직원들을 제물로 바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또한 참사 현장의 ‘토끼머리띠 청년’을 세월호 사건의 유병언처럼 국면전환 카드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면피와 떠넘기기에만 열중하는 자들이 희생자 유족의 세금과 통신요금 감면, 외국인 주검 이송비용 지원 등 정부 돈을 쓰는 데는 열심이다. 정부는 책임이 없다면서 돈은 지원하겠다는 건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책임은 지기 싫지만 푼돈은 줄 수 있다는 것인가. 국민을 돈 몇 푼에 매수하려는 얄팍한 속임수요 국민 무시 발상이다. 사후 수습과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사고 원인과 책임자 규명은 필수적이다. 진정한 애도는 철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때 가능한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골든타임이 있듯이 원인 규명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세월호 때 그랬던 것처럼 정쟁을 그만두고 애도에 전념하자는 탈정치 주문이 쏟아진다. 이례적으로 서둘러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지금은 애도할 때이니 책임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정작 자신들은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려 온갖 술수와 국민 무시 발언을 일삼으면서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라니, 적반하장의 달인들답다. 이념투쟁 하지 말자는 자들이 가장 이념적이듯, 정쟁하지 말자는 자들이 가장 정치적이다. 이태원 참사를 가장 정치적으로 대하는 집단은 참사에 정치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들이다. 바뀐 것은 행정권력 뿐 다중안전사고는 손에 쥔 물처럼 빈틈을 찾아 흘러내린다.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는 하드웨어 참사를 지나, 유치원생과 중고생이 집중적으로 희생당한 씨랜드와 인천 호프집 화재를 겪었고, 무엇보다 악몽같은 세월호 대참사를 당하고 나서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인간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대형 참사는 없을 줄 알았다. 참사의 아픔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져서 더는 빈틈이 없을 줄 알았다. 아니, 사람 사는 세상에 빈틈은 없을 수 없겠지만 행정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 믿음이 사실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수정권과 대형참사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꽤 있다. 특히 이태원 핼러윈 축제의 경우 해마다 열렸던 것이고, 수십만이 다녀간 것도 올해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관계당국의 대응에서 문제점을 찾는 건 논리적인 귀결로 보인다. 코로나 거리두기 해제라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코로나 이전에도 많은 인파가 모였던 점을 고려해 볼 때, 대통령부터 구청장까지 모든 기관장이 국민의힘 계열로 바뀐 데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바뀐 것은 행정권력 뿐이라는 문제의식이다. 나는 이것이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검사정부의 약탈적 관점 참사 당일 경찰은 이태원에 137명을 배치했지만 정복경찰은 58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마약 등을 단속하는 사복경찰이었다고 한다. 경찰봉을 들고 질서유지를 하는 교통이나 경비 경찰은 아예 없었다. 10만명 이상 모일 것이라는 걸 경찰도 알았지만 범죄단속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안전은 뒷전이었다. 이 사실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폭로한다. 국민을 단속의 대상으로 보는 약탈적 관점이 참사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아무리 잘해도 인사고과에 반영되지 않지만, 범죄를 단속하면 건수가 올라간다.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실적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경찰만이 아니라 이 정부의 타고난 유전자다. 정적 수사에 편파적으로 올인하고 있는 검찰을 보라. 대통령이 된 검찰 선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조직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단위마다 치열한 실적경쟁을 벌이고 있다. 행정의 본질은 서비스인데 이 정부는 처벌과 단속이라 생각한다. 위임받은 권력으로 봉사할 생각은 않고 군림하려고 한다. 자영업자들이 자기 장사하는데 우리가 왜 돕느냐는 용산구청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안전무시 발언 이태원 참사는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잉태된 것이다.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는 대통령 발언의 파장은 원전업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파리바게뜨 빵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무참하게 죽어나가도 이 정부는 특별연장근로시간을 늘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 가려졌지만, 봉화 아연광산 매몰 사고 현장 구조작업은 헛되이 골든타임을 허비하는 중이다. 대통령의 안전무시 철학은 공무원 사회와 기업 전체에 바이러스처럼 퍼져, 이제 대한민국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장전 상태가 되었다. 이 정부는 참사를 참사로 덮고 있다. 국제 외교무대에서의 욕설 파문으로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켜 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오히려 화를 내더니 김진태가 쏘아올린 채권시장 경색으로 덮었다. 그 위를 이태원 참사가 덮었고, 이제 이태원 참사 위에 북한발 미사일이 쌓이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외눈박이 외교로 북한을 도발하고 일본과 밀착하여 전쟁 위험을 키우고 있다.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임계점을 향해 밀도를 높이고 있다. 공급망 붕괴와 에너지 위기에 이어 유례없이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인해 실물경제의 경착륙이 이미 진행 중인데, 이 정부 인사들의 위기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 중인 경제와 안보 참사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건 국민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진출처 - 넷플릭스 <서부전선 이상없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리더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 휴전협상 발효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해당 부대의 독일 장군은 비겁한 사민주의자들의 타협에 굴복할 수 없다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가서 싸우라고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다. 몇 시간만 지나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병사들은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온다. 20세기 초반의 독일 군대와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는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리더가 미쳤어도 바로 잡을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11-03 | hrights | 조회: 1249 | 추천: 22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북측에서 연달아 미사일을 쏘니 남측 국방부가 본때를 ‘살짝’ 보여주려고 내놓은 게 현무 미사일 발사였다. 하지만 현무 미사일은 뒤로 날아가 버렸다. ‘빽도’를 한 것도 동네 창피한데 하필 파편이 민가 근처에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북측이 쏜 탄도미사일은 4500km를 날아가 태평양에 떨어졌다.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다. 그게 끝일까. 사진 출처 - 한국경제  ‘현무-2C’ 낙탄 사고가 발생한 건 4일 밤이었다. 당시 현무 발사를 하느라 강원도 강릉시 제18전투비행단에선 강한 불꽃과 소음, 섬광이 발생했다. 강릉 시민들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현무 낙탄 사고로 화재까지 발생해 불길이 치솟았다. 소방서나 시청에서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119상황실에는 4일 밤 11시쯤부터 ‘비행장에서 폭탄 소리가 난다’, ‘비행기가 추락한 것 같다’ 같은 신고가 접수되기 시작했다. 강릉 시민들은 밤새 공포에 떨어야 했다.  군에서는 당초 예정했던 ‘오전 7시 엠바고(보도 유예)’를 이유로 7시까지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혼란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강릉시가 지역구인 국민의힘 의원 권성동까지 나서서 페이스북에 “재난 문자 하나 없이 무작정 엠바고를 취한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며 군의 경직된 태도를 꼬집었을까. 군에서는 나중에야 “사전에 주민 통보나 안전 점검 등을 철저하게 했지만 실시간대 우발 상황에 대해 주민들이 이렇게 많이 놀라고 불안해한 점은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사과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12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현장을 찾았다. 동행취재했다. 합동참모본부에선 당초 “영내 골프장 페어웨이에 떨어졌다”고 했지만 실상은 많이 달랐다. 분명 탄두는 골프장에 떨어진 게 맞다. 하지만 추진체 파편은 공군기지 유류저장시설로 떨어졌다. 파편이 떨어졌던 영향으로 유류저장탱크로 올라가는 계단 철제 난간은 산산조각나 있었고, 파편 흔적 바로 옆에는 유류 주입구와 송유관, 폐드럼통 보관 창고, 가스 배출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합참에 따르면 탄두는 발사지점에서 후방 1㎞, 미사일 추진체는 여기서 400m가량 더 후방에 떨어졌다. 탄두가 발견된 곳에서 남쪽으로 약 700m 지점에 민가가 있었다. 당시 민간인 피해 우려 얘기가 많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살펴본 사고 위험성은 민간인 피해보다도 오히려 기지 내부 유류저장시설이 훨씬 더 심각했던 셈이다. 현장에서 만난 공군 관계자조차 “천운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민주당 의원들을 안내한 공군 장성은 “현무가 뒤로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면서 “전속력으로 뛰어서 1분 30초 만에 유류저장시설로 달려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군은 비밀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해한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면 비공개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네이버와 다음 지도를 통해 현무 낙탄 현장을 살펴보면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제18전투비행단 구역 전체가 거대한 빈 칸이다. 위성사진으로 살펴보면 커다란 숲 모양으로 덮어 버렸다. 군사기밀이니까 그렇단다. 부대 영내에 있는 골프장도 군사기밀인가? 골프장 모습을 위성사진으로 확인하면 적화통일될 위험성이라도 있나?  미국이 영국과 호주 등 일부 동맹국들과 함께 전세계를 감청하는 '애셜론' 프로젝트를 운영중이라고 해서 큰 논란이 됐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좀 시끄럽다 잊혀진 적이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감청기지 이름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구글어스로 해당 기지를 검색해봤다. 호주 한가운데 사막지역에 있는 기지가 보인다. 위성안테나와 건물까지 어찌나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는지 비밀기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어떤 면에선 그래서 더 무서웠다.  몇 달 전만 해도 네이버와 다음 지도에선 청와대 구역이 거대한 빈터같았다. 이제 청와대에 어떤 건물이 있고 길이 어떻게 있는지 모두가 확인할 수 있다. 용산 국방부와 주한미군지역은 여전히 거대한 빈공간이다. 하지만 알려고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구글지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서비스하는 위성사진은 차고도 넘친다. 실제 찾아서 위치를 확인해보면 겨우 이것때문에 숨겼나 우습기만 하다. 게다가 윤석열 사는 집을 빈공간으로 남겨놓지 않은 걸 보면 일관성도 없다. 모든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홈페이지에는 조직도는 물론이고 각 부서 관계자들 이름을 공개한다. 이름은 물론 맡은 업무와 사무실 전화번호도 확인할 수 있다. 국방부는 그렇지 않다. 국방부 홈페이지에선 이름을 찾을 길 없다. 장관과 차관을 빼고는 누가 누구인지 모르도록 해놨다. 그렇다고 해서 알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관보도 있고 신문을 조금만 뒤져보면 인사 관련 정보를 얻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군사보안으로서 효과는 없이 그저 어제 했으니까 오늘도 한다는 편의주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런 거 숨겨놓으면 재미있나요?”   강국진 위원은 현재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26 | hrights | 조회: 750 | 추천: 8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리사회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식의 풍조가 강하다. 흑백의 논리구조에 익숙하다. 개인 간이든 집단 간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내로남불 사회’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내로남불’이 습벽이 된 우리사회에서 동일한 잣대의 적용이 없다. 보편타당한 잣대가 아니라 이중, 삼중의 잣대로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에 익숙하다. 나와 내편에 대한 점검과 반성은 설 자리가 없다. 남과 다른 편의 잘못에 대한 비난이 난무하고 나와 내편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그 누구도 악으로 규정하기 십상이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자기편향을 극복하고 서로 다른 상대에 대한 존중과 관용의 정신으로 이성과 논리에 기반한 대화와 협력으로 보편타당한 상식이 통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내로남불’ 사회의 잘못된 풍조를 극복하는 길이다.  ‘내로남불’ 사회를 조장하고, 이를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장애물 중의 하나가 한반도 분단냉전체제이고 국가보안법이다. 분단냉전체제에서 비롯된 외세와의 군사동맹의 논리가 ‘내로남불’의 극치다. 이에 혹여 토를 달았다가는 적으로 간주되어 종북몰이를 당하거나 국가보안법의 위협과 처벌에 직면하게 된다.  외세가 남쪽 땅에 배치하였던 핵무기나 연합훈련을 위해 수시로 전개하는 핵 전략자산은 방어용이고 북의 핵무기나 미사일은 언제나 적화통일의 수단으로 치부되거나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도발로 간주된다. 한미동맹은 아무리 종속적이어도 북의 위협을 빌미로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된다. 그 누구든, 심지어 대통령이라도 감히 북 핵과 미사일의 자위적 성격을 입에 뻥끗했다가는 사회정치적으로 생매장을 당할 수 있다. 북보다 수백 수천 배 더 많은 핵(미사일) 실험과 핵 (미사일) 보유 및 핵(미사일) 전력을 동원한 군사훈련을 하는 나라가 동맹을 앞세워 76년째 주둔하는 현실이 합리화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급기야 을사늑약 이후 40년 동안 조선을 식민지배한 전범국가의 전범기를 앞세운 연합 군사훈련마저 불가피한 선택으로 용인될 지경에 이르렀다. 동족 악마화의 논리는 교전권과 전력보유를 금지하는 평화헌법을 부정하며 군국주의의 부활로 치닫는 일본과의 군사안보협력을 정당화하며 한미일 군사훈련의 상시적 전면화를 통해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치달을 기세다.  동족을 악마화하는 외세의 편에서 외세에 의존하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의 궤변은 우리사회의 역사 왜곡과 현실 인식 결여 및 윤리의 실종을 초래하였다. ‘내로남불’의 억지 주장이 상식으로 둔갑되고 진실인 양 행세하며 온 사회를 뒤덮게 되었다.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논리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내로남불병’이다. 가히 치유 불능의 분단정신병이다.  ‘내로남불 분단정신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역발상이 필요하다. 한반도 분단냉전체제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인식에 대한 반성과 인식의 대전환만이 ‘내로남불’의 습벽을 고칠 수 있다. 역사를 바로 잡고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상식과 진리와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의 기만에서 벗어나 한반도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동족을 존중하며 화해하고 포용하는 한국사회로 거듭나야 우리민족이 상생 번영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내로남불 분단정신병’을 치유하기 위한 역발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철저한 점검과 반성이 필요하다. 거꾸로 하면 된다. 동족의 의견과 제안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동족과 화해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외세의존에서 탈피해야 한다. 당장은 동족과 외세 사이에서 중립적 위치에서 공정한 중재자가 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동족을 반국가단체로 매도하며 동족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유사한 주장을 하여도 국민 모두를 처벌할 수 있는 악법 중의 악법이다. 온 국민을 상대로 동족을 악마화하며 동족대결의 흑백논리를 강요하고 세뇌시킨다. 동족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비난하는 것만이 용인되는 흑백 논리의 압도적 힘 앞에서 이를 거부하고 저항하기가 매우 어렵다. 국가보안법은 ‘내로남불’의 역발상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에 저항할 용기가 없는 식민의 노예들에게 차려지는 것은 ‘내로남불’의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을 찾을 수 없다.  작금의 한반도 핵전쟁 위기의 도래를 맞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사회의 지배적 풍조로 자리잡은 ‘내로남불’의 반이성적 악순환의 논리에서 벗어나 역발상을 통한 인식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한반도기(출처- 위키백과)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19 | hrights | 조회: 1447 | 추천: 5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박태순의 소설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1980)에 나오는 “이 새로운 시대는 분명 잘못되어진 시대였고 진보가 아니라 퇴보로 뒷걸음질 치는 그러한 새로운 출발점을 이루었다”는 구절에 ‘감전’되어 그가 '역사 서당'에서 풍월을 배우고 익힌 지도 어언 4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말이 좋아 역사의 풍월이지, 사실 그가 주로 읊조린 건 풍월의 지엽말단(枝葉末端)에 불과했다. 그가 간신히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가락이라는 것도 서양사⊃(=중에서도)사상사⊃서양근대사상⊃자유주의⊃19세기 말 영국의 신자유주의 정도였다. 하여 그는 역사 풍월을 익힌 거의 모든 동무나 성님-아우님들이 그러하듯, 다른 갈래의 역사 풍월이나 역사 풍월 전반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길 삼갔다. 출처- 알라딘 중고서적  불조심하듯이 말조심을 한다는 경계의 마음이 있어서 그리했다기보다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사 풍월이라는 게 넓기가 한량(限量)이 없고, 갈래가 수십, 수백인지라 일언지하로 그 전모를 언술하기란 썩 어렵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가락을 하는 소리꾼이라고 해서 죄다 명창도 아니고, 명창이라 해도 '대문자로서의 역사'를 논할 식견을 겸비한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서도 매우 드물었다.  사정이 그러했음에도 그는 ‘역사 서당’의 언저리를 쉬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유명한 소리꾼이 되겠다는 꿈, 그에게는 그런 명창의 꿈 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다만 역사의 가락 가운데 한 대목이나마 자기 색깔의 소리로 불러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을 뿐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많지만, 행여라도 자기처럼 노래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그에게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은 있을법한 시구(詩句)가 아니라 틀림없는 사실(事實)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그가 초로(初老)의 사학도가 되면서 역사 풍월을 생계의 수단보다는 생각의 길잡이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돈에 의해 재단되고 있다. 돈이 되는 것만이 쓸모가 있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쓸모만이 아니라 가치 있음/없음 자체가 경제적 유용성에 의해서 평가된다. 사람의 노동만이 그런 게 아니다. 사람 자체를 ‘돈이 되는 사람/돈이 안 되는 사람’으로 나누는 게 당연시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사랑의 윤리(倫理)보다는 교환의 이윤(利潤)에 좌우되고 있다.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경제적 유용성이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시장전체주의”(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의 표현)의 세상에서, 그에게 역사 풍월을 읊조리는 일은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이것은 홍세화 선생의 표현)을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얼핏 본 역사 세계지만, 거기에서 <그저 배부르게 사는 삶과는 다른 삶도 있다; 사회적 금기를 깨려는 시도는 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치부나 정치적 출세에는 무용한 일에 젊은 날(의 한 시절)을-나아가 일생을- 걸기도 한다>는, 한 마디로 의미 추구의 삶도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의 가락을 얻기도 했다.  대다수 국민과 마찬가지로 그도, 현재의 정권은 검사 생활로 잔뼈가 굵은 대통령과 이런저런 인연이 얽힌 검찰 출신들로 짜여 있다고 생각한다. 검찰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출세한다고 하나 그들은 그저 속칭 ‘바지사장’이거나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청받아서 하는 일꾼처럼 보일 뿐이고, 국정의 요직은 검찰 출신들이 꿰차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봐도, 법무부 장관과 차관, 통일부 장관, 법제처장, 보훈처장, 금융감독원장,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국무총리실 비서실장이 검사 출신이고, 대통령실의 인사, 법률, 공직기강, 총무 관련 업무도 검찰 출신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검찰 출신들이 독식하고 있는, 대단히 이례적인 인사편중 현상이야말로,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검찰 공화국’이라고 칭하기도 어려운 ‘검찰 독재’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라고 그는 생각한다.  ‘열흘 붉은 꽃은 없고(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권력은 십 년 못 간다(권불십년, 權不十年)’라는 옛사람들의 말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역사 풍월을 읊조리다 보면, 아무리 막강하고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권력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한다. 역사상 모든 형태의 독재가 그러했듯이, 작금의 검찰 독재는 끝날 수밖에 없단다. 무오류의 교황권(Ultramontanism)을 내세웠던 서양 중세의 가톨릭 단일 신앙 체제이든; 신의 이름으로 왕의 권력을 정당화했던 절대주의의 독재이든; 공산당 독재와 같은 ‘일당독재’이든; 히틀러처럼 (돌격대, 친위대, 비밀경찰 등의) 준군사조직을 동원한 독재이든; 군부독재와 같은 ‘(한) 조직의 독재’이든 간에, 예외 없이 무너졌다. 끝나지 않는 잔치도 없고, 끝나지 않는 독재도 없다! 이 주장은, 그에 의하면, 주관적 소망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끝이 좋으냐, 나쁘냐이겠다. 인간의 지혜가 모자랐던 옛날에는 (가뭄, 홍수,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의 힘, 운명(의 장난)이나 신탁, 초월적인 존재의 섭리나 영웅적 개인의 의지에 따라 비극으로 끝날지, 희극으로 끝날지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통 사람들의 집합적 의지와 힘이 역사를 좌우한다는 게 역사적 상식이 되었다. 따라서 지록위마-아니, ‘지(指)바이든위(爲)날리면’으로 표상되는 저 무도한 검찰 정권에게 어떤 결말을 지어줄지는, 눈과 귀가 멀쩡한 우리네 시민에게 달린 일이 되었다. 역사는 우리가 일하기 나름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12 | hrights | 조회: 963 | 추천: 13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겨우 한 달 남짓 살고 이곳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한 것도 있고 이상한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은 메모를 해두었는데, 피차 거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중 서너 가지 소개합니다.  *9유로(euro) 티켓 : 올해 6월~8월 사이에 9유로(13,000원) 티켓 하나로 일반 대중교통인 버스, 기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연방의회에서 시행했다. 석 달 동안 교통비가 9유로라는 말이다. 시내버스 2.9유로(한 달권 55유로), 튀빙엔에서 근처 도시로 전철을 타면 20유로는 기본이기 때문에, 9유로 티켓 있을 때 가고 싶은 데 가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8월 16일에 도착한 우리는 보름 남짓 혜택을 누렸는데, 그 위력을 실감하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기한을 늘이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가스, 전기값 인상에 따른 재원 준비가 우선이라 더 연장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코로나 상황에서도 중산층 이하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훨씬 여유로워졌다. 버스와 전철이 공영이라 가능한 제도라고 한다. 역사를 보아도 공공재의 사유화, 이걸 두고 선진화, 효율화라고 하는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9유로 티켓 : 이 티켓이 준 안정감이 과연 싸다는 이유만으로 설명이 될까.] * 숲 : 근대 조림(造林)의 선구였던 나라답게 숲이 많다. 숙소 근처의 쇤부흐(schönbuch)를 자주 간다. ‘너도밤나무 숲’이란다. 멀리서 보면 스멀스멀 귀신이라도 나올 듯하다. 저녁 무렵이나 안개라도 피어오르는 날이면 영락없이 미녀와야수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날 그런 모습이다.  귀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춘추좌씨전》에는 옛날 하(夏)나라 우 임금이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한 뒤 거기에 숲이나 강에 사는 각종 귀신의 모습을 새긴 뒤 백성들에게 알려 그들을 피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이 얘기는 뒤집힌 걸로 보인다. 이미 숲이나 강을 이용하며 그 속에 살던 인민들은 숲과 강에 익숙했을 것이다. 정작 숲의 귀신을 몰랐던 것은 우 임금이 아니었을까? 우 임금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몰랐을 것이다. 로빈훗이 노팅엄 셔우드 숲으로 들어갔을 때, 그를 잡겠다고 왔던 국왕의 군대는 숲속에서 지리멸렬했을 뿐이다. 국가 행정이 주민들이 사는 동네나 그 언저리까지 미친 것은 불과 2세기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런 추측이 거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숲은 사람들이 사과나 딸기 같은 열매, 집이나 외양간 지을 목재, 빵을 구울 땔감,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꿩, 사슴, 멧돼지 등을 공급받는 공유지였다. 강과 함께 숲은 사람들의 생계에 유력한 후원자였다. 잉글랜드 〈마그나 카르타〉나 조선의 《경국대전》에서는 이곳들을 ‘사사로이 점유할 수 없는 공유지’로 못박아놓고 있다. 흥미롭게도 튀빙엔 여행안내소에서 얻은 자료가 16세기 〈튀빙엔 협약(Tübinger Vertrag)〉 사진과 번역문이었는데, 여기에도 농민들의 공유지 이용권에 관한 조항이 명시되어있다. [쇤부흐 숲 : 로빈 훗이 나올 듯한 숲인데, 곳곳에 길이 나 있어 사람들이 걷고 뛴다.] * 걸림돌 : Stolperstein. 걸려넘어진다는 stolpern + 돌 Stein의 합성어이다. 재질은 돌이 아니라 구리이다. 튀빙엔 대학 한국학과에서 본관으로 걸어가다가 이 슈톨퍼슈타인에 발이 걸렸다. 알고 보니 정말 발에 걸리게 0.5cm 정도 도드라지게 설치한다고 한다. 유대인, 집시, 기독교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 ‘차별받고 처분된 인간’을 기억하기 위한 조각품이다. 인권연대의 ‘5월 걸상’과 가까운 기억 프로젝트이다. 1940년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보면서 그의 리얼리즘에 놀란 적이 있다. 이후 조금 더 사실을 알고부터는 놀라기보다, [당황(betroffenheit)]이라는 《나치시대 일상사》를 썼던 포이케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놀라서 설마, 하면서 고개를 돌리다가도 뒷머리를 당기는 듯해서 외면할 수 없고 왜 그런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뒤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야 내가 인간일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소피 벨, 여기 살다. 1852년 생. 1942년 추방. 그해 12월 8일 사망.] * 비자 신청 : 석 달 전에 9월 13일 비자 신청을 예약했다. 그 며칠 전에 날짜를 상기시켜주는 메일이 왔다. 고마웠다. 13일 3시에 시청 대기실에 도착하여 차례를 기다렸다. 시간이 꽤 지나도 예약번호가 뜨지 않았다. 이상해서 외사과에 가보니 담당자가 결근했다. 그런데 그가 결근한 지 동료 직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무단결근.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이 사람이 어디 사고를 당했던지 아픈가보다, 싶었다.  내가 메일을 보낸 지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내 주민등록이 검색이 안 된다고. 첫째, 주민등록은 이미 했다. 또 서류는 비자 신청 때 접수하면 되는 것이지, 검색 여부와 상관이 없다. 무단결근으로 못 지킨 비자 예약날짜를 다시 잡아주면 되는 거다. 그래도 나는 일단 주민등록 서류까지 메일로 보내주었다. 또 소식이 없다. 내가 다시 메일을 보냈다. 영국도 가야하고 해서 비자가 필요하다, 다시 예약을 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혹시나 했던 걱정은 이제 무책임에 대한 어처구니없음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난 뒤 27일 2시 반에 오라고 메일이 왔다. 나와 예약 일시를 상의한 게 아니라 그냥 그때 오란다. 직장에 나가야 하는 형편이었다면 어땠을까? 일시를 나와 상의해서 조정하자는 메일을 쓰려는데, 동료가 말린다. 더 번거로워질 수 있다고. 그날따라 기분도 좋고 다른 약속이 없었던 나는 ‘남의 나라니까’ 하고 참기로 했다.  신청하는 날. 주한 독일대사관 서식에 신청서를 미리 작성해갔는데, 그 서식이 아니라며 튀빙엔 시청의 신청서를 준다. 외무부 서식 다르고, 시청 서식이 다르다? 웃긴다. 기재 내용? 다 같다. 칸과 종이 색깔만 다른 거다. 게다가 혼인증명서가 필요하단다. 대한민국 대법원의 배우자증명서와 외무부의 아포스티유까지 첨부했거늘. 안 된다고 했다가, 나는 이 외에 다른 혼인증명서를 제출할 수 없다고 항의(?)하니 그럼 알겠다고 한다. 그럴 걸 왜…….  숙소계약서, 대학계약서를 추가로 보내달란다. 숙소계약서가 없으면 주민등록(Anmeldung)이 안 되니, 주민등록 서류를 제출했다는 말은 숙소계약서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숙소계약은 대학 웰컴센터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학과의 초청장과 대학의 협약서가 없으면 숙소계약서는 애당초 발급받을 수가 없다. 쉽게 말해 추가로 요구한 둘은 비자 신청에 전혀 불필요한 서류인 것이다. 지금도 그 직원이 이 일의 담당자가 맞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동료는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한다. 그럴까? 그럴 리 없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무책임이라면 처음일 리가 없다. 어떤 동료의 말로는 독일 공무원은 처우나 사회적 인정이 낮고, 그래서 책임감이나 뭐 이런 거 기대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럴까? “인간은 스스로를 우습게 여긴 다음에 남들이 우습게 여기는 법이다.[人必自侮然後人侮之]” 더구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나중에 책임을 지게 되는 상황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은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더 문제이다. 책임감은 공무원의 덕목에 관계되지만, 사과할 줄 모르는 것은 인간다움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 [튀빙엔의 시위와 장날. 인구 9만의 도시가 갖는 자립성과 안정감이 부럽다. 대도시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에 분산되어 살 수 있는 힘일 텐데, 이걸 잘 들여다보아야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05 | hrights | 조회: 1077 | 추천: 8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직도 신자유주의적 자유인가  신자유주의는 자유경쟁에 입각한 시장만능주의다. 18세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담긴 고전적 경제 자유주의를 보내고, 자본의 방임적 자유를 통제하면서 자본과 고용을 확대시킨다는 수정자본주의(일명 케인스주의)를 거친 뒤, 동구권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 속에서 20세기 후반에 힘을 얻어온 시장 경제의 흐름이다. 1970년대 후반에 영국과 미국에서 펼쳤던 자유 시장 정책 이후에 급격히 세계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정부의 개입이 경제의 원리를 훼손시킬 수 있으니, 정부는 개인 및 기업의 권리와 사적 재산권을 보호하되 개입은 최소화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이에크는 자유를 경제 최고의 가치로 꼽았다.  이때 자유는 경쟁이라는 외피를 입는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국가는 시장이 자유롭게 경쟁해 최대한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능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가 시장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경쟁이 가능한 한 효과적일 수 있도록 조건을 창출하는 일, 경쟁이 효과적이지 못하면 보완해주는 일” 정도이다. 그에게 자유경쟁은 시장중심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동력이자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오늘까지 한국 사회에서도 대단히 익숙한 주장들이다. ‘루저’를 양산하는 사회  이런 흐름이 자연스러워지면서 경쟁을 통해 더 많은 성과를 생산하도록 충동하는 체제를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심신이 피곤해져도 피곤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모든 경제 행위를 자유의 이름으로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자유경쟁의 원리로 넘쳐나며, 자본의 힘으로 돌아가는 시장은 성과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고갈시키는 인간을 찬양한다. 바빠서 피곤할수록 능력자로 평가받는다.  이런 자유경쟁에는 자의든 타의든 낙오자가 있게 마련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기존의 차별적이고 위계적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든다. 서로를 내몰면서 자유가 만들어놓은 경쟁적 성과 문화가 폭력으로 작동한다. 자유가 폭력을 구조화시키는 동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는 나름 긍정적인 의도로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인간을 구속하는 언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대통령의 자유와 평화  윤석열 대통령은 유난히 ‘자유’라는 말을 좋아한다. 지난 2022년 5월 취임사에서는 ‘자유’라는 말을 35번, 8.15경축사에서는 33번, 9월 유엔연설에서는 21번이나 했다. 자유가 위협받고 있으니 자유의 이름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때의 자유란 무엇인가. 누구로부터 어떤 위협을 받고 있으며 연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일까. 9월 유엔연설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자유론은 원론적으로는 무난했다: “진정한 자유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자아를 인간답게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고, 평화는 인류 공동 번영의 발목을 잡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인류가 공동으로 더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는 것입니다.” ‘자아를 인간답게 실현할 수 있을 때 평화의 토대가 갖추어진다’는 의미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일견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좀 더 보면, 어떤 이의 자아가 어떻게 실현된다는 것인지, 정말 온 인류가 그런 기회를 공평하게 갖는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평화가 인류 공동 번영의 토대를 갖추는 ‘계기’인지, 아니면 공동 번영의 ‘과정’과 ‘상태’인지도 불분명하다.  평화학에서 말하는 평화는 일체의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 혹은 실제로 폭력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윤대통령의 유엔연설문에서는 ‘평화가 인류 번영의 토대를 갖추는 것’이라는 애매한 말로 끝내고 만다. 평화는 인류 공동 번영의 과정이자 상태이고 결과이자 목적이지만, 연설문에서는 평화를 번영의 원인인 것처럼만 말한다. 뭔가 논리와 범주가 맞지 않는다. 윤대통령은 평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앞선 문장에서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는 말을 서너 번 이상 사용했을 때 그의 자유와 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위협인지 예측은 되었지만, 그때까지도 분명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진영논리인가  그러다가 연설문 말미에 윤대통령은 유엔의 의미를 추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유엔이 창립된 직후 세계 평화를 위한 첫 번째 의미 있는 미션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유엔군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생각하는 자유라는 것이 진영논리에 입각한 대단히 이념적인 발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자유경쟁에 입각한 경제 규모의 확장을 자유의 목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 자유가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공고하게 만들어서 인간을 다시 속박으로 몰아넣고, 특히 온갖 ‘루저들’을 양산할 수 있는 모순적 계기가 된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인류 공동 번영의 발목을 잡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인류가 더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는 것”이라는 앞선 말을 뒤집는 모순적인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윤대통령에게 자유와 평화는 정말 인류 공동의 것인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누군가 어떤 세력은 배제하는 차별적인 것인가. 냉전과 대립의 언어를 넘어서야  현재 전 세계 193개국이 유엔 회원국이다. 거의 모든 나라가 정치적 이념, 권력의 의도와 상관없이 유엔에 가입해 있다. 그런 유엔에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유엔군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것”을 “유엔 창립 이후 첫 번째의 미션이었다”고 말했어야 했을까. 한국전의 당사자였던 북한과 한국전에 참전한 중국 등 이른바 사회주의국가와 사실상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언어를 써야 했을까.  유엔은 대한민국만 합법적인 정부로 여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유엔 성립 초기에 미국적 질서에 따라 그렇게 했던 역사도 있고, 한국전쟁 당시 유엔의 이름으로 연합군을 파병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유엔은 원칙적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것이다. 유엔의 논리 안에서 한국과 북한은 대등한 한 표를 지닌 별개의 나라이다. 이런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80여년전 언어를 구사했어야 했을까. 윤대통령이 자유라는 말을 반복하다가 급기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운운하는 옛말을 꺼냈을 때, 그의 자유가 인류와 한반도의 특정 세력에게만 유리한 자기중심적 자유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출처- pixabay 자유인가 이기성과 불안감인가  자유는 ‘스스로[自] 말미암음[由]’이다. 자유는 ‘준비된 자신[自]으로부터 나온다[由]’. 나아가 자신의 자유가 타자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도록 할 때 진짜 자유가 된다. 자기중심성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자유를 다시 억압하는 힘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남발하다시피 하는 그 심층에는 이기성과 불안감이 있다는 뜻이다. 남발하는 자유에 편승하는 대중의 언행도 불안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증거이다.  자기중심적 자유는 타자에 대해 도전하고 타자를 속박한다. 당연히 그 타자도 자유의 이름으로 나에게 도전해온다. 이런 식으로 ‘자유들’의 경쟁이 서로를 속박으로 몰아넣는다. 자유의 이름으로 북한에 대립하면 북한도 더 대립적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 뿐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종종 북한을 이용하는 중국도 한국을 다시 압박하는 전략으로 이어가지 않겠는가.  북한은 선동과 구호의 나라이다. 동네와 거리 곳곳에 각종 구호가 담긴 현수막이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각종 하향식 축제도 인민의 일치단결을 위한 구호로 넘쳐난다. 그러나 그런 선동적 구호는 선동과 구호가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북한 사회의 속내에 대한 역설적 증거이다. 이것이 남한에 대한 대립으로 이어진다.  마찬가지이다. 윤대통령이 반복하는 자유의 심층에는 특정 세력, 가령 이른바 ‘사회주의’에 대한 대립과 적대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런 대립적 자유는 다시 스스로를 억압과 속박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자유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억압을 더 공고하게 만든다. 자유는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해체시켜 나갈 때 얻어지기 시작한다. 자유라는 말을 유통시키면서 특정 세력을 억압하는 모순적 구조를 안으로부터 뒤집어 그 속박을 풀어나갈 때, 속박이 느슨해지는 그만큼만 자유는 서서히 모양을 드러낸다. 자유가 자신을 위한 일시적 달콤함에 취해 남도 죽이고 결국 자신마저 죽이는 마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09-27 | hrights | 조회: 936 | 추천: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