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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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혁용(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태중(병원장),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 글을 씁니다.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예전에 비해 시간 여유가 많은 생활을 하다 보니 옛날 일들을 종종 생각하게 된다. 아마 1994년 5월초 즈음이었으니 벌써 30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2년여 몸담고 있던 어느 대기업 산하 연구소를 나와 정처 없는 프리랜서의 길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각오도 다질 겸 며칠 시간을 내어 동해안을 찾았었다. 돌아오는 길은 설악산 미시령을 넘는 길을 택했는데, 지금은 미시령 밑으로 터널이 뚫렸지만 그 때는 편도 1차선, 왕복 2차선의 좁고 구불구불한 구간을 넘어야 했다. 돌아오는 날은 마침 주말, 토요일이었다. 서울로 가는 차선은 텅텅 비었지만 속초 쪽으로 들어오는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개 중턱쯤 이르렀을 때 거의 서 있다시피 하는 반대 차선에서 차 한 대가 갑자기 삐져 나왔다. 피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내 차와 정면 충돌했다. 내 차가 한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멈추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내가 오르막 차선이어서 속도를 내지 못했고, 상대 차도 정체구간에서 튀어나온 것이라서 충돌 강도가 약했다는 것인데 어쨌든 내 차는 엔진룸이 완전히 망가졌다. 상대방 차에서는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나왔다. 추월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중앙선을 넘어 와 낸, 이해불가한 사고였지만 막상 사고를 낸 당사자는 멀뚱멀뚱 서 있을 뿐, 뭘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모르는 듯 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한 사과도, 사고처리를 위한 대책도 없이 그냥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에서 부인인 듯한 여인이 내렸다. 그 여인은 나를 붙잡고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친구 부부와 넷이 주말 동해안에 놀러오는 길이다. 이 차는 친구에게 빌려 온 차다. 자기네들에게는 보험이 없다. 그러니 경찰은 부르지 말고 해결하자. 차 수리비는 지불하겠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대포차"에 걸린 셈이었다. 사고로 차량통행이 완전히 막히고, 양 방향에서 울려대는 경적 소리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 사정을 살펴보았다. 먼저 그 여인의 처지가 딱해보였다. 남편은 그야말로 대책이 없는 사람같이 보였다. 특별한 직업도 없는 것 같고 부인의 노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놀러 온답시고, 그것도 남의 차를 빌려 나섰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안되었다. 보험도 없으면서. 거기다가 말도 안되는 중앙선 침범까지 하고. 정말 아무 대책 없이 사는 사람 같아 보였다. 문제는 그 부인이었다. 부인이 거의 사색이 되어 경찰을 부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해결하셨을지 묻고 싶다. 나는 그 부인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보여 그녀의 요청대로 하기로 했다. 그녀가 대책 없는 남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을까 하는 오지랖 넓은 걱정까지 보태서 말이다. 그래서 내 차는 다시 속초 시내로 견인되어 가고 정비소에 수리를 맡긴 후 나는 고속버스 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수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버스 편으로 속초에 가서 차를 찾아왔다. 정비소에 지불한 수리비는 그 부인에게 나중에 돌려 받았다. 그러나 차를 찾으러 다시 속초를 오가며 지불한 시간이나 비용은 그냥 내가 부담하였다. 그런데 정비소에서 에어컨 수리비용을 누락했다고 10여만원 정도를 추가로 요구해 왔다. 돈을 부쳐 주고 나서 그 부인에게 이야기하니 부쳐 주겠다고 하고는 끝내 종무소식이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쯤에서 그 일은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돈이 거짓말하는 거지 사람이 거짓말 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반전은 6년 후에 일어났다. 그 일은 새카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2000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루 종일 선거운동을 하다가 사무실로 들어오니 운동원들이 계란 파티를 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삶은 훈제달걀이 널려 있고 사무실 안은 그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여성분이 계란을 몇 십 판 싣고 와서 주고 갔다고 했다. 열성지지자께서 그런 후원을 했나 싶어 바쁜 유세 와중에 계란상자에 적혀 있는 주소로 찾아갔다. 훈제달걀을 취급하는 도매상 같은 곳이었다. 주인을 찾아 인사룰 하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알고 보니 6년전 미시령 고개 위에서의 그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사이 일산에 들어와 계란 사업을 시작했었고, 어느 날 길을 지나다 선거벽보에 붙어있는 내 사진을 보고는 사무실을 수소문하여 찾아왔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잠시 스치듯 지나쳐 봤을 사람인데도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 여인 역시 미시령에서의 일이 가슴에 오래토록 부담으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 모두 참 희한한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일에 감개무량해 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 일은 두고두고 나에게도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원론적 질문에서부터, 손해 보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까지. 어쨌든 그 만남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 보다는 훨씬 훈훈한 만남이었다.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까지 떠올렸다면 그건 너무 오버하는 것일테고. 지혜로운 어른들께 들은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이날 이때껏 살아오는 동안 나 모르게 내 목숨 구해주고 도와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바람의 딸’ 한비야가 해남 땅끝마을에서 DMZ까지 도보여행을 하다가 충북 괴산 어느 산골에서 만났던 할머니 이야기다. 6.25때 후퇴하는 어린 인민군 병사를 숨겨주고 치료해 보내줬다는 할머니에게 한비야가 물었다. “그러다가 걸리면 바로 총살인데 무섭지 않았어요?” 이 질문에 대한 할머니의 대답이 바로 위의 말이다. 나 모르는 새에 내 목숨 구해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올해로 창립 9주년을 맞는 장발장은행 사업이 성황(?)이다. 지난 2015년 2월 25일,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가는 현대판 장발장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설립된 장발장은행은 그동안 1만 5194명의 후원자들로부터 16억 가까운 성금을 모아 1300여명의 장발장들에게 22억 6천여만원을 대출해 줬다. 벌금을 못내 감옥에 가야 했을 사람들 중 1300명을 구했다는 말이다. 모금액보다 대출액이 더 많은 것은 그사이 대출을 갚은 장발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출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대출 신청자에서 후원자가 된 경우들도 있다. 장발장은행이 성황을 이루는 것은 비극이다 장발장은행은 하루빨리 은행문을 닫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특히 윤석열 정권 들어 벌금을 내지 못해 몸으로 때우는 노역장 환형유치는 2021년 2만 2천명에서 2023년 11월 기준 4만 1800명 까지, 불과 2년새에 두 배 가까이 폭증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장발장은행에 대출을 신청해 온 우리 시대 장발장들의 사연은 눈물겹다. 200여년 전 배고픔에 빵 한 조각을 훔쳐 범죄자의 나락으로 떨어진, 소설 속 장발장 이야기가, ‘눈떠보니 선진국’이라던 202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한 논픽션의 현실이다. 후원자들의 사연도 하나하나가 감동적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넘어 그들의 연대하는 정신이 감동이다. 그들이야 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더불어 숲’을 만들어가는 이들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내미는 연대와 선행의 몸짓은 내가 모르게 받았던 어느 누군가의 도움과 선행에 대한 답장일 것이다. 정범구 위원은 전 독일대사입니다.
2024-03-06 | hrights | 조회: 1988 | 추천: 24
염운옥 / 인권연대 운영위원 <플랜 75>는 죽음 권하는 사회라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일본 영화다. 영화는 삶만큼이나 죽음도 평등하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한다. 75세가 되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자격을 주는 법이 통과되고,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어르신들은 알아서 죽어달라는 플랜 75 정책에 아무도 ‘노’라고 외치지 않는다. 죽음을 다루지만 극적인 폭력은 없다. 아무 일 없는 듯 잔잔한 일상이 흐르는 가운데 노인들은 조용히 플랜 75를 상담하고 죽을 날을 정해놓고 위로금을 받아 온천여행을 간다. 다큐가 아니라 픽션이라 다행이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생각한다. 영화의 배경을 이루는 초고령화, 노년 빈곤, 노년 고독, 돌봄노동의 이주화 같은 현상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곧 현실이 될 수도 있겠는데, 아니 일부는 이미 현실이 아닌가, 불안과 우려가 엄습한다.                               영화 <플랜 75> 포스터 하야카와 치에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75’라는 숫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는 ‘75세 이상’을 후기고령자(後期高齡者)라고 부른다. 단지 그렇게 부르기만 하는 게 아니다. 따로 분류되고 다른 제도에 편입된다. 75세가 되면 국민건강보험에서 탈퇴 처리되고, 75세 이상만을 위한 후기고령자의료보험제도에 자동 가입된다. 이 제도는 2008년에 4월부터 도입되었는데 기존 제도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던 본인 부담이 새로 생겼다. 후기고령자의료보험제도에서는 10%를 본인이 부담하고 부양가족 개념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후기고령자가 일정액(월 1만엔) 이상의 보험금을 새로 부담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초고령화로 증가하는 노년층 의료비 부담을 본인 부담을 늘려 충당하겠다는 제도이다. 감독은 정부에서 처음 후기고령자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75세를 기준으로 인생이 마지막이라고 단정하는 것 같아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특정한 나이부터 후기고령자라고 부르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 반대의견도 있었는데 지금은 정착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마저 없다고 전했다. 만일 초고령화사회 대책으로 극적인 전환을 꾀하는 정책이 생긴다면 75세를 기점으로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감독은 말했다. 영화 <플랜 75>는 잔인한 정책에 익숙해지고 마비되어가는 과정의 무서움을 그리기 위해 시민들의 저항은 일부러 배제하고 순응하는 모습으로만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주인공 미치는 국가가 원하는 대로 조용히 죽어주지 않고 살아 돌아온다. 평생 순응하며 살아온 미치가 국가와의 약속을 어기고 제 발로 걸어 나와 언덕을 오르고 산에 올라서 해를 맞이한다. 허위적 허위적 걸어 산을 오르는 후기고령자 여성 미치의 모습은 우아하고 강단이 있다. 합법적 살인의 현장에서 살아 나오는 미치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면, 히로무의 행동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삶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일깨운다. 영화는 플랜 75 정책의 대상이 되는 노년층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해 이 정책의 실행자로 내몰리는 청년세대의 심적 동요와 고뇌를 함께 그린다. 후생성 인구관리국에 근무하는 히로무는 이 정책을 실행하는 일선 상담 공무원이다. 오랫동안 소식을 몰랐던 삼촌 유키오가 플랜 75를 신청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말리지 않는다. 친족 상담은 껄끄러우니 담당자를 바꾸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실행 당일 삼촌을 차로 배웅할 때까지도 담담했던 히로무는 결국 차를 돌려 삼촌에게로 향한다. 이미 사망한 삼촌의 시신을 빼내오는 히로무. 삼촌은 이미 죽었으니 포기하고 다시 나올 수도 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꺼내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플랜 75 죽음 이후 시신 처리 과정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정부는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고 납골당에 모신다고 선전했지만 히로무가 우연히 본 서류에는 시신이 폐기물로 처리되는 정황이 적혀 있었다. 쓰레기가 되는 시신이라는 사실은 만남이 거듭되면서 조금씩 삼촌과 가까워져 가던 조카의 마음이 일렁이다 범람하게 만든 마지막 한 방울이 되지 않았을까? 삼촌과 함께 살아갈 수는 없어도 죽음 이후 시신은 거둬야겠다는 마음이 히로무를 움직이지 않았을까? 묵묵히 제도를 실행하던 말단 공무원의 뒤늦은 저항은 죽음 이후 존엄해야 할 권리를 일깨운다. 하찮은 죽음은 함부로 취급받은 삶의 결과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존엄히 여기지 않는 사회는 삶도 함부로 대한다. 인간은 모두 죽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고 죽음 이후에 존엄할 권리가 있다. 영화 <플랜 75>가 건네는 말이다. 염운옥 위원은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2-29 | hrights | 조회: 1586 | 추천: 11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북에 대한 위협은 전혀 알지 못하고 감각조차 없는 곳이 있다. 북으로부터의 위협은 시도 때도 없이 세뇌된 사람들이 즐비한 이 곳에서 최근 북 최고인민회의에서 한 북 지도자의 새 대남정책에 대한 시정연설에서 특별한 위기나 변화를 느끼기는 사실 어렵다. 북의 새 대남정책의 핵심은 대한민국은 동족이 아니라 제1의 주적에 해당하는 타국이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무력으로 점령, 편입(통일)하겠다는 것이다. 사진: Vehicles carry missiles during a military parade in Pyongyang. Sue-Lin Wong/Reuters 이곳에서 북이란 존재는 늘 기습남침으로 무력 적화통일을 기도하는 주적이었기에 기실 달리 느껴질 만한 게 없어야 정상이다. 북의 입장에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을 위한 관련단체들을 폐쇄하고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을 철거하였다고 한들 이곳에서야 북의 평화통일 정책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도 없고, 오로지 통일전선전술에 따른 평화협정 체결,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철수를 위한 대남선전선동 공세요,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기만형 위장평화공세로 치부되어 왔을 뿐이다. 혹시라도 이곳에서 북의 대남정책이 새롭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있다면 국가보안법의 먹잇감이 될 소지가 다분하기에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에는 북이 대한민국을 동족관계, 동질관계에서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규정하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대화와 협상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북의 새 대남정책에 특별한 반응이 없는 반면, 제국의 비둘기파들 사이에서는 올해 한반도 핵전쟁 위기의 목소리가 드높다. 북미 핵협상의 고비마다 북을 수시로 오가며 북과 협상에 임했던 로버트 갈루치(1994년 북미제네바 합의 당시 핵협상 담당), 시그프리드 헤커(세계적 핵물리학자로 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 소장 역임, 총 일곱 차례 북 영변 핵시설 방문), 로버트 칼린(미CIA 동북아 담당 국장, 대북 협상 수석 고문, 30회가량 북 방문) 등이 올해 한반도 상황이 6·25전쟁 직전만큼이나 위험하다며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외교안보전문매체 또는 북 전문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이구동성으로 올해 한반도 핵전쟁 발발 가능성이 심상치 않다며 북미관계정상화 추구를 통해 한반도 핵전쟁 발발 위험 수위를 낮추기 위해 진지한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내 최고의 대북전문가로 통하는 미 대북협상파들의 한반도 핵 전쟁위기 경고에도 이곳에서의 파장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극우보수세력을 대표하는 국방장관은 미 대북협상파의 ‘한반도 전쟁 위기설’은 지나치게 과장된 반응이라고 일축한다. 북이 진짜 전쟁을 하려 한다면 러시아에 포탄과 미사일을 대량 수출할 수 있겠냐며 북의 허세성 공갈위협에 불과한 대남심리전에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한반도 전쟁 위기설’을 부인한다. 한편으로 ‘한반도 전쟁위기설’을 부인하는 이곳의 극우보수세력의 심리 근저에는 한반도 전쟁 위기가 도래하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믿는 구석이 있다. 한미일 군사동맹의 철통같은 억지력이 구축되어 가일층 강화되고 있고, 나아가 올해 하반기부터는 한반도 유사 시 미국의 핵을 활용하는 방안을 포함한 한미연합연습을 시행할 정도로 한미 핵협의그룹(NCG)이 실질적으로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도 힘의 확고한 우위를 믿는 극우보수세력은 연일 한반도 유사 시 즉(즉각), 강(강력히), 끝(끝까지) 응징을 외치며 적 지도부를 제거하고 정권의 종말을 고하겠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 그 자신만만함에 기반한 극우보수정권의 강경대응 노선이 북의 새 대남정책과 맞닿아 갈등과 충돌을 불러와 끝내 한반도 전쟁위기를 기어이 몰아오지 않을까 제일 두렵다. 북의 핵미사일 무력의 급속한 성장과 고도화가 지속되고 이러한 성장세가 우리 눈앞에 현실이 된 상황에서도 비공식적 핵보유국을 상대로 오로지 ‘즉, 강, 끝’을 외치는 극우보수세력의 인식과 태도야말로 아둔함 내지 허장성세 아닐까 매우 우려스럽다. 미국의 대북협상파들의 경고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 보기를 바란다. ‘한반도 전쟁 위기설’ 경고에 대응해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올해 한반도 전면전의 위기를 상정하고 북미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책 모색을 주장하는 미국의 대북대화파의 합리적 견해를 수용하는 자세로 우발적 충돌과 국지전을 미연에 방지할 국내외 여론 조성이 시급하다. 서해의 영해경계선을 둘러싼 국지전 발생의 우려가 크게 대두된다. 북의 새 대남정책에 따라 북이 헌법에 영토조항을 명시할 경우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과의 충돌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영해로 고수하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북과의 갈등은 물리적 충돌과 국지전 발생으로 이어지고 한반도 전면전을 불러오는 뇌관과 같다. 평화적 해법은 요원하다. 이곳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영해선이 아니므로 대화와 협상에 의해 명백히 경계선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조차도 이적시되고 종북몰이의 대상이나 국가보안법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한반도 핵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가보안법의 금기를 넘어서, 국지전과 전면전의 뇌관이 될 수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해법이 절실하다. 강대강의 대결로 충돌을 불러오기 전에 그 해법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하므로 방법은 오로지 대화와 협상 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무수한 평화적 해법의 선택지를 창출하는 것이 한국 민중의 당면 사활적 과제임에도 국가보안법은 한국민중으로 하여금 이러한 평화적 문제 해결을 위한 가능성에 접근조차 할 엄두도 낼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다. 한반도 전쟁 위기설을 잦아들게 해서 전쟁의 참극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민중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해 한반도 전쟁 위기 문제의 당사국의 주권자로서 남과 북 또는 국제적 회담을 통한 평화적 해법 마련에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에 짓눌려 한반도 전쟁의 위기가 시시각각 엄습함에도 언제까지 북맹과 사대에 최면이 걸린 극우보수세력의 아둔함과 허세에 맞장구치며 살아갈 수는 없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4-02-14 | hrights | 조회: 1786 | 추천: 3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적금도 갯바닥에서 돌아오는 길, 박동심(78) 어매가 그 집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발길을 멈춘다. 마치 내 집처럼 들어서서 주인을 부를 것도 없이 마당가에 놓인 바구리에 반지락을 가만 덜어낸다. 그 기척에 방문이 열린다. “오매, 함씨야! 그 고생을 하고 나헌티 갈라주러 왔소?” “오매, 함씨야! 배고파겄소.” “오매, 함씨야! 안 추왔소.” 함씨야를 연발하는 남춘임(71) 어매의 말속엔 고마움과 안쓰러움이 실린다. “어짜쓰까. 허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헌 함씨가 하리내(하루종일) 이걸 파갖고 날 갖다주네.” “많애 많애, 이것도 많애”라고 덜어내는 손과, “아녀 아녀”라며 한 주먹이라도 더 보태주려 안달하는 손이 반지락 바구니 위에서 부딪친다. “내가 짝대기 짚고 걸어댕긴께 갯것(갯벌 일)을 못해. 나이 조까 덜 묵어서는 그래도 팠어. 3년 전까지는 팠는디 인자 못가. 꿀땡이가 쪼빗쪼빗 질어갖고 있어.(굴이 뾰족뽀족 길어) 자빠져서 손 짚어불깨비(짚어버릴까봐) 못가.” “요 사람은 바닥에 못 가. 그런께 주제. 나 혼차 묵으문 안 넘어가. 사람은 갈라 묵고 살아야제. 우리 친정 어무니도 그러코 살았어. 그런께 나도 보고 절로 배우고.” “오매오매 이 함씨야. 바람도 찬디 언능 가서 푹 눕소. 잘 묵을라요.” 전라도닷컴 2023년 5월호 위 내용은 구독 중인 《전라도닷컴》 2023년 5월호에 실린 내용이다. 두 할머니가 사는 적금도는 여수 아래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다. 유명한 여자만 초입에 있다. 다 알겠지만 여자만은 ‘Lady only’가 아니라 ‘여자만(汝自灣)’이라는 해역을 말한다. 적금도는 이제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니 섬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사람이 다리 놓는다고 섬이 섬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적금도 오른편이 여수시인데, 돌산도 아래 금오도가 있다.  앞서 소개한 함씨들, 그러니까 할매, 할머니들이 나누는 대화에 나오는 반지락은 바지라기, 바지락이라 해서 칼국수나 봉골레 파스타에 넣어먹는 그 조개를 말한다. 거의 국민조개가 아닐까 싶다. 반지락, 빤지락이라고 현지에서 부른다. 반지락은 2~4월이 제철이라고 한다. 지금이 2월, 위 함씨들 인터뷰를 딴 것이 바로 4월 17일이었다. 곧 지금이 한창 제철이라는 것이다. 남춘임 할머니가 거동이 쉽지 않아 반지락을 캐지 못하나보다. 박동심 할머니는 캐오던 반지락을 남 할머니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이다. 반지락 조개와 반지락탕 2011년, 당시 이명박 정부의 농림수산식품부는 어촌 지역주민에게만 허용된 맨손 어업에 대기업도 진출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갯벌 양식 어업을 육성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그동안 어촌 지역민이 해왔던 바지락 채취 등을 대기업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농림수산식품부는 2013년 농림축산식품부로 바뀌었고, 수산 부문은 해양수산부로 이관되었다. 이 법령은 의원입법으로 추진되었지만, 농림수산식품부가 발주한 연구보고서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업 전문가들은 기업의 골목상권 장악에 빗대며 갯벌 민영화로 어촌도 어장도 망가질 거라고 우려했다. 그동안 금지됐던 어업회사 법인에 임대차를 허용하고 지역 주민이 참여한 기업에는 지분참여율을 최대 90%까지 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업의 진입장벽 완화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갯벌 개발 법령 폐기 농촌이나 어촌에 고령화로 심화되고 있고, 어업 인력난 역시 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갯벌 사유화의 방향이어야 할까? 지역주민의 맨손 어업 중심이었던 어촌이 소수의 법인 기업에 의해 독점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공유수면이라는 공공자산, 공유지의 사유화를 의미한다. 정부는 자율관리 어업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는 어자원 남획, 과잉시설 설치, 경쟁조업을 막지 못한 정부가 어민 스스로 공동체적 규제를 통해 어업자원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민간기업 투자 계획을 발표했으니 결국 정부 자체가 정책 혼선을 초래한 셈이었다. 적금도 갯벌 굴따기 헌데 이 법령과 사안을 살펴보던 중에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수 적금도 어민들은 이미 지난 1960년대 민간회사와 마을어장 관리 위탁 계약을 맺었다가 낭패를 당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임대료를 받고 민간회사에 어업권을 양도한 적이 있었다. 근데 위탁관리업체는 임차료 회수와 수익창출을 위해 남획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어장 훼손으로 이어져 주민들은 10년간의 법정 소송을 거쳐 2006년에야 다시 어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다 2011년 다시 이명박 정부에 의한 갯벌 사유화가 추진된 것이다. 국회의원 임기 만료로 이 법은 폐지되었지만, 아마 이 소식을 접안 여수, 남해 어민들은 악몽이 떠올랐을 것이다. 지금은 2022년 제정되어 2023년 시행된 ‘갯벌 및 그 주변지역의 지속가능한 관리와 복원에 관한 법률(약칭 갯벌법)’으로 갯벌의 관리, 복원, 생물다양성 유지를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막 봄이 오기 시작하는 2월이면, 적금도 가까이 있는 금오도가 참 좋아서 몇 번 비렁길(해안절벽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올해는 적금도에 가서 두 함씨 댁을 가보려고 했는데 못 갈 듯하다. 다만 두 함씨의 지난해 인터뷰를 통해서 이 땅을, 이 사회를 지탱하는 작지만 단단한 ‘서로 돕는 삶’을 기억한다. 함씨들, 오래 사십시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2-07 | hrights | 조회: 1181 | 추천: 8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팽목항(진도항)의 노란 리본과 빨간등대가 시야에 들어오기 직전, 마음은 기대감에서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어여 가서 보고 싶다는 기대감과 단박에 대면해도 되나 하는 머뭇거림이 교차했다. 마음보다는 몸이 빨랐다. 발걸음은 저절로 빨간등대로 향했다. 벌써 10년... ‘가만히 있으라’, ‘움직이지 말고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을 믿고 기다리던 304명의 심장이 처절하게 할퀴어진 곳, 그곳이 저 섬들 너머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조여오는 곳, 긴 세월에 낡은 노란 리본들이 매서운 바람에 휘날리는 곳, 한겨울 진도 팽목항이었다. 팽목항 등대 선착장에서 자동차 여러 대를 싣고 제주로 떠날 채비를 하는 대형 페리호와 그 옆에서 녹슬어가는 허름한 컨테이너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0416 팽목기억관’... 녹슨 컨테이너 앞에서 잠시 주저했다. 가라앉아가는 세월호를 TV로 보면서 눈물을 흘렸고 당시 ‘대통령의 7시간’으로 분노하던 10년 전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때 현장으로 달려가지 못한 부끄러움이 겹쳐서였다. 작은 용기를 내어 살며시 두 번의 문을 열었다. 눈에 들어온 304명 청춘들의 사진... 그 앞에서 또 울컥했다. 상주하는 이 없어 더 허름해졌지만, 컨테이너 ‘기억관’ 내부의 마음은 그때 그대로인 듯했다. 팽목항에 있는 0416팽목기억관 팽목항에 소규모나마 기억의 공간을 공식적으로 만들어달라는 유가족과 시민의 호소를 정부는 외면해왔다. 낡고 작은 컨테이너 기억관은 시민이 가까스로 지켜오고 있었다. 그 대신 정부는 팽목항 도보 10분 거리에 화려하고 깨끗한 ‘진도국민해양안전관’과 유스호스텔을 지어놓았다.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의미를 지닌 사람 형상의 거대 조형물과 함께... 각종 해양 관련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훈련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안전관 정면에 설치된 야외수영장에는 아연실색했다. 유스호스텔 단체 이용자나 어린이 관람객을 위한 물놀이 시설 같았고, 안전훈련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도보 10분 거리에서 비바람에 삭아가는 컨테이너 ‘0416 팽목기념관’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전승해온 상징적인 장소 바로 옆의 물놀이장은 생뚱맞은 정도를 넘어 거의 ‘만행’처럼 여겨졌다. 국가가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이 그 수준에 머문다는 것은 부끄럽고 화나는 일이었다. 팽목항에서 도보 10분거리에 있는 진도국민해양안전관. 건물 앞에 수영장이 설치되어있다 이런 씁쓸한 느낌을 가슴에 담고 목포신항만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3년, 지상에서 비바람을 받으며 7년을 버티고 있는 세월호 선체가 궁금해서였다. 세월호를 직접 보려면 ‘세월호 목포신항만 거치소’에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정보공유 동의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기에 ‘거치소’의 위치 파악차 휴대전화 ‘네이버 지도’를 검색했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세월호 목포신항만 거치소’가 아닌 ‘세월호 목포신항만 거치안내소’가 나왔다. 같은 곳이려니 했다. 그런데 운전하며 지도의 방향을 자세히 보니 온라인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목포시청 내 안내 시설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번엔 ‘카카오맵’에서 ‘세월호 목포신항만 거치소’를 검색해 주소를 확인한 뒤 핸들을 돌려 ‘거치소’로 향했다. 가며 생각했다. ‘네이버 지도’에 ‘거치소’가 아닌 ‘거치 안내소’만 검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고리즘에 따른 안내라고 하기에는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세월호의 기억을 지우려는 숨은 전략이 일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렇게 방향을 돌려 ‘세월호 목포신항만 거치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첫인상은 씁쓸했다. 자동차 없이는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인데, 임시주차장이나 간이주차장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거치소 입구에 잠시 주차하고 철제 컨테이너 형태의 거치소에 문의하려는 찰나, “정문 근처에는 차대면 안 된다”, “다른 곳에 대라”는 큰 소리부터 들려왔다. 한적한 곳이기는 했지만 대로변에 사실상 ‘불법 주차’를 하게 만들었다. 내가 문의한 시간이 12시 58분, 출입은 1시부터 가능했으니, 불과 2분 전이었다. 그런데 거치소에서는 ‘시간 지켜 오라’는 타박부터 했다. 2분을 기다려 1시에 신분증을 맡기고 전화번호 등 정보공유에 동의를 하고 낡은 노란 리본이 줄줄이 매여있는 연두색 펜스를 따라 들어갔다. 그곳에는 임시주차장을 만들 공간이 충분했다. 그러나 주차장 같은 것을 만들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것을 보면서도, 시민의 접근을 가능한 제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 아닐까, 세월호의 기억을 흐릿하게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의구심을 키우게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세월호는 거치소 입구에서 먼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접근 가능한 곳까지 다가가 보니 세월호는 ‘기억’이나 ‘기념’은커녕 ‘전시’의 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놓여있었다. 세월호에서 뜯어져 나온 온갖 부품들이 하나같이 고철이 되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목포신항만에 있는 세월호와 그 파편들 세월호는 펜스에 막혀 몇십 미터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는 거대한 고철처럼 삭아가고 있었다. 왜 이리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빨리 녹슬고 삭아서 더 이상 지상에 두기 곤란하다고 말하고 싶을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것일까. 갑자기 ‘우키시마마루호’ 사건이 생각났다. 1945년, 고향인 조선으로 돌아가려던 수천 명의 조선인을 수장시킨 ‘우키시마마루호’를 진상조사는커녕 바닷속에 9년간 방치했다가 분해해 고철로 팔아넘긴 70년 전 일본 정부처럼 하려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저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세 번째 의심이 들었다. 세월호. 녹색표시 위와 뒤에 있는 것은 TMC(심해광물탐사 회사)의 배이다. 세월호 관련한 어떤 작업을 하는지 멀리서 보면 한 배처럼 보인다. 목포신항 주변에는 드넓은 땅이 많았다. 그곳에 ‘세월호 기억공원’을 제대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누워있는 세월호에 지붕이라도 씌워 부식을 늦추면서 아픈 야만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개방형 공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가슴 아픈 폭력과 무책임의 역사인 세월호 침몰 사건을 두고두고 기록하고 기억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진도의 팽목항에는 작은 기억관이라도 공식적으로 만들어 4.16연대 같은 곳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국가 차원에서의 해양안전문화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계기였던 세월호 사건을 희생자, 피해자, 함께 아파하는 시민의 눈높이에서 기억하는 일이 비할 수 없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상징적 공간인 팽목항에 설치한 물놀이장은 철거해 마땅하다. 해양안전관이 행여라도 세월호 사건을 외면하는 야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국민이 기억하고 체험해야 할 4월 16일의 아픔을 그저 안전시설로 대체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4-01-30 | hrights | 조회: 1335 | 추천: 7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늘공’들이 안 움직이고 눈치만 본다는 얘기를 ‘어공’한테서 처음 들은 게 2023년 초였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고 반년 남짓 지났는데 복지부동이라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전임 정부에서 뭔가 열심히 한다고 했던 사안은 죄다 감사받고 수사받고 압수수색받는다. 그럼 5년 뒤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남북경협이라도 나섰다간 수사 받기 십상이다. 지역경제발전을 위해 기업투자 유치에 노력하면 배임이니 직권남용이니 시달린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친환경에너지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면 좌파정부 부역자 소리 듣기 딱좋다. 생각해보면 현재 탈탈원전을 추진하던 정부부처 담당 부서는 얼마 전깍지 탈원전 업무 담당 부서일 수밖에 없다. 만약 다음 정부에서 탈탈탈원전을 한다며 탈탈원전을 탈탈 턴다고 해보자. 탈탈 털리는 사람과 탈탈 터는 사람이 모두 같은 부서 같은 사람들이다. 결국 공무원으로선 탈탈탈원전 시대를 대비해 탈탈원전에 진심을 담으면 안된다.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복지부동만이 살 길이다. 압수수색 당하고 감사 받기 싫으면 적극적으로 일하면 안된다.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했다는 말을 약간 비틀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복지부동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게 이 정부 핵심가치다. 복지부동을 강요하는 정부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특수활동비로 회식하는 걸 보면 그닥 청렴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물 밖에서 물이 더럽다고 물고기를 괴롭힐 뿐이다. 그래서 이번 정부에서 적극행정을 하는 건 ‘3사’ 뿐이다. 검사, 감사, 용궁 사진사. 대통령실로 파견돼 일하는 늘공들이 너도나도 복귀하고 싶어하는 반면 후임자를 찾지 못해 울며 겨자먹기로 본부 복귀를 못해 애를 먹는다는 얘길 들은 건 2023년 말이었다. 그럴만도 하다. 2022년부터 죽어라고 일했는데 지금껏 승진한 사람이 없단다. 처음엔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다가 이제는 진실을 알아버렸다고 한다. ‘우리는 그냥 열심히 일만 해야 하는 존재구나.’ 하긴, 노비가 일 열심히 했다고 승진했다는 얘기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공무원들 가운데 가장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대통령실이다. 대개 승진을 앞두고 있고, 승진할 가능성이 높은 일 잘하고, 일 잘할 준비가 된 공무원들이 대통령실로 파견된다. 1년 가량 죽어라 일하고 승진해서 친정으로 금의환향하는 게 일반적인 양상이다. 그게 이번 정부에선 깨졌다. 복지부동의 거대한 그림자가 대통령실도 덮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뭔가 강력한 정책을 내놓고 얼마 뒤 “엄청 강력한 대책”이 나오고 또 얼마 지나면 “진짜 겁나게 강력한 대책”이 나온다. 그리고 잊을 만 하면 도돌이표다. 마약이 그랬고 저출산이 그랬다. 킬러문항이 그랬고 이태원이 그랬다. 이념을 바로 세우는 것과 이권카르텔척결에 엑스포까지, 어느 것 하나 차분하게 준비해서 나온 게 없고 “강력대응”이니 “원점재검토”니 하는 말이 따라붙지만 마무리가 제대로 된 것도 없다. 남은 건 그냥 혼란과 갈등, 어퍼컷과 떡볶이 뿐이다. 중국에서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인데, 딱 그렇다. 미국 예를 들면 트루먼이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크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던 아이젠하워가 당선된 뒤 했다는 말이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하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쌍한 아이크.” 결국 하던 버릇대로, 익숙하고 쉬운 것만 하게 된다. 전국 교정시설(교도소와 구치소) 수용자는 지난해 10월 기준 5만 8945명이었다. 정원이 4만 9918명이니까, 정원 대비 118%다. 2016년(121.2%)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정원 대비 수용률이 꾸준히 감소해 2022년 104.3%까지 줄었다는데 1년만에 말 그대로 폭증했다. ‘나쁜 놈 잡아 가두기’라는 전공을 살리는 것 같긴 한데, 그런다고 나라꼴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이런 와중에 선거가 다가오니 각종 선심성 정책이 난무한다. 재정건전성을 위해 긴축을 한다면서 다주택자와 대기업을 위한 각종 세제지원을 내놓는다. 재정건전성이 중요하다면서 각종 감세에 여념이 없다. 둘 중 하나다. 애초에 재정건전성에 관심이 없거나, 재정건전성이 뭔지 모르거나. 아마 둘 다 정답일 듯 하다. 재정건전성은 복지정책 반대할 때나 필요한 논리고, 애초에 국가재정과 집안살림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를 못하니까 나라빚에 바들바들 떤다. 그러면서도 다음주엔 또 어떤 대기업과 다주택자 세제혜택이 나올까 싶다. 정부에선 ‘감세’를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세금을 많이 거두는 건 가렴주구이자 ‘반서민 정책’이란다. 하지만 말입니다. 세금을 적게 거두는 건 국민에게 그만큼 책임지기 싫기 때문이다. 독재국가일수록 조세수준이 낮고 민주국가일수록 조세수준이 높은 건 다 이유가 있다. 북한은 ‘세금없는 지상낙원’을 자랑으로 여기고 스웨덴 같은 나라는 평균적으로 월급 절반을 소득세로 원천징수한다. 출산파업과 인구감소, 고령화, 수도권 양극화와 지방소멸, 남북관계, 심지어 이념을 바로 세우는 문제까지도 ‘지당하신 말씀’과 ‘강력한 대책’ 그리고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떡볶이 먹방’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이 하루 하루가 흘러간다. V2 표현을 빌어 글을 마무리한다.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4-01-17 | hrights | 조회: 1296 | 추천: 9
김희교 / 인권연대 운영위원 <故 이선균씨의 빈소> 사진: 매일신문  배우 이선균이 죽었다. 법적인 사인은 자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에서 시작됐다. 경찰은 그를 마약범으로 단정한 채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사회적 인격 살해에 앞장섰다. 언론은 그를 마약범으로 단정한 채 대중에게 내던져 인격살해에 공조했다. 대중들은 어느 순간부터 ‘공인’들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사회적으로 죽어도 되는 존재로 취급 하는 혐오주의에 빠져있다. 혐오주의에 빠져 있는 대중과 혐오주의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권력기관들이 이선균을 죽음으로 몰았다. 사진: 한겨레  이재명 대표가 피격 당했다. 어떤 자들에게 배우 이선균이 죽어도 되는 존재였다면, 살해미수범에게 이재명 대표는 죽어야 하는 존재였다. 살해미수범이 말하는 이재명 대표를 살해해야하는 이유들은 당연히 매우 병적이다. 그러나 그 병은 단독범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정치적 테러범들이 가지는 혐오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혐오는 사람을 마음속에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악을 차별하고 증오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그런 혐오가 집단화되어 나타나면 혐오주의라 부를 수 있다. 혐오주의가 권력과 결탁되어 구조화되면 혐오 사회라 부를 수 있다. 두 사건은 모두 권력집단들이 직간접적으로 결탁되어 있거나 네트워크화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아직 대중들이 혐오권력에 완전히 포섭된 상황은 아니기에 혐오사회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권력기관이 혐오를 조장하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혐오시대가 열린 것은 분명하다.  이선균 배우와 이재명 대표는 전형적인 혐오 시대의 피해자들이다. 혐오주의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도덕적 절대주의이다. 혐오주의자들은 늘 그들 기준대로 선한 편과 악한 편을 가른다. 반대편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적 도덕관을 적용한다. 배우 이선균에게는 ‘공인’이라는 도덕적 기준을 내세웠다. 우습게도 ‘공인’이라는 절대적 도덕 기준은 실정법보다도 더 상위에서 작동한다. 경찰은 그가 ‘공인’이라는 이유로 혐의만으로도 실정법 조차 무시하고 조리돌림 할 수 있고, 언론은 ‘공인’에게 적용되는 알 권리를 내세워 사생활까지 무참하게 짓밟았다. 대중들은 존재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까지 알권리로 착각하고 그들의 가족까지 무자비하게 조롱했다.  야당 대표 이재명에게는 늘 누구보다도 강하게 ‘진보주의자’라는 도덕적 절대기준이 적용되어왔다. 진보주의자들조차 그에게 없다고 주장해 온 ‘싸가지’는 살인범보다 더 가혹하게 사회적 매장의 빌미로 작동했다. 도덕적 절대기준이 횡행하는 혐오주의 사회에서는 ‘싸가지’가 없다는 규정 하나만으로도 쉽게 누구든 사회적 죽음을 몰고 갈 수 있다. 당연히 누구라도 ‘싸가지’까지 있으면 좋다. 그러나 싸가지까지 있는 진보주의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가 ‘싸가지’를 규정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개 그런 것들은 권력자들이 규정하고 대중은 따라간다.  이재명 대표가 혐오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의외로 조용하다. 왜일까? 이재명 대표는 누군가에게는 이미 ‘싸가지’가 없어 죽어야할 존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사회적 살해는 끊임없이 자행되어 왔고, 결국 물리적 살해까지 시도된 것이다. 살해 기도 이후 권력자의 태도에서도 그런 혐오주의는 쉽게 드러난다. 경찰은 야당대표 살해미수사건을 몇 만원 관련된 이재명 대표의 법인카드보다도 조심스럽게 수사하고 있다. 언론은 살해까지 기도되는 배경에는 관심이 없고 “헬기 특혜”니 “부산 차별”이니 하는 아젠다를 만들어 혐오 프레임을 작동시키는데 열중하고 있다. 한동훈 위원장이었다면 그랬을까? 혐오 프레임에 갖힌 혐오사회의 대중들에게 헬기 한번 타는 “특혜”는 혐오의 대상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젠다가 된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상대가 나쁘기만 하면 된다. 어느 시대나 편견이나 증오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늘 증오범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개체가 필요하다. 브라이언 레빈 증오극단주의 연구소 소장은 편견이나 혐오적 표현이 증오범죄로 이어지는 촉매제는 대개 정치인과 같은 권력이 개입할 경우라고 밝히고 있다. 정치권력과 결탁된 증오범죄는 혐오시대를 열게 된다. 트럼프 시대 이후 극우들의 전략으로 등장한 것이 혐오주의이다. 혐오주의는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후 갈 곳을 몰라 헤매던 반공주의자들이 찾아낸 대체품이었다. 지금 한국에서도 그런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그들의 무기가 반공주의였다면 지금 그들의 무기는 혐오주의이다.  물론 지금의 정치권력이 이재명 대표의 살해를 직접 교사했다는 증거는 아직 아무 것도 없다. 그럴 가능성 또한 많아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권력이 레빈이 지적한 혐오사회를 여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검찰은 이재명대표의 범죄를 기정사실화하고 끊임없이 압수수색을 했다. 이재명 대표가 적어도 사회적 살해를 당할 때까지 계속할 모양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야당대표와 회담을 하지 않았다. 이재명 대표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인 한동훈 위원장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내놓은 일성은 야당공격이었다. 그의 임무는 당의 비상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당에 대한 혐오를 키우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권력자들의 행동은 카롤린 엠케가 『혐오사회』에서 주장한 대로 대중들을 동원하는 하나의 기표로 작동한다. 권력자들의 끊임없는 적대적 행위는 혐오시대를 연다. 혐오시대에 혐오의 대상은 누군가에 의해 쉽게 죽어야 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국승민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시기 트럼프대통령이 중국을 비난하는 트윗을 한번 올릴 때마다 인종차별적 트윗은 20%가 올랐고,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범죄는 8%가 증가했다.  권력자들의 혐오주의 전략은 끝내 이재명 대표를 감옥으로 보내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결코 아니다. 맹목적 우군인 혐오 세력을 키우는데 성공할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당장 다음 주에 민주당을 탈당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자칭 ‘진보주의자’인 한 정치인의 탈당 변을 보더라도 이런 사실은 충분히 드러난다. 그의 출마의 변 대부분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재명 대표에 대한 혐오주의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혐오주의는 보수주의의 신의 한 수 인 셈이다.  윤석열 정부의 등장은 아직 도덕의 시대가 오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선출된 권력의 힘을 너무 과신했다.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면 민주주의는 꽃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야만 권력은 30년간 쌓아온 민주주의의 토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 만큼 강고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군부가 합법을 가장하여 국정을 농단하기 위해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던 시대의 권력구조는 여전히 강건하게 남아있다. 그때가 군부였다면 지금은 검찰일 뿐이다. 검찰권력만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재벌은 그 버릇을 못 고치고 검찰권력의 손아귀에 있고, 언론은 군부의 하수인에서 검찰의 하수인으로 변신했다. 군부와 손잡았던 미국은 이제 검찰권력과 손잡고 동아시아의 신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다. 그런 권력들이 여전히 대중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그들의 권력을 지키고 있다. 그때 사용했던 무기가 반공주의였다면 지금은 혐오주의이다.  혐오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식민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주의는 도덕률이나 공동체의 발전보다 자신보다 더 큰 힘을 숭상하는 식민성과 불평등한 국가간 체제인 식민체제로 구성된다. 아직 우리는 식민주의를 결코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지금의 권력자들은 매일 미국과 일본이라는 더 큰 권력이 자신을 비호하고 있음을 선전하고 있다.  이선균 배우를 수사한 경찰의 태도는 공정한 수사라기보다 과시적 수사였다. 더 큰 권력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사였다. 이재명 대표 살해미수범의 확신은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정치적 만족을 얻고자하는 큰 권력의 네트워크에서 학습된 혐오이다. 그 권력의 윗자락에는 세상을 여전히 적과 우리로 나누고 신냉전을 지향하는 신식민주의적 체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여기는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다.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미국의 반인종주의자 아히브람 X 켄디는 반인종주의자를 정의하면서 ‘반인종주의자는 나는 반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종주의와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야만 권력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혐오주의에 빠져들게 아니라 혐오주의를 넘어 야만권력과 싸울 우리들의 무기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눈 앞의 대상은 비도덕주의자들이 아니라 혐오시대를 만들어 다시 죽음의 행진을 만들고 있는 정치권력이다. 이번 총선은 큰 싸움의 방향타가 될 것이다. 부디 총선 전까지만이라도 누구의 싸가지를 말하기보다는 야만 권력의 회귀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를 더 많이 말하자. 누구의 싸가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권력자들이 밤낮없이 말하고 있다. 우리까지 거기에 힘을 보태는 어리석음은 당분간만이라도 사양하자. 힘을 결집하자. 내부에 도덕적 절대주의를 들이대며 서로 분열하지 말자. 어떻게 야만권력에 저항할 것인가를 더 이야기하자. 권력자들과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과 싸우자. 지금은 하나되어 야만권력과 싸울 시기이다. 김희교 위원은 현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1-10 | hrights | 조회: 1416 | 추천: 11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출처: 경주시청 “역사를 돌아보면 정답은 뻔히 보이지만 당대는 늘 혼돈이고 집단적 착각이 난무한다. 얼마나 많은 주장들이 역사적 헛소리들인지, 당대를 규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디.” (조선희, “그리고 봄” 중에서) 인권연대로부터 발자국 통신 원고 청탁 문자를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원고 마감이 1월 1일까지란다. 엄청 부담스럽다. 새해 첫날이니 좋은 덕담도 해야 하겠고, 새해를 전망해 보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해야 할텐데 지금 시국에 그게 가능하겠나 하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면 낙망과 좌절, 우울한 나날들이 많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새해 첫날 좋은 이야기를 해야지, 왜 지나간 날들의 우울을 되씹는가 하는 항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새해라고 모든 것이 다 장밋빛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지난 1년 반을 돌아보면 우리사회가 어떻게 이렇게 급속도로 망가져 갈 수 있는가 하는 자괴감에,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해 놓았던 일들이 결국 이 정도였던가 하는 한탄, 어처구니 없는 사태 진전을 바라보면서도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무력감 등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나이를 먹었다고 더 지혜로워 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을 갈아엎는 꿈을 꾸기에는 이제 체력이 받쳐주지 못한다. 1200만 명이나 봤다는 “서울의 봄” 같은 영화를, 멀쩡한 정신으로 보기 어려워 아직도 엄두를 못내는 것도 따져보면 체력이 감당하지 못해서이다. 분노로 발산할 수 있는 에너지도 이제 총량에 한계가 오는 것 같다. 작가 조선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동안 쌓였던 분노와 스트레스의 에너지로 터빈을 돌렸다면 아마 온 집안이 쓰고도 남을 전기를 생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탱크와 중앙정보부, 보안사, 정보경찰 등을 겹겹으로 동원하여 촘촘히 자신의 장기독재를 위한 그물망을 짰던 박정희도 결국은 그의 심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79년 10.26은 18년 박정희 장기독재에 저항해 나선 그해 10월 부마항쟁의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시효를 다한 “유신 독재”는 이제 다가올 “서울의 봄”에 그 자리를 물려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 “봄”은 12.12를 거쳐 저 통한의 5.18로 이어졌던 것 아닌가? 1979년 10월 25일, 하루 앞으로 다가온 박정희의 죽음을 예측한 “당대인(當代人”도 없었을 뿐 아니라, 10.26에서 12.12를 예견하고, 거기에서 이듬해 5.18을 가늠해 본 사람도 없었다. (44년이 지난 지금은 뻔한 역사적 현실로 되었고, 20대 젊은이들은 영화관에서 그 역사를 배우게 되었지만) <1945년 12월 16~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출처:울산저널 1945년 해방의 혼란기 속에서, 미소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현실적 상황 속에서, 남북분단을 피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오늘날에 와서 보건대,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1945. 12) 결과를 따르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전승국인 미.영.중.소 4개국이 후견하는 조선임시정부를 거쳐 5년 후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것이 골자인데, 2차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그나마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미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통한 권력장악에 골몰한 이승만은 이 이슈를 찬탁 대 반탁의 구도로 몰고 가면서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끝내 분단정부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찬탁/반탁 대결구도에 순수한 민족주의적 열정만을 앞세웠던 백범 김구는 결과적으로 “행동대장”의 역할을 맡았을 뿐, 현실적으로 분단을 막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이후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오르지만 이 역시 결과적으로 북쪽의 분단정부를 추진하고 있던 김일성의 각본에 “놀아 난” 꼴이 되었다. 오늘날 시각에서 본다면 미소가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는 당시적 상황에서, 여운형과 김규식 등 온건세력이 추진했던 좌우합작노선이 그나마 분단을 피할 수 있었던 합리적 방안으로 보이지만 역사는 그 쪽으로 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뻔한 일이 돼버린 일들이, 당대의 시각으로는 어느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중요하고, 당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흐름, 각 정파의 이해관계, 시대적 주역들의 역량, 이런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상황을 판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인데, 이런 전지적 시점을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또 흐름, 대세와 관계없는 자신의 신념, 교조가 객관적인 정세 판단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인용하는 것이 적당하지는 않지만 백범 김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일을 행할 때 그것이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으냐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옳은 일인가, 아닌가로 판단해야 한다.” 그는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조선을 병합하고 만주를 침탈한 뒤 중국까지 먹어들어 오는, 소위 일본이 천하대세인 시절에 일본군대의 만분의 일도 안되는 병력으로 광복군을 조직히고, 윤봉길, 이봉창의 항거를 조직하며 일본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 독립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었기 때문에 풍찬노숙과 유랑을 마다하지 않으며 일제 36년을 버텼다. 그러나 바로 이런 신념에 따른 정세인식으로 해방공간에서 반탁의 선봉에 서고, 결과적으로 정적인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시나리오에 일조를 하게 된다. 뒤늦게 분단을 막고자 북행길에 오르지만 이미 대세는 냉전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남북의 분단세력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시속에 밝았던, 그래서 조국을 배반하게 된 인물들은 어땠을까? 매국 5적의 첫 대가리에 오르게 된 이완용은 당대 최고의 수재라고도 일컬어졌던 인물이다. 그가 이해한 당대는 어떤 것이었을까? 조선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사라지고 미개한 조선민중을 대일본제국의 충용한 신민으로 살게 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마찬가지 질문을 한때 “조선의 문호”라고도 불리웠던 춘원 이광수에게 던져 본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나온 그에게 검찰관이 물었다. “왜 친일하였는가?” 이광수 왈, “나는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독립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소.” 이건 믿음, 소신의 문제일까? 아니면 당대를 인식하는 빈약하고 천박한 역사의식의 문제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눈앞의 먹을 것을 탐하는 개돼지의 본능이었을까?  당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 “1찍”이니 “2찍”이니 하는 상호를 향한 멸칭(蔑稱)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인식의 소산일 것이다. 현대가 담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세계 몇 번째로 3050 클럽(3만불 이상 소득, 5천만 이상 인구)에 들었다거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모범적으로 달성한 나라가 됐다거나 하며 한동안 “눈떠보니 선진국”이라는 착각에 푹 빠져 있다가 지난 1년반의 세월을 보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과 독선, 파렴치함에 진저리 치다가도,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정권이 등장하게 된 함의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달성했다고 믿었던 산업화, 민주화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었나 하는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저런 형편없는 정부를 갖게 된 현실에 분노하다가, 그걸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의 모습을 보면 더욱 열이 치솟는다. 두 정치세력의 모습은 마치 편도 2차선 국도를 가로막고 서로 추월 경쟁을 하는 거대한 탱크로리 같다. 그 탱크 안에 담긴 게 서로 다른 거라고 주장하지만 그것도 알 수 없다. 어느 차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두 개 차선을 꽉 막고 서로 도긴개긴의 추월경쟁을 하는 그 뒤로 많은 차량들이 정체해 있는 모습만이 암담하다. 이런 모습이 당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자기희생 없는 정치, 독점의 정치, 앞을 보여주지 않는 정치, 이게 과연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은 100도가 되면 끓고, 가스는 덮어 놓으면 폭발한다. 한국 사회의 여전히 무한한 에너지를 가로막고 있는 이 과두독점 정치의 끝은 어디일까가 궁금해지는 새해 아침이다. 정범구 위원은 전 독일대사입니다.
2024-01-03 | hrights | 조회: 1734 | 추천: 11
염운옥 / 인권연대 운영위원  런던 사우스켄싱턴에 있는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은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두 박물관 사이를 가르는 도로명은 익시비션로드(Exhibition Road). 19세기 중반에는 런던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던 사우스켄싱턴에 박물관들이 건립되면서 생긴 거리 이름이다. 2017년 새로 만들어진 새클러 코트야드(Sackler Courtyard)는 익시비션로드와 연결되어 출입구와 공공 광장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 사진: 염운옥 <익시비션로드 새클러 코트야드> 사진: 염운옥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디자인과 장식예술 전문박물관으로 전시가 색다르다. 보통 박물관에서는 진본성(authenticity)이 중시된다. 유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부가 전시실에 놓일 자격을 따지는 최우선 요건이다. 하지만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다르다. 전통적인 박물관처럼 진본도 소장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박물관에 놓이지 않는 복제품(replica)이 놓여있다.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박물관답게 창조를 위한 모방에 걸작을 활용한다. 가구 전시 갤러리에는 의자를 잘라 단면을 보여주며 어떤 재료가 쓰였으며, 재료의 질감은 어떻게 다른지 느낄 수 있도록 관람자에게 직접 만져보게 하는 전시도 마련하고 있다.  디자인 박물관으로서의 정체성은 기원과 관련된다.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1815년 세계 최초로 열린 박람회 ‘대박람회(the Great Exhibition)’에서 유래했다.1) 성공적으로 끝난 대박람회 수익으로 정부는 사우스켄싱턴에 장식예술과 산업을 위한 박물관을 건립했다. 1857년 개관 당시 명칭은 사우스켄싱턴박물관(South Kensington Museum)으로 뒤떨어진 영국 제조업의 디자인을 개혁하고 소비자 대중의 취향을 교육한다는 목적을 내걸었다. 19세기 말 현재 명칭이 바뀌었다.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인도 유물이 많기로 유명한 박물관이다. 사우스켄싱턴박물관으로 개관할 때 인도박물관(India Museum) 컬렉션을 대부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인도 유물의 수집 주체는 동인도회사였다. 1600년 설립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 영제국 팽창의 주역으로 기능하면서 제국의 유물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배권이 벵골만 콜카타에서 마드라스, 실론, 봄베이를 거쳐 인도 아대륙 전체로 넓어지면서 수집 지역도 점차 더 확대되어 갔다. 동인도회사가 수집하는 지역은 지배권이 확고한 인도를 넘어 동쪽으로는 인도차이나, 수마트라, 자바까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만 지역까지를 포괄했다. 동인도회사의 유물 수입 경로는 군사작전과 교역, 행정조사가 결합된 체계적인 프로젝트였다. 현지에서 표본과 보고서가 도착하면, 이를 과학적 자료로 목록화했고, 각 분과학문과 학회의 연구용 자료, 그리고 새로운 수집 프로젝트 수립을 위한 토대로 활용했다. 동인도회사는 과학 실천에 필수적인 정보와 소통의 인프라를 제공함으로써 컬렉션 기반의 분과학문 성립과 발전에 기여했다.2)  영국의 해상무역 종사 상선 선원과 동인도회사 관리, 영국 육군, 영국 해군은 해외로부터 꾸준히 수집을 수행했다. 동인도회사 관리는 아마도 선박에 소량의 개인화물을 실을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제한된 규모로 사적인 거래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기심의 방이 유행하면서 외국산 그림, 진귀품, 자연사 표본 등의 상업 거래 시장이 유럽에 활성화되어 있었음을 떠올리면, 동인도회사 관리들이 이런 방식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인도에 체류한 유럽인들의 많은 개인 수집품은 영국으로 보내져 가문의 재산으로 상속되었다.3)  인도에서 제국의 중심 런던으로 들어온 영국 동인도회사의 수집품은 처음에는 회사 관리와 회사 관련 유력자들의 개인 소장품이었고,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런던탑에는 무기와 갑옷이 전시, 린네학회는 자연사 표본을 소장했다. 하지만 가장 대규모로 인도 유물을 수집, 소장했던 곳은 인도박물관이었다. 인도박물관은 1801년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런던 리든홀스트리트(Leadenhall Street) 동인도하우스(East India House)에 문을 열었다. 동인도하우스는 기업의 본부인 동시에 물질문화의 전시장이었다. 인도박물관은 런던으로 사물과 정보가 집중, 축적되는 과정의 일부였다. 인도박물관의 설립은 개인적, 비공식적이었던 수집을 탈개인화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동인도회사 이사회(the Court of Directors)4)가 수집에 관여, 개입, 관리하기 시작함으로써 관리 방식을 중앙집중화, 체계화했다.5)  인도박물관은 군사작전으로 획득한 약탈품의 공식적 저장소였다. 동인도회사의 영토 팽창에 따라 방대한 수고본, 회화, 보물, 진귀품 등이 수집 축적되었고 대중에게 전시됐다. 1820년 인도박물관 가이드북에 따르면, 무기, 갑옷, 왕관, 보석, 그리고 ‘티푸의 호랑이(Tipu’s Tiger)’가 관람객에게 인기를 끌었다. ‘티푸의 호랑이’는 남인도 지배자 티푸 술탄이 소장했던 소형 자동기계 오르간이다. 호랑이가 영국 병사의 목을 물어뜯는 모습을 하고 있다. 뚜껑을 열면 병사의 비명소리와 호랑이 울음소리가 난다. 이 유물은 원래 영국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과 승리의 상징으로 제작되었으나 영국이 이 지역을 점령 지배하게 되면서 전리품으로 손에 넣은 것이다.  1858년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가 종식되면서 인도박물관은 화이트홀 인도성의 한 부서로 편입되었다. 1875년에는 사우스켄싱턴의 한 건물로 이전되었다가 1879년 인도박물관이 폐관하면서, 일부를 제외한 컬렉션 대부분은 사우스켄싱턴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아마라바티(Amaravati) 조각과 수서본 등은 영국박물관으로, 자연사 표본은 자연사박물관과 큐가든 왕립식물원으로 이전되었다. 인도박물관이 폐관한 후 인도성 지하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유물들이 사우스켄싱턴으로 옮겨왔을 때, 초대 관장 헨리 콜(Henry Cole)은 감격에 겨워 “인도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데 사우스켄싱턴박물관 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6)라고 말했다.  현재 1층 전시실에서 인도관은 중국관, 일본관과 함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인도의 여러 신들을 표현한 석상, 불상, 스투파(탑)은 거대한 규모 때문에 관람자를 압도한다. 하지만 거대한 유물보다는 작은 유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관람자라면 인도산 수직물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대박람회 개최장이었던 수정궁(Crystal Palace) 축소모형이 놓여있는 1851년 대박람회 갤러리에는 인도산 직물이 있다. 지금 당장 유리 케이스에서 꺼내 둘러 입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문양과 질감이 아름답고 세련됐다. <1851년 대박람회 전시실과 수정궁모형> 사진: 염운옥 <1851년 대박람회 전시실 인도산 직물> 사진:염운옥  이 아름다운 인도산 직물은 대박람회에 전시되었던 것으로 이후 사우스켄싱턴박물관의 중요한 소장품이 되었다. 대박람회는 메트로폴리스와 주변부, 식민본국과 식민지, 영국과 인도의 차이를 가시화하는 장치였다. 영국은 인도라는 이해하기 어렵고 상대하기 벅찬 동양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인도는 영국이 지배하기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4대 문명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문명의 발상지이며 영국보다 더 오래된 문명의 역사를 간직한 인도. 이를 대하는 영국의 시선은 매혹당하면서 동시에 경멸하고, 찬양하면서 또한 폄훼하는 모순적인 것이었다.  인도 공예와 예술을 보는 상반된 시선은 자기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수정궁 인도 전시관에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와 자연자원뿐만 아니라 인도의 다양한 물산이 전시되었다. 특히 인도산 면직물과 견직물은 눈길을 끌었다. 대박람회에 출품된 인도산 직물은 극찬을 받았다. 정부는 박람회 전시품 구매 비용인 5000파운드 중에서 4분의 1을 인도 물품에, 다시 이 가운데 65%를 직물 구매에 지출할 정도로 인도산 직물에 관심을 보였다.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는 17세기 이래 유럽으로 들어온 인도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수직기로 짠 인도산 직물은 방직기계에서 대량생산하는 영국산 면직물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정교하고 섬세한 문양을 뽐냈다. 인도 직물 디자인은 영국산 혹은 어느 유럽산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의 ‘공장’이자 ‘시장’으로서 영국의 위상을 과시하려던 박람회는 역설적이게도 영국산 제품 디자인이 식민지 인도보다도 뒤떨어진다는 쓰라린 패배를 드러내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실패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취했던 건축가와 예술가, 장식전문가들은 인도산 직물을 ‘올바른 원칙’에 입각한 ‘올바른 디자인의 전형’이며 영국 제조업자가 본받아야 할 ‘디자인 교과서’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수집과 전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재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세계 최대 인도직물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다. 이 인도 직물 컬렉션은 원래 직물에서 필요한 크기만큼만을 오려 낸 ‘선택’과 ‘삭제’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잔존물들로서 침묵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인도 직물은 ‘상품’ 혹은 ‘인류학적 유물’에서 ‘미학적 감상 대상’이 되었다. ‘사물’(things)을 ‘유물’(objects)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떼어내기(detachment)와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의복이나 숄, 카펫에서 천 조각을 오려 내 견본을 제작하는 과정은 영국의 필요와 의도에 따라 식민지 인도를 재단하고 평가하고 지배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본래 용도가 있는 의복이나 숄, 카펫 등과 같은 직물에서 수집가의 선택에 따라 특정한 문양이 놓인 부분만을 오려 내는 수집 행위를 통해 직물은 박물관에 놓이는 ‘유물’이 된다. ‘장식예술박물관’이면서 동시에 동인도회사의 컬렉션을 이어받은 ‘식민박물관’이기도 했던 사우스켄싱턴박물관에 전시된 인도 예술은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인도의 광활한 대지와 인구, 다양한 종교와 문명이 공존하는 복잡성, 극단적이고 무절제해 보이는 풍습은 서구를 매혹시킨 동시에 서구로부터 배척당했다. 이제 좀 알게 되었다고 자신하는 순간, 인도는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문화로 다가왔다. 브라흐마(Brahma), 시바(Shiva), 비슈누(Vishnu), 락슈미(Laksmi) 같은 힌두 신들의 조각상만큼 서구인들에서 매혹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 인도 문화는 없었다.7) 인도양 지역에서 수집되어 인도박물관, 사우스켄싱턴박물관을 거쳐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에 안치된 인도의 유물은 지배했지만 완전히 지배할 수 없었던 인도라는 타자의 거울이었다. 1) 흔히 ‘만국박람회’로 알려진 대박람회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열리는 수많은 산업박람회의 기원이다. 1851년 런던 대박람회는 일찍이 산업화에 성공하고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린 영제국의 번영을 과시하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공이 기획한 국가적 행사였다. 박람회장은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이 하이드파크에 지은 수정궁(Crystal Palace)이었다. 수정궁은 주철로 기둥을 세우고 벽과 지붕을 유리로 덮은 거대한 온실 같은 건물로서 축구장 18개 면적의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팩스턴이 설계한 이 첨단 건축물은 이름 그대로 수정처럼 반짝이는 ‘빛의 궁전’이었다. 2) Jessica Ratcliff, “The East India Company, the Company’s Museum,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Natural History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Isis 107.3 (2016), p. 495. 3) Ibid., p. 502 4) 동인도회사의 운영은 주주총회와 이사회가 실권을 갖는 구조였다. 이사회는 1773년 규제법(the Regulating Act of 1773)에 따라 설치된 것으로 실제적인 운영을 담당했다. 이사회 본부는 런던 리덴홀가 동인도회사 하우스에 있었다. 5) Jessica Ratcliff, “The East India Company,” p. 502 6) Bruce Robertson, “The South Kensington Museum in Context: An Alternative History,” Museum and Society 2-1 (2004), p. 5. 7) Partha Mitter, “The Imperial Collections: Indian Art,” Malcom Baker and Brenda Richardson, eds., A Grand Design: The Art of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New York: Harry N. Abrams, INC., Publishers, 1997, p. 222. 염운옥 위원은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12-26 | hrights | 조회: 1223 | 추천: 2
최낙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뉴스를 보지 않게 되면서 글을 읽는 일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억지로 책을 펼쳐 보지만 활자가 눈을 찌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무얼 본다는 것이 이렇게 귀찮은 일이었을까요? 처음엔 스포츠 관련 콘텐츠를 주로 찾아보다가 대중가요의 뮤직비디오를 찾게 되더니 요즘은 주로 긴 길이의 연주 음악을 찾아 듣게 됩니다. 이제는 거의 귀로만 유튜브를 듣는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최근 3개월 동안 경조사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는 별로 다른 일 없이 지낸 것 같습니다. 그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에 더 많이 갔었다는 것뿐입니다. 문득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뿐입니다. 오랫동안 벌이 삼아 해왔던 일도 별 볼 일이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고 특별한 취미도 없으니, 정말 무위도식에 무념무상의 경지는 깊어지기만 합니다.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수십 년 월급쟁이를 하다가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둔 친구 하나가 저의 근황을 듣더니 “너도 지금 불백 상태구나” 하고 웃었습니다. 불백이라는 말은 ‘불러주면 나가는 백수’의 준말이라고 했습니다. 제법 사업이 자리 잡은 친구는 그 말에 박장대소하면서 “나는 불백인 너희들이 부럽다”라고 했습니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친구가 “경기가 너무 좋지 않다, 윤석열이는 맨날 외국에나 돌아다니고...”라고 하자, 그 옆의 친구가 “윤석열의 최대 단점이 뭔지 알아?‘”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귀국이 너무 잦은 것”이라고 답을 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출국이 아닌 귀국이 잦다는 그의 말에 모두 웃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이후 맛집, 골프, 건강... 뭐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이제는 이쪽 편이든 저쪽 편이든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해 넘어가기 전에 한번 보자는 말에 모두 동의하며 자리를 파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러 역으로 가던 중에 한 친구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시를 쓰다가 생계 때문에 글을 접고 개인 사업을 시작한 친구입니다. 한때는 하는 일마다 잘되어 관계된 모든 모임의 비용을 거의 혼자 감당해주던 친구였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모임에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된 그 친구는 몇 번을 전화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연말은 연말인가 봅니다. 송년회 참석 확인 문자도 오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 전화로 저의 근황을 묻기도 합니다. 물론 통화의 끝은 가까운 시일 내에 식사라도 한번 하자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날의 결혼식 모임 이후 어떤 다른 생각이 든 걸까요. 요즘 갑자기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느냐’는 다소 의례적인 인사말에 흠칫 놀라 무념무상의 경계가 조금씩 흔들립니다. 머릿속에 점점 생각이 많아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선 책상머리에 고이 모셔두기만 한 책(*)부터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근황을 묻는 이에게 무념무상의 경계에 들었다고 헛소리로 어떻게든 대충 뭉개보려는 뻔뻔하고 얄팍한 정신머리가 달라질 것도 같습니다. (*) 저자의 서명이 담긴 두 권의 귀한 책을 받았습니다. 해 넘어가기 전까지 읽겠습니다. 양상우 지음, <감춰진 언론의 진실> 빈곤의 연구팀 지음/조문영 엮음, <동자동, 당신이 살 권리> 최낙영 위원은 도서출판 밭 주간에 재직 중입니다.
2023-12-19 | hrights | 조회: 1093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