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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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작년 대선에서 1번을 찍은 사람이 내 주위에 별로 없는 탓인지, 어쩌다 모여서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윤석열 대통령이 ‘도대체 뭘 알기나 하고 그러는 것인지’ 갑갑하다는 장탄식을 듣게 된다. 심지어 국정 전반에 대해 ‘타블라 로사(tabula rosa, 백지상태)’여서 남이 일러준 대로 하거나 써준 대로 읽거나 아니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하기 때문에, 그의 말과 글에 괜한 의미를 둘 필요조차 없다는 소리도 그럴싸하게 귀에 걸린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 국가의 안위 및 이익과 직결된 정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냐는 일부의 의구심과는 달리, 윤 대통령 스스로는 국정 전반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듯하다. 윤 대통령의 대선 캠프 대변인을 역임한 이의 전언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나 때문에 이긴 거야, 나는 하늘이 낸 사람이야”라고 자부하며 “1시간이면 혼자서 59분을 얘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웬만한 건 내가 다 알아, 누구 앞에서 주름을 잡아’라며 장광설을 늘어놓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점이나 입장과 다른 사람들-정권에 비판적인 국민과 야당의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나 주의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출처 - 경향신문   윤 대통령의 주변에서도 그를 남다른 식견의 소유자로 믿는 것 같다. 교육 문제를 잘 모르는 대통령이 즉흥 발언으로 교육 현장의 불안감을 키웠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대통령을 “수능 전문가”라고 치켜세우며 “저도 전문가이지만 (대통령에게) 제가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입시 관련 수사를 한 경험이 있다”며 “(대통령이) 입시에 대해 수도 없이 연구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토로했다. 또한, 경남 진주갑을 지역구로 둔 3선 의원인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인 박대출 의원도 “윤 대통령은 검찰 초년생인 시보 때부터 수십 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입시 비리 사건을 수도 없이 다뤄봤고, 특히 조국(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의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로서 “대학 제도의 사회악적인 부분, 입시 제도 전반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면서 윤 대통령을 거의 ‘최고 존엄’처럼 떠받들었다. 윤 대통령의 말과 행태를 두고서, 적지 않은 국민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런다고 의구심을 품고 있는 반면에, 본인은 내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고 있는데 ‘검사도 아닌 것들이’ 주제넘게 심통을 부린다고 믿는 것 같다. 국민은 모른다고 하고, 본인은 안다고 하는 이 괴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단, 어쩌다 ‘일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나라 안팎의 큰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건 ‘윤핵관(호소인)들’에게 맡기고 나는 그저 대통령 놀음이나 즐기자는 심사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자기가 어지간한 세상사와 나랏일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자부(누구의 눈에게는 자만)하므로, 분명한 생각을 지닌 채 말하고 행동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윤 대통령이 구사하는 말과 행태와 정책은 그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보아야, 사실에 맞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예컨대 올해 신년사에서의 ‘노사 법치주의’ 발언을 보자. 윤 대통령은 ‘노사 법치주의’가 노동 개혁의 출발점이라면서 공공질서를 무너뜨리는 집회와 시위를 바로 잡는 게 법치주의인 양 말했다. 그러나 법치주의는 국민이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게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즉, 국가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는 반드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로써 해야 하고, 국가 행정도 법률에 근거를 둬야 한다는 원칙이 법치주의다. 그렇다면 법대를 나오고 검사 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이 법치주의가 뭔지 몰라서 그렇게 말한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집회와 시위에 대한 강경일변도 대응을 정당화하고 독려하기 위해” 일부러 “우리에게 익숙해 거부할 수 없는 원리인 법치주의로 포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시위노동자나 국민에 대한 규범이 아니라 역사발전을 거스르는 ‘퇴행’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의 권한 남용을 통제하는 원리”인 법치주의를 몰라서 오용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악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법치주의 관련 내용과 인용의 출처는 구창모 대전지법 부장판사, <원래, 법치주의는 ‘권력’을 ‘통제’하는 원리이다>, <<대전일보>>(23.06.12)) 윤 대통령은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기는커녕 자기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다. 지구사적 문제인 기후 위기, 세계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투쟁,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근대화’를 했다지만 극우적 정치문화가 득세한 일본 모델과 식민지였지만 민주적 시민의 활력이 살아있는 한국 모델의 역사적 경쟁, 그리고 남북의 갈등과 대결 등과 같은 절체절명의 중차대한 문제들에서 그는 자신이 취한 입장과 정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재생에너지 대신에 핵에너지를,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 미국과 일본 편을 그리고 평화적 대화를 접고 군사적 대결의 위험을 높이는 쪽을 선택했다. 그 선택도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게 아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재생에너지 사업 전체가 비리 덩어리인 양 만들고, 중국과 러시아는 상종 못 할 가치 없는 국가로 몰아가는 반면에 일본은 배워야 할 아름다운 나라로 치켜세우고, 북한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는 일들이 ‘사용언론들’의 대대적인 협조 속에서 착착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르는 무지한 사람도 아니고 무능한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 매우 비판적인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정치문화나 경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를 유능하게 퇴행시킨 사상 초유의 인물이다. (역사적 선을 이루려면 선한 다수의 힘이 필요하지만, 역사적 악을 실행하는 데는 악한 소수의 힘만으로 충분하다는 깨달음이라니, 쓰리다!)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은 알기는 아는데,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나 할까. 지난 1년 동안의 나라 간의 관계나 나라의 운영과 살림은, 여러 방향에서 논의되고 종합적으로 검토되지 못하고 하나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나라의 이익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 관계에서조차 미국과 일본은 선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악이라는 ‘가치(?)’의 관점으로만 본다. 집권 세력이 바뀌었어도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식의 실리외교가 30년이 넘게 유지돼왔다는 사실은 보지 않는다. 아예 무시한다. 내정에서도 검사 출신들의 정부 요직 독식, 입법부를 무시한 행정부의 독주, 편파적인 부자 감세 정책, 원전 하나에 ‘올인’하는 에너지 정책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집단과 방향(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문제를 조감하려는 시도는 잘 보이지 않는다. 평생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한다. 무지보다 편향이 더 문제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가 두루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문제의 일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일면적이 아니라 다면적(many-sided)일 때 실체에, 진리에 더 근접할 수 있다. 나만이, 한쪽의 이익만이, 한 관점만이 옳다는 독선에 사로잡히면, 문제가 생겼을 때 자성이 아니라 남의 탓만 하게 된다. 몰라서가 아니라 어설픈 자기 생각=확증편향에 빠져 독불장군처럼 독주(아니, 폭주)하면, 국민은 그에게 요구해야 한다. 일부러 제멋대로 하지 말고 법대로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퇴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준엄하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6-20 | hrights | 조회: 637 | 추천: 9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때 존경했던 인물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반대로 한 때 꽤나 부정적으로 비치던 인물을 정반대로 재평가하게 되기도 한다. 나로서는 연개소문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연개소문을 빼놓고는 고구려 역사에서도 가장 파란만장했던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사를 얘기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그는 존재감이 크다. 그만큼 호불호가 갈리고 평가도 제각각이다. 연개소문과 조선상고사   언제나 그렇듯, 첫인상이 절반이다. 나로선 중학교 때 학교도서관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집어든 ‘조선상고사’가 꽤나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상고사’는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청년 유학자에서 근대계몽운동가로, 마지막엔 아니키스트라는 드라마같은 삶을 살았던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던 단재 신채호가 저술했다. 물론 단재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제대로 저자의 검토도 거치지 못한 채 연재가 되는 바람에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책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골 중학생은 이 책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특히 이 책에서 영웅으로 묘사하는 연개소문 이야기는 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까지도 규정해 버렸다.   조선상고사를 관통하는 건 줄곧 외세라는 ‘타자’에 맞서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우리’가 아니었나 싶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식민지 노예 상태로 떨어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로선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 비친 연개소문은 당나라[唐]에 맥없이 항복하려는 사대주의 지배층을 단칼에 쓸어버리고 고구려의 기상을 결집한 끝에 당 태종이 이끄는 침략군을 통쾌하게 몰아내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다. 심지어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침략군을 저지하는 동안에 배후로 우회해 북경을 타격함으로써 당태종을 포위하는 전략가로서 면모도 보여준다. 단재가 보기에 당 태종이 고구려 침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군대를 보냈다는 기록은 패배로 인한 정치적 타격을 모면하기 위한 ‘가짜뉴스’일 뿐이다. 심지어 고구려가 당나라 침략군을 무찌르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북경 지역까지 정복했다는 설명이 진지하게 등장한다.   조선상고사에서 묘사한 연개소문 이야기에 강한 영향을 받은 건 나 뿐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신문에 연재됐던 소설 연개소문은 조선상고사를 모티브 삼아 적당하게 연개소문에게 박정희 이미지를 덧댔다. 1980년대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소설 단(丹)’ 역시 조선상고사를 차용할 뿐 아니라 당 태종이 북경 근처에서 연개소문에게 포로로 붙잡힐 뻔 했다는 무협소설 ‘영웅문’ 같은 이야기를 추가해놨다. 급기야 1990년대 나온 ‘대쥬신제국사’라는 만화에선 연개소문이 직접 당 태종을 포로로 붙잡아 항복을 받아냈다는 대목까지 등장한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트이고 지식도 조금 더 쌓이고 나서 생각해봤다. 연개소문 이야기는 정반대로 읽어야 할 이야기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구한 영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구려를 위기에 빠트린 존재에 가깝지 않을까. 만약 당나라와 전쟁이 그토록 불가피했다면 굳이 신라를 잠재적 적으로 돌려야 했을까. 수성전을 위주로 한 강력한 방어체계를 무시하고 굳이 대규모 회전이라는 도박을 벌여야 했을까. 동맹관계였던 백제가 무너지면 남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게 불을 보듯 뻔한데도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연개소문이 665년 죽고 나서 3년도 안돼 아들 3형제가 내전으로 사실상 자멸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패가 아닐까. 출처 - KBS뉴스   무엇보다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까지 수십년간 전쟁을 하면서 겪어야 했을 고구려 민초들의 고통은 둘째치고라도, 당나라에 시종일관 강경책으로만 맞섰던 게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신라나 발해처럼 적당한 군사적 승리를 밑천 삼아 명분을 살려주며 평화를 도모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사대주의를 깬 민족자주 영웅’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선인 것일까. 애초에 그 사대주의라는 것 자체가 민족국가와 자주국가의 열망을 고대사에 투사한 우리만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500년 뒤 역사가들은 ‘조선은 속방(屬邦)이기 때문에 조선의 국내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던 전근대 한중관계와 ‘전시작전권도 없이 우리 세금으로 주한미군 모시고 사는’ 현대 한미관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사대주의’라고 평가할까.   느닷없이 사대주의 논란이 공론장을 뒤덮고 있다. 굳이 밥먹는 자리에서 흰소리를 하는 오지랖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방식 역시 그리 세련돼 보이진 않는다. 가장 황당한 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운운하는 대목인데, 미국과 일본한테 지난 1년간 어떤 식으로 굽히고 들어갔는지 세상이 다 봤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본한테 하면 가치외교, 중국한테 하면 사대주의라는 발상이야말로 내로남불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니 2021년 대선 국면에서 멸치와 콩을 쇼핑하는 유치한 멸공팔이를 할 때 ‘중국대사관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는 보도가 나왔던 것도 떠오른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선은 넘지 말길 바랄 뿐이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3-06-13 | hrights | 조회: 566 | 추천: 5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임기 초창기부터 무능과 독선으로 빚은 연이은 지지율 추락에 겁먹은 정권의 위기 탈출 시도가 급브레이크도 비상등도 켜지 않고 대외적으로는 한미일 군사동맹의 급행주로를 타고 대내적으로는 수구보수의 회귀로 직진하고 있다. 대화와 소통의 리더십을 일찌감치 포기하였다. 공안탄압의 일상화, 공안통치의 전면화에 골몰하고 있다. 화물연대에 대한 전방위적 노동탄압에서 기세를 올린 때문인가 싶다. 화물 노동자의 생존권과 안전이 달린 문제에 대해 아무런 정책적 대안도 없이 제대로 된 협상조차 거부한 채 탄압으로 대응한 것이 정권의 미래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터널에 갇힌 나머지 남북관계에서 주적론과 선제공격 전쟁불사를 주창할 때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대북적대강경정책은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와 공안탄압의 신호탄이었다. 급기야 군국주의 제국의 깃발을 나부끼며 대동아 공영론의 부활을 꾀하는 후예들이 식민지배의 옛 영토를 보란 듯이 활보해도 괜찮다는 역대급 친일 매국 모리배들이 아무런 부끄럼 없이 천박한 기질을 자랑하며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있다. 그래도 매국 외교에 대한 국민적 반발은 의식한 듯하다. 소위 한일 셔틀 외교의 재개와 복원을 뒷받침하고 이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공안 검찰은 국가정보원을 부려 매국 보수 언론을 통해 피의사실 유포 범죄를 자행하며 끊임없이 시대착오적 종북 공안몰이에 골몰하고 있다. 출처 - 씨원뉴스   소위 검찰 특수통 칼잡이 기술에 익숙한 정권에게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벌써 공안통치 외에는 정권의 위기를 수습할 대책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아있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올해 말로 국가보안법 수사권이 없어지는 국가정보원을 시도 때도 없이 주구장창 전면에 등판시키며 간첩조작 사건의 화려한 전성기로 만드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대공수사권 원상회복을 갈구하는 음지의 독버섯 세력들을 여기저기에서 끌어 모아 빨갱이 사냥에 총동원하고 있다. 적폐들과 손 맞잡고 2024년 총선 승리를 위해, 수구보수의 회귀를 향해 질주하는 모양새다. 과거 독재정권의 공안통치를 능가하는 검찰독재정권이다. 달라진 것이라면 검찰을 중심으로 소위 검찰 칼잡이들이 공안정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특성뿐이다. 한국 민중이 분단냉전체제의 장막에 갇혀 종북 공안몰이에 세뇌당하기 십상이고 그 저항력이 취약한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임기 초부터 무한 질주하는 수구보수 회귀 목적의 공안통치에 그저 손 놓고 당할 리도 만무하다. 정권의 노동탄압, 민중운동 탄압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검찰독재에 대한 잠재된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실질적인 저항력으로 결집할 것이고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대북적대강경정책과 공안 통치만으로는 정권 위기의 수습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검찰독재정권이 한계점에 부딪혔다. 오죽했으면 민주노총의 집회와 시위를 불법으로 몰아가고 야간 집회와 시위를 제한하겠다는 위헌적 발상까지 나왔다. 시위 해산 및 검거 훈련에 캡 사이신 최루액까지 등장하였다. 헌법과 법치주의의 외피를 벗고 백골단과 최루탄에, 물대포까지 거리에 등장케 하고 집회와 시위에 대한 원천봉쇄까지 일상화되는 이판사판 막가파식 대응으로 일관하다보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이러다 오래 못 가지’, 한국의 역사에서 독재 정권은 언제나 국민과 유리된 탓에 공안통치의 수렁에 깊이 빠져 들어가 결국 민중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비참한 말로를 예외 없이 맞이하였다. 검찰독재정권의 운명이 다하는 분수령이 될 날과 사건과 계기가 시시각각으로 그 목숨 줄을 죄어오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민중운동 진영은 정권의 공안탄압에 맞서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며 총파업과 국민적 대항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퇴로가 없는 검찰독재정권, 파멸로 나아가는 형국이다. 공안통치의 약발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고언을 전해 주고 싶다. 무엇보다도 대북적대강경정책에서 벗어나 남북관계에서 대화와 협상의 통로를 만들기 바란다. 다음으로,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의 마수에서 벗어나 더 이상 미국을 추종하지 말고 대등한 한미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성실한 사과와 피해회복을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공조하며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책동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국가보안법 및 공안검찰과 국가정보원에 기대어 공안탄압으로 얻을 것은 정권의 파멸 뿐임을 자각하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진보민중운동 진영과 공존을 추구하며 대화와 협상으로 민생위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 검찰독재정권이 자업자득의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한국 민중의 불만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싶다면, 그 외 다른 길이 없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3-05-31 | hrights | 조회: 1087 | 추천: 4
오항녕/인권연대운영위원 - 국유 재산을 다시 보자 - “문화재가 국유재산인가요? 법령에 어떻게 되나요?” “아, 그게, 저희가 논의한 뒤에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며칠 뒤, 담당 사무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책임감이 느껴졌다.) “문화재도 국유재산입니다. 취득, 관리, 처분에서 국유재산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그럼, 겨울 나고 북쪽으로 날아가는 청둥오리도 국유재산인가요?” “네? …….” “청둥오리는 천연기념물이거든요. 무형문화재예요. 근데 그 애들이 철따라 만주나 아산만을 오가는 걸 어떻게 관리하나요? 국유재산 목록에 매번 분실, 취득이라고 적을 수도 없고.” “…….”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몇 년 전 강의 시간에 문화재 수집과 처분에 대해 논의하다가 내가 관계부처에 문의한 적이 있는데, 위는 기획재정부 담당자와 했던 실화이다. 대화 도중 청둥오리를 떠올린 건 어려서 친구, 형들과 어울려 자주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땐 그게 천연기념물인지, 잡아먹으면 불법인지, 우리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닭 대신 청둥오리였을 뿐이다. 청둥오리나 꿩, 참새, 산비둘기, 뜸북이는 우리의 간식이었다. 붕어, 미꾸라지, 가물치, 메기, 뱀장어, 조개 따위는 개천에서 구하는 간식이었듯이. [정선의 〈행호에서 고기잡이를 보다[杏湖觀漁]〉. 행호는 고양 행주산성 앞을 흐르는 한강이다. 이맘쯤이면 웅어잡이가 한창이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강과 바다, 산과 들에서 생계수단을 얻었다.] 위 대화는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국유재산법은 마치 ‘국가 안에 있는 건 사유재산 빼고’ 모두 국가 소유, 즉 국유라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려청자, 부석사 무량수전 같은 유형문화재 뿐 아니라, 천연기념물이나 승무(僧舞) 같은 무형문화재까지 국유재산법 적용 대상이라고 답변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는 국가-정부 입장에서도 곤혹스럽다. 전화 통화 말미에 드러났듯이 ‘국유재산법의 적용을 받는 문화재인 천둥오리’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모순일 뿐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관련 공무원들은 직무유기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매년 어마어마한 국유재산을 밀반출, 밀반입하도록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억지스러운 상황은 〈청자상감운학문 매병〉이나 정선(鄭敾)의 〈금강전도〉가 각각 사유(私有)로 간송미술관,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음에도 모두 국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데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국유재산법’의 논리대로라면 하나의 문화재에 두 개의 소유권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국유란 용례에 담긴 혼선은 이 개념이 공유(共有)와 사유(私有) 모두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안에 있는 건 사유재산 빼고 모두 국가 소유’라는 의미의 국유 용례를 통해 마치 ‘국유란 국민의 것이란 뜻’이라는 착시 현상을 만들어낸다. 국민들 것이니까 국민에 ‘의해’, 국민을 ‘위해’ 취득되고 사용되고 처분되겠지 하는 착각이다. 말하자면 국유가 공유(共有)를 뜻하나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더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법률에서 ‘공유(公有)’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이 공유(公有)는 지방정부의 재산이나 국유를 의미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청자상감운학문 매병〉과 정선(鄭敾)의 〈금강전도〉. 이 문화재가 국유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인천공항, 철도, 항만, 수도, … 인터넷까지 양도할 수 없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자산이다.] 한편 국유는 얼마든지 사유와 마찬가지로 처분될 수 있다. 작년 기획재정부는 ‘매각 제한 대상’인 서울 강남 소재 상업용·임대주택용 국유재산을 매각하려고 했다.(《경향신문》 2022년 8월 16일자, 인터넷판) 당시 정부는 9곳을 매각 대상으로 발표했을 뿐 어디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정부 말로는 ‘유휴·저활용 국유재산 매각·활용 활성화 방안’이었다. 그러나 6곳이 강남 지역에 있고, ‘유휴, 저활용’이 아니라 매각 대상이었던 강남구 신사동 ‘신사 나라키움’ 건물처럼 잘 사용하고 있고 곧 지하철이 들어설 곳으로 부동산업자들도 “저런 노른자위 땅은 그대로 갖고 있는게 가장 큰 이득”이라고 했단다. 이런 땅과 건물을 슬그머니 팔려고 한 것이다. 매각되었으면 누가 샀을까? 보나마나 돈 많은 개인이나 기업이 샀을 것이다. 남미의 독재국가들만 다국적 기업에 도로, 항만, 공항을 매각해서 부정한 정치자금이나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게 아니다. 대한제국 말기에 이씨 왕가가 미국에 넘긴 평안도 운산 금광 채굴권과 일본에 넘긴 경인철도 부설권부터,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교량, 공항, 이동통신 시스템, 인터넷 등이 이미 사기업에 넘어갔거나 자본가들이 탐내는 먹잇감이다. 이런 기반시설에 대한 통제, 관리권을 갖게 되면 경쟁할 필요 없이 독점, 과점 가격을 통해 위험 없이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전기요금 인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한국전력은 이미 무늬만 공기업이다.(윤석열 대통령은 전기요금 인상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원전이 줄지도 원전의 발전량이 줄지도 않았다.) 공사(公事)로 정부 지분 18%, 한국산업은행 33%로 명목상 정부 지분 51%를 유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외국인 등 주주가 차지하고 있다. 공사임에도 첫째, 이윤을 얻는 기업에 공급하는 산업용 전기는 싸고, 국민의 일상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가정용 전기는 비싸며, 둘째, 한전은 적자를 보며 세금으로 충당하는 반면, 사기업이 포함된 자회사들은 흑자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사인 척하면서 공익성을 사익으로 바꾸는 데 앞장서고 있다.(이런 사기극은 적자 KTX와 흑자 SRT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둑들이 노리는 대표적인 먹잇감, 인천공항.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는 이데올로기와 법적 장치들 때문에 한 번 사유화된 공유자산은 돌이키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지키는 게 훨씬 중요하다.] 물, 공기, 바다, 강, 산이라는 자연 외에, 우리가 그리고 후손이 누려야 할 공유자산은 의료 설비와 기술, 철도와 도로 같은 교통 시설, 도시의 공원 같은 주거 시설, 인터넷의 플랫폼 등 지천에 널려 있다. 이것이 효율화, 선진화 등의 미명으로 사유화되지 않도록, 정부가 어떤 야합을 시도하는지 어느 때보다 눈 부릅뜨고 살펴야 할 시점이다. 공유자산의 사유화는 대미 대일 굴욕외교보다 훨씬 되돌리기 어렵고, 그만큼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재앙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이런 일이 있는지 살펴보고, 보이거나 알고 있다면 인권연대, 참여연대, 경실련 등에 알린다. 언론다운 언론에 제보해도 좋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들끼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거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5-24 | hrights | 조회: 728 | 추천: 10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윤석열 대통령만큼 ‘자유’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사용한 대통령은 이제껏 없었지, 싶다. 공식적인 연설이나 축사에서 툭하면 ‘자유’라는 말을 꺼내 든다. 이번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는 ‘자유’가 총 46회 등장했단다. 역대 최대 횟수로. <국군의 날> 행사에서 ‘부대 열중쉬어’라는 간단한 말도 못 했다는 양반이 자유라는 말은 조자룡 헌 칼 쓰듯이 쓴다. 사회생활이라곤 검사 생활을 한 게 거의 전부인 그가 자꾸만 ‘자유, 자유’하는 이유가 뭘까? 좋아하는 사람 만나는 일에 맘 쓰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썩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알려고 힘쓰고 싶지 않으니, 그 이유를 찾아볼 연구 의욕 따위는 없다. (물론 능력도 없다) 그래도 자문(自問)했으니, 주먹구구식이라도 자답(自答)을 해 보자. 우선 개인적-사적인 차원으로의 접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정의’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쓴 건 독재자 전두환이었다. 전두환과 그의 수하들이 ‘정의’라는 말을 남발한 것은, 그들에게 실제의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불의한 독재 세력이기에 정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자기-부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극악무도함과 불의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말로나마 주야장천 ‘정의, 정의’할 밖에. (당명조차 ‘민주정의당’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 사랑 역시도 비슷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대개 자유를 꿈꾼다. 그렇다면 자유의 결여 혹은 부재가 자유를 욕망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굳이 헤겔을 불러내지 않더라도, 인간은 충족된 것이 아니라 결핍된 것/부재한 것을 욕망한다. 배고플 때 음식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먹고 싶다는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배불리 맛있게 식사한 직후라면, 먹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진다. 목마른 데 물이 없으면 물을 찾지만, 갈증이 해소되면 물을 욕망하진 않는다. 단정할 순 없어도,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에 오랫동안 얽매인 사람이나 하늘 같은 스승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사람, 요컨대 자기보다 강한-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사람에게 억눌려 온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자유’를 찾을 것이다. 불의하기에 -구두선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정의를 찾듯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자유’라는 말을 줄줄, 아니 술술 입버릇처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정윤성의 기린대로418 / 출처 - 전북일보      2.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향한 새로운 여정>이라는 제목의 하버드 대학교 연설(4/29) 막바지에서 화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 규정했다. 그는 자유인인가? 물론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다. 당연한 소리지만 자유인은 노예가 아니다. 자유인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노예는 그렇지 않다. 그런 자유가 없는 게 노예다. (자유를 상실한) 노예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주인이다. 노예는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말이 거짓말이나 허위 주장이 되지 않으려면 사실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 대통령이 안 돼도 위안부 문제는 해결하겠다는 대선 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책임감은커녕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인정하긴 어렵다. 한편, 그가 애용하는 ‘자유’는 냉전 시절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냉전 시기의 자유주의는 ‘친미 반공주의’를 뜻하는 편협한 정치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선/악, 흑/백의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젖어서 세계를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 진영을 양분하는 시각 자체가 냉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속성이자 산물이다. 더욱이 세계사의 변화를 자기가 주체적으로 보고 판단하지 않고, 남(미국, 일본)의 눈으로만 보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실리외교를 행하기는커녕, 마치 미국과 일본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시쳇말로, “우리 국민은 그가 사실상 노예근성을 지닌 것으로 느끼지게” 될 것 같다.        3. 자유주의를 ‘친미 반공주의’쯤으로 여기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냉전 논리의 수사일 뿐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자면, 자유주의는 진보와 보수를 포용하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폭이 넓은 이념이다. 자유주의는 폭력을 규제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자 이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국가의 첫 번째 의무를 국민의 생존권(the right of life) 보호에 두고 있다. 자유주의 국가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삶 그 자체의 보존, 즉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책무를 진다. 이러한 국가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떠받드는 천조국의 「독립선언문」에 있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라는 구절의 오랜 원천이었다. 그가 자유인이라고 느낀다면,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면,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불안한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생명 ․ 인권 ․ 평화의 보호에 주력해야 한다. 끝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연설에서 매우 우려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지점이 있다. 독재와 전체주의 세력이 “민주 세력, 인권운동가 행세”를 해서 자유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구라를 치는’ 대목이 그것이다. 증거나 사실로 입증되지도 않았건만, 민주 세력과 인권운동가를 위장한 전체주의 세력이라고 날조 ․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위협하는 거짓 선동이 될 뿐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절제(moderation)를, 자유주의 사회를 위한 최종적 원리로 제시했다. 그는 [자유주의와 그 불만]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때때로 성취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차원에서 절제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은, 자유주의 자체의 재부흥, 나아가 사실상 생존의 열쇠가 될 것이다.” 자유의 향유 여부는 완벽한 성과를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 자기 절제에 달려있다. 시대착오적 편향을 결단인 양 우기거나 제멋대로 인권운동을 매도하는 짓은 자유가 아니라 맹목일 뿐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5-04 | hrights | 조회: 623 | 추천: 5
이재성 / 인권연대 운영위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유명한 대사는 영화 <부당거래>에서 검사 역할을 맡은 배우 류승범이 경찰에 대해 뱉은 말이지만, 2023년의 현실에서 이 대사가 향해야 할 곳은 검찰 자신이다. 수사권과 기소권, 영장청구권과 형집행권을 비롯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적 권한을 한 손에 쥐게 해준 국민의 호의가 반세기 이상 계속되자 그것이 마치 자기들의 천부적 권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착각은 신념이 되어 검찰 자신을 속이고 국민도 속이고 있다.   출처 - 월간중앙   윤석열과 한동훈의 행태 가운데 분노의 버튼을 가장 세게 누르는 지점은 헌법과 삼권분립조차 무시하는 초법적 발언과 행동들이다. 입만 열면 법치를 외치는 자들이 민주주의 기본 가치를 무시하는 초현실적 풍경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한동훈은 민주당 ‘검찰 수사권 축소법’의 정당성을 인정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소수의견이 4명이나 있었다며 대놓고 무시했다. 자신을 헌법 위의 존재라고 여기는 한동훈의 행태도 놀랍지만, 언론의 무덤덤한 반응은 더욱 놀랍다. 호의가 계속되니 무법천지도 계속된다. 헌재의 판단에 승복하고 사과하라는 야당 의원들의 요구에 한동훈은 “왜 (검찰이) 깡패·마약·무고·위증 수사를 못 하게 되돌려야 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다”며 “국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시행령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시행령으로 법을 뒤집는 위헌적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저기서 마약 사건이 터지자 마약범죄 특별수사본부를 만든다고 한다. 대검찰청에는 옛 마약·조직범죄부(마조부)를 부활하기로 했다.   조선일보 지면   윤석열 정부의 호위무사인 <조선일보>는 ‘검찰 손발 묶인 사이 마약이 거리로 풀려났다’는 기사를 1면 톱으로 보도하며 응원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마약 수사 기능이 약해져 마약이 판치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이 기사의 거짓이 드러난다. <연합뉴스>는 4월 14일 ‘작년 마약사범 역대 최다…전담 경찰은 1년 새 고작 4명↑’ 기사에서 지난해 마약사범 검거가 역대 최다였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주장대로라면 검찰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도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경찰이 열심히 일한 덕에 역사상 가장 많은 마약사범을 잡아들인 것이다. 오직 검찰만이 (마약) 수사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모든 절대주의가 그러하듯 간계와 허위를 품고 있다. 마약이 대중화된 것은 경제 발전과 해외 교류 증가 등 시대 변화 탓이지 검찰이 수사를 못(안)해서가 아니다. 한국 정도의 경제력에 한국만큼 마약이 드문 나라도 없다. 조선일보는 늘 이런 식이다. 팩트를 주장에 끼워 맞춰 그럴듯하게 선동한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초부터 마약 범죄 단속을 강조했다. 검찰 수사권 축소의 폐해를 가장 극적으로 부각할 수 있는 호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태원 참사 발생 원인 중 하나가 교통 안내를 비롯한 경찰의 질서 유지 기능이 마비된 것이었는데, 마약 단속하느라 바빠서였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한동훈이 왜 이렇게 마약 수사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는 최근의 에피소드가 있다. 마약 투약 혐의를 받는 배우 유아인이 대검 마약과장 출신의 전관 변호사를 선임한 것이다. 지난해 5월 대검 차장을 끝으로 검찰을 나온 박성진 변호사라는 사람인데, 마약과 프로포폴 수사로 다수의 연예인을 잡아넣은 자타공인 마약통이다. 유아인으로선 ‘따끈따끈한’ 검찰 전관을 선임한 셈이다. 유아인은 이밖에도 검찰 출신 전관 변호사를 여럿 선임했다고 한다. 출처 - 예스미디어   검찰 출신 전관 변호사는 법정에 출석하는 변호사가 아니다. 유아인처럼 돈 많은 사람들은 법정용 변호사(주로 판사 출신)를 따로 산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검사 후배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는데, 의뢰인의 구속을 면하게 하거나 혐의를 조정하고 형량을 줄여주는 대가로 거액의 수임료를 받는다. 검찰에 수사권이 없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비즈니스다. 한동훈과 검찰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수사권을 지키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전관예우라는 우아한 네이밍에 숨겨진 실체는 법을 돈으로 사는 추악한 거래와 검사들의 인맥으로 정의를 짓밟는 반민주적 시스템이다. 박성진 변호사는 검찰 퇴직 전 검찰 수사권 축소법에 항의하여 두 차례나 사의를 표명했다. 검찰 내에서 친문 검사라고 비난받았던 김오수와 이성윤도 마찬가지로 항의성 사표를 냈다. 밥그릇 지키기에는 친문 반문이 따로 없었다. 친문 반문보다 중요한 건 퇴직 후 밥벌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피보다 진한 건 돈이다. 대체 언제까지 이 부당한 호의가 계속될 것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3-04-26 | hrights | 조회: 688 | 추천: 16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출처 - 더중앙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게 외교의 본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중수교 직후인 1990년대 들어 중국과 접촉을 많이 하게 되면서 중국은 위협이 아니라 그냥 후진국, 그렇지만 고도성장하고 언젠가는 옛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는 잠재력과 기회의 땅이었다. 1990년대 한중관계가 좋았을 당시 국가주석 장쩌민이 대통령 김대중을 사석에서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들은 적도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 미국의 전횡에 맞서는 대안세력 같은 인식도 생겨났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한중 양국의 끈끈한 우애를 강조하며 "대일전쟁이 가장 치열했을 때 양국 국민은 생사를 다 바쳐 있는 힘을 다 바쳐 서로 도와줬습니다"라고 강조한 게 9년 전이었다. 일본에서 한국문화상품이 인기를 끌던 것 못지않은 풍경이 중국에서 펼쳐졌다.   그랬던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최근 몇 년간 중국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나빠진 건 격세지감이라고 할 만 하다. 현재 한국사회에선 ‘중국이라는 위협’ 에 대한 얘기가 광범위하다. 3년 전 <시사IN>에 실린 중국에 관한 선호도를 ‘감정온도’라는 개념으로 조사한 게 있다. 0도는 매우 차갑고 부정적인 감정, 100도는 매우 뜨겁고 긍정적인 감정이었는데, 미국이 57.3도, 일본 28.8도인데 중국은 26.4도에 불과했다. 특히 20대는 50~60대에 비해 두 배 가량 반감이 심했다. 중국어 공부 인기가 식었다거나, 언론사 중국특파원 후임자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한국인들은 중국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사드배치를 둘러싼 갈등을 겪으면서 중국은 듬직한 이웃이라는 성격은 완전히 사라지고 덩치 큰 옆집 깡패같은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다. 아무리 중국에 비판적인 사람이라도 중국 역사와 문화에는 한 수 접고 들어갔는데 요즘은 그런 것조처 바닥났다.   최근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과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라는 책을 연달아 읽었다. 각각 한국과 미국의 시각에서 중국이라는 위협을 다뤘다. 메시지는 꽤 명확하다. <차이나 쇼크, 한국은 선택>은 서문에서 분명하게 선언한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실체적인 위협이자 거대한 리스크”이며 “점점 더 커져가는 차이나 쇼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이다(9쪽).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는 더 노골적이다. 최근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중국경계론을 위한 지침서나 다를 바 없다.   두 책은 여러모로 상호보완적이다. 현재 중국과 관련한 여러가지 현안과 진단은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에서, 중국이 안고 있는 위협요인은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에서 읽어보면 도움이 많이 될 듯 하다. 특히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산업경쟁력 강화는 한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당장 수출 역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다. 두 책 모두 그 가능성을 낮지 않게 보는데, 설령 여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분석과 대비는 시급해 보인다. 특히 대만 문제가 시진핑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 문제와 직접 연결되는 상황에선 더욱더 그렇다.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의 공동저자인 할 브렌즈와 마이클 베클리는 이미 2021년 9월 ’포린폴리시’에서 ‘쇠퇴하는 중국이 문제’라는 분석을 제기한 바 있다. 이 분석은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에서도 중요하게 거론된다. 사실 포린폴리시 기고문의 확장판이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농촌 문제, 농민공 문제, 인구감소와 고령화, 지정학적 긴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농촌 문제, 중국판 카스트 제도나 다름없는 6억명이나 되는 농민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코 중진국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중국이 성장하는 제국인지 쇠퇴하기 시작한 제국인지 지금 당장 판단하긴 쉽지 않다. 사실 중국이라는 충격보다 더 걱정되는 건 사실 ‘우리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냉정하게 국익을 판단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당장 한국 정부를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한국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분들은 조선시대 외교정책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조선시대 외교안보정책 최대 참사라고 할 수 있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경직된 대외정책에 대해선 그리 비판하면서도 미중갈등으로 눈을 돌리기만 하면 ‘양잿물도 미국이 좋다’는 태도로 나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에서 저자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신남방정책만큼은 전 정권의 정책이라고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계승하여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야 할 것(266쪽)”이라고 조언하지만 안타깝게도 신남방정책은 곧바로 쓰레기통에 쳐박히고 감사원 감사받느라 바쁘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겠고, 그렇다고 딱이 미국을 상대로 국익을 잘 지키는 것 같지도 않다.   우리가 장기적인 전략에 입각한 일관된 정책을 펴지 못한다면, 차이나 쇼크가 아니라 한국 쇼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문재인 정부 내내 한국 주류 담론은 줄곧 '중국은 패권국이 될 수 없다, 중국은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노래를 부르며 문재인 정부 외교정책을 물어뜯기 바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에 박근혜가 중국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한 건 실리외교라며 빨아대기 바빴다는 건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걱정스러운 건 중국이라는 충격이 아니라 한국, 우리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3-04-19 | hrights | 조회: 693 | 추천: 7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 정권의 진보민중운동에 대한 종북몰이 공안탄압 공세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한복판에서 종북공안몰이의 희생양들과 함께 위축, 동요하지 말기, 잠시도 멈추지 말고 싸워 나아가기를 실천하였다.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는 불법무도의 폭력에 맞서 당사자들과 당당히 용맹하게 필사적으로 맞서 쉬지 않고 싸우는 사이 어느새 봄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공안탄압의 피해자들을 도와 변호인으로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그만큼 느낀 것도 배운 것도 많은 날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공안탄압의 본질을 깨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성과다. 정권의 종북 공안몰이는 주적론, 선제공격론 등 대북강경 소동이 빚어낸 산물이다. 각종 정권의 실정에서 비롯된 지지율 추락을 막아 극심한 통치 위기에서 벗어나기 최후의 비상수단이다. 그들은 악마화된 북과 연결되면 이성과 상식이 정지되는 반북정서를 극도로 자극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국정원과 공안검찰이 흘린 온갖 낭설을 주워 담은 극우보수언론사의 ‘단독’ 타이틀 기사의 선정적, 자극적 반북 선동이 역겹도록 지겹게 반복되고 있다. ‘양치기 소년’보다 저열한 수준의 거짓 선동에 한국 민중은 위축과 냉각상태에 빠진다. 분단냉전체제에 갇힌 한국 민중은 정권에 대한 솟구치는 불만을 결집해 저항력을 키우기가 좀체로 쉽지 않다.   출처 - 사람일보   광기의 종북 공안몰이는 분단냉전체제에서 진보민중운동의 가파른 성장세를 억누르기 위해 온갖 구실과 궤변을 붙여 혐오를 조장해왔다. 그동안 자주통일운동을 겨냥해온 종북 공안몰이의 표적이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과 전농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진보민중운동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해 극우보수정권의 통치위기에서 벗어나겠다는 심산이다. ‘주한미군 철수, 국보법 폐지 같은 구호가 노동자, 농민의 삶과 무슨 상관인가’라고 선동하며 민주노총과 전농에 대한 대대적 공안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정권의 진보민중운동에 대한 공안몰이의 본격화야말로 노동자, 농민의 삶과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가 본질적으로 연결된 사안임을 직관적으로 선명히 보여준다.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분단냉전체제의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거꾸로 된 비정상사회의 역설이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공안탄압의 본질은 비정상의 한국 사회를 온전히 바로잡기 위해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는 진보민중운동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 그 귀결점이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공안탄압의 본질이 진보민중운동에 대한 발전을 억압하는데 있기에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진보민중운동이 쟁취해야 할 사활적 과제이다. 공안탄압에 맞서 한국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역량을 갖춰 나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대신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없다. 진보민중운동이 자체의 역량으로 정권의 공안탄압을 극복할 수 없는 한 한국사회에서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발전, 성장해 나갈 수 없다. 반북논리에 갇혀 있는 한 한국의 진보민중운동은 공안탄압을 분쇄할 역량을 갖출 수 없기에 진보민중운동의 성장과 발전은 정체와 답보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여전히 한국 민중은 공안탄압에 맞서 이를 극복할 역량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한국 민중 자신에게 있기에 한국 민중은 국가보안법에 맞서 거세당한 저항력을 회복하고 공안탄압 분쇄의 역량을 끊임없이 축적해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보민중운동의 비약적 성장과 함께 국가보안법은 폐지될 수 있다. 진보민중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공안탄압에 맞서 공안탄압의 본질을 직시하며 변호인으로서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다. 지난 5개월 여 이들과 함께 싸우며 진보민중운동의 가파른 성장세를 확신하게 되는 위대한 시간들을 보냈다. 위축되거나, 동요하지 않고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을 당당히 행사했다. 이를 폭력적 강제인치로 탄압해 나선 국정원에 맞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구금상태의 피의자들로서는 해방 이후 최초로 검찰 수사기간 30일 동안 검찰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강제인치 당하지 않았다. 검찰 독재 왕국에서 그 누구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을 당당히 행사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서 검찰의 강제구인 시도를 좌절시켰다. 감히 범접할 수 없었으리라. 공공연히 진술거부권 행사를 방해하는 폭력을 자행한 국정원 등의 반헌법적, 반인권 행위가 야만적 고문 폭력 범죄임이 증명될 날이 기필코 머지않은 시점에 도래할 것이다. 이들에게서 한국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보안법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았다. 그 기세를 본받아 국가보안법 폐지에 맞서 과감한 투쟁이 필요한 시기다. 분단냉전체제와 국가보안법에 의해 가로막힌 진보민중운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당면한 공안탄압에 맞서 진보민중운동 진영이 파시즘 악법의 횡포에 맞서 그 횡포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보민중운동은 더 이상 종북몰이 공안몰이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대안적 정치세력으로서의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진보민중운동의 성장을 위한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항쟁의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한국 민중의 단결과 연대투쟁이 정권의 공안탄압을 극복하고 진보민중운동의 활로를 여는 유일무이한 첩경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3-04-11 | hrights | 조회: 991 | 추천: 5
오항녕 / 인권연대운영위원   “윤석열 정부의 망국 외교를 비판하는 범국민대회를 열고 윤 대통령의 사과와 박진 외교부장관 등의 파면을 요구했다.” (오마이뉴스, 2023년 3월 18일)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놓은 일본 방문 결과를 놓고 민심을 전하는 기사이다. 얼마 전에도 우리는 이태원 10.29 참사와 관련하여 장관 이상민이나 경찰청장 윤희근에게, 학교폭력과 관련된 정순신에게 사과를 요구하였다. 꽤 오래 전부터 나는 이런 사과 요구가 뭔가 초점이 어긋나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과는 잘못했다는 인정이다. 반성을 기초로 한다. 반성이란 돌이켜 되짚어본다는 말이다. 이를 참회, 회개라는 말로도 쓸 수 있을 것인데, 모두 후회[悔], 뉘우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① 참회는 번뇌를 태우고 천상에 태어나게 한다.(대승본생심지관경) ②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복음 15:10) 부처님은 참회가 번뇌를 태워 없애버린다고 했다. 사실 보통사람들에게 참회는 번뇌와 함께 찾아온다. 참회하려니 창피하고 부끄럽고 민망하다. 벼라별 핑계를 다 댄다. 그래서 공자님은 ‘소인배는 잘못을 저지르면 항상 변명을 한다’고 못박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변명을 찾아내려는 발버둥 자체가 곧 번뇌라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회개가 천상의 기쁨이라고 격려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그만큼 참회와 회개가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잘 반성하지도, 뉘우치지도 않는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어(Leon Festinger)의 조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을 바꾸기보다 행동에 따라 믿음을 조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수요집회 : 3.1절에 1588회째 열리고 있었다. 가해자의 사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워진다. 시간은 천사의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과를 요구하는 건 우리가 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는 인간임을 보여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물론 그 뜻을 알지는 모르지만.] 일단 행동을 합리화하면 이어서 다음 행동도 합리화한다. 지난 주 이찬수 운영위원의 칼럼 〈대통령(실)의 문장력〉에서 인용한 바,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중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라는 말은 일본의 불법적 국권침탈을 불행의 근본 원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다. 이러한 가해자 논리의 내면화, 또는 노예 근성에 대한 성찰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므라이스를 먹든, 게이오 대학에서 조선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던 오카쿠라 텐신을 찬미하든, 술이 누가 제일 세냐고 묻든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술이 센가’ : 나는 여기서 ‘가해자에 대한 투항’을 읽는다. 이런 노예 근성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성찰할 수 있는 인격이 없을 때, 합리화는 계속되고 또 길어진다. 실제로 3.1절 기념사 5분, 그리고 저 투항을 합리화했던 국무회의 발언은 26분이나 걸렸다.] 이찬수 운영위원은 “여러 걸음 양보해, 외교적 편향성이나 자의적 자유 관념 같은 것은 정권의 속성에 가까우니 교정에 시간이 걸린다 쳐도, 문장만이라도 격조있고 간결하며 논리도 어느 정도 완결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성찰이 결여된 문장이나 논리가 격조 있고 간결하며 완결적인 적은 없다. 내가 보기에 3.1절 기념사가 엉터리였던 것은 그것이 인지 부조화의 합리화, 즉 핑계와 억지의 기념사였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기운이 없을수록 반성하기 어렵다. 나이 먹어가며 ‘꼰대’가 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돌아볼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잘 늙기가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릇된 행동이나 말을 성찰하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그릇된 행동을 고친다. 페스팅어 조사에서 놓친 지점이 이것이다. 합리화도 정당화도 하지 않고 그 순간을 가만히 쳐다보는 인간들이 있다. 변명과 핑계의 번뇌를 떨치고 천상의 격려를 받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사과할 줄 안다. 그렇게 사과는 누가 요구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알아서 하는 것이다. 성찰에 동반된 성숙함이 보여주는 고상한 인격의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많은 분들에게 간곡히 제안한다. 사과를 요구하지 말자고. 사과할 사람 같았으면 진즉에 했을 거라고. 나아가 사과하라는 요구는 부질없으며,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사과를 요구할 시간에 준엄하게 야단을 치고, 날카롭게 비판하자고. 그리고 정작 사과 받을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지거나 냉소하지 않도록 함께 손잡고 기운 내고 당당하게, 아름답게 살자고.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3-28 | hrights | 조회: 656 | 추천: 9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낭독했던 2023년 제104주년 3.1절 기념사를 읽으면서 걱정부터 앞섰다. 대통령의 국경일 기념사치고는 내용적 빈약, 논리적 비약, 개념적 모호, 외교적 편향 등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아래에 기념사 전문을 인용하면서 각 문단에 대한 필자의 소감과 평가를 고딕체로 표기해보았다. 출처 - 경향신문 (대통령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50만 재외동포와 독립유공자 여러분, 오늘 백네 번째 3.1절을 맞이했습니다. 먼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04년 전 3.1 만세운동은 기미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 헌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갈망했던 우리가 어떠한 세상을 염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 첫 번째 문단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인사말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에서부터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작은 문제부터 이야기하면 이렇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합해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을 이어서 읽거나 듣는 국민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외에 ‘독립유공자’가 별도의 존재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순국선열’은 단수로 쓰고 ‘애국지사들’은 복수로 쓴 것도 의아하다. 무슨 의도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진지하게 검증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는 독립을 ‘요청’하는 문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금 독립했다는, 결기에 찬 ‘선언’이다.(독립 ‘선언’은 1918년 1차대전 승전국인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그에 희망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헌장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제1조)며, 당시의 현재 시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이 둘을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자유로운 민주국가’가 독립운동의 목적 혹은 미래적 염원인 것처럼만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의 정황상 온전한 자유와 독립은 분명히 미래적 희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가 조국의 독립을 ‘요청’하기 보다는 이미 독립했다며 당찬 ‘선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결기를 부각시키는 문장이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기념사에서 본격적으로 염려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유’의 개념이다. 3.1운동 당시 ‘독립’과 ‘자유’는 사실상 같은 의미이기에 선언서에서도 ‘자유’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때의 자유는 외세, 즉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3.1만세운동’이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3.1독립운동’이라는 특수성을 “자유로운 민주국가”라는 오늘의 언어와 쉽게 동일시하고 역사적 특수성을 추상화시킨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의도하는 자신만의 자유 개념으로 이어간다. 주지하다시피 대통령이 취임 이후 강조한 자유는 반사회주의적,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자유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관점은 이번 기념사에서도 대동소이해 보인다. 이것은 다음 문단에서 ‘세계적 복합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안보 위기’, ‘사회적 분절’, ‘양극화’,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 ‘경제’, ‘번영’ 등의 표현으로 이어가는 데서 추측할 수 있다. 104년 전 자유와 독립의 의미와 그 헌신적 정신을 좀 더 살리면서 진지하게 담아냈어야 했다. “그로부터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인 복합 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엄혹한 안보 상황,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 →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문단이다.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는 말은 대한민국 밖에서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일단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 국민이 자신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반납하고 스스로 노예의 길로 간 것이 아닌 한, 국권을 빼앗아간 세력에 대한 비판 정신은 담아냈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념사에는 ‘누구에게 국권을 빼앗겼나/누가 국권을 빼앗았나’, ‘누구에게 고통을 받았나/누가 고통을 주었나’의 문제를 아예 빼버렸다. 전 국민이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의도가 다분히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하다”고는 말하지만, ‘과거의 어떤 불행이 어떻게 반복된다는 것인지’가 막연하다. 3.1절 기념사인 만큼, 과거의 불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인 누구나 일본에 의한 피식민 경험을 떠올린다. 일본의 불법적 국권침탈이 불행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불행의 원인과 위기의 근원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한국 탓’인 것처럼 해설한다. ‘북핵 위협’ 탓에 불행이 올지 모른다며 안보의 문제를 북한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도 보인다. ‘북핵 위협’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것으로 봐서는 북한의 대남 공격이 우려된다는 말로도 들린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가능성과는 별개로, 현 정권의 정치적 관심을 더 많이 반영하다보니 ‘3.1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다소 거리가 멀어진 것도 분명하다. (이상의 두 문제점은 일본, 미국과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다음 문단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또 다른 문제는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면서, 어떻게 타개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 단순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으면, 가령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통합을 위한 공정한 복지정책이 중요하다든지 하는 말로 이어갔어야 한다. 기념사에 그런 낱말이나 표현이 전혀 없다 보니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인지’, 읽고 들으면서 구체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공허하다. “아울러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 당대에 독립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그 칠흑같이 어두운 시절에,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조국이 어려울 때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특히,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말은 지당하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도 옳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삶을 기억하자면서,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느닷없이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는 긍정적인 발언만 한다. 아무런 해설이나 연결점 없이 일본에 대한 최상의 평가로만 이어간다. 정말 오늘의 일본은 과연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가. 정말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편안하고 사이가 좋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수천만 한국인이 왜 지금까지도 일본을 의심하고 여전히 갈등하는가. 일본 정치인은 왜 한국을 무시하는 발언을 시시때때로 하는가. 일본 국민, 특히 유력 정치인들도 한국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런 이들도 있지만, 아닌 이들이 더 많다. 더욱이 “보편적 가치”란 무엇을 말하는지 와닿지 않는다. “칠흙같이 어두운 시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말과 “지금 일본은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라는 말 사이에 무언가 연결고리가 될만한 단어나 문장을 좀 넣었어야 했다. 느닷없이 일본에 대한 칭송이라니... 3.1절 기념식에서 행한 대통령의 문장치고 너무 허술하며, 정치외교적 관점과 속내를 더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세계적인 복합 위기”라면서 왜 일본, 미국과의 협력만을 중시하는지도 별 설득력이 없다. 6.25전쟁 기념일도 아닌, 3.1절 기념사에 왜 ‘북핵 위협’을 두 번이나 언급하는지도 잘 와닿지 않는다. 북핵 위협은 분명히 한반도 안보 위기의 주요 계기이다. 그런데 한반도 안보 위기는 단순히 한반도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인 “복합 위기”와 연결되어 있는 현상이다. 게다가 이 복합 위기의 배후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가슴 아픈 피식민 경험, ‘동아시아대분단체체’(이삼성 교수의 표현) 하에서 발생한 6.25전쟁, ‘분단체체’ 하에서의 남북 간 이념적 대립, 중국의 굴기와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충돌, 러시아의 부활 시도 등에서 비롯된, 세계적 신냉전의 기류와 같은 전 세계의 오랜 복합적 역사가 놓여있다. 세계 각국의 생존 전략, 강대국들의 영향력 확대 전략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이런 세계적 차원의 위기 상황에서 왜 일본 및 미국과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하는지 잘 납득되지 않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사인 만큼 그 힌트를 얻을만한 낱말이라도 제시하는 성의라도 보였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북핵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상황에 따라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굳이 3.1절 기념사에서 꺼낼 말 같지는 않다. 더욱이 정말 “북핵” 문제를 풀려면 북한과 밀착되어 있는 중국, 러시아와도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다. ‘동아시아대분단체제’의 특정한 진영 가령 미·일 편에 서는 것만이 과연 “세계적인 복합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라는 말인가. 미국이 한국의 국권 상실에 책임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더라도(미국은 1905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했다), 국권을 되찾으려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린 선열들의 사진을 행사장에 걸어놓고는, 일본 및 미국과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사진 속 선열들은 어떻게 볼까. 착잡하다. 그리고 어디는 ‘선열’로 단수형으로 표기하고, 어디는 ‘선열들’로 복수형으로 표기하는 식의 일관성 없는 문장도 적지 않은 문제다. 물론 단수형으로 써도 독자들은 복수의 인물을 연상한다. 그런 점에서 의미전달에 별 문제는 없다. 그래도 단수로 쓰든 복수로 쓰든 통일했어야 한다. 적어도 대통령의 기념사라면 흠잡을 데 없는 문장이어야 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동일 용어를 단수로 썼다가 복수로 썼다가 하면, 고민없고 성의없는 문장으로밖에 더 보이겠는가.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서 우리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 있는 기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우리 선열들의 그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 큰 틀에서 맞는 말이다. 그런데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은 어디를 말하는가. 우리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는데, 이때의 “세계시민의 자유와 공동번영”은 말 그대로 “세계시민의 자유와 공동번영”인가, 아니면 특정 진영에 유리한 자유와 그들만의 번영인가. “세계시민”에 북한, 중국, 러시아 등의 나라도 포함되는가. ‘세계시민’이니 ‘공동번영’이니 하는 말을 썼다면 이어지는 내용도 정말 인류 보편의 가치와 관련된 문장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미 “한미일 3자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이미 콕 집어 말해버린 바람에, ‘세계시민’, ‘공동번영’과 같은 말은 한낱 입에 발린 수사나 공허한 구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속내는 다른 곳에 두고 그럴듯해 보이는 공수표 몇 개로 논리적 일관성 없이 포장만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나만의 오해이고 오독일까.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그 노력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선열에게 제대로 보답하는 길입니다.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지키고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해서 자유, 평화, 번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 일단 첫 문장부터 손을 좀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과였습니다.”는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습니다.”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 그래야 개념적으로 더 온전하고 말하려는 의도도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번영’은 믿음이라는 내적 태도의 직접 결과라기보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제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실)에서 나온 문장치고는 많이 어설프다. 이번 기념사에는 “보편적 가치”라는 말을 세 번이나 담고 있다.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보편적 가치’란 전 인류가 옳다고 동의하고 공감하기에 가능한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를 의미한다. 정말 이런 의미에서 썼다면,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된다”는 당부는 진지하게 와닿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도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불분명하다. 어떤 자유를 의미하는지도 모호하다. 나의 자유가 타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는 제한적이고 상생적인 자유여야 한다. 독립운동도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 외세, 특히 일본에 대한 저항이었고, 남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지당하다. 당연히 타자의 자유를 침해한 데 대한 책임을 충분히 묻는 것도 당연한 요구이고 권리이다. 그런데 이번 3.1절 기념사에서 말하는 자유는 우리의 아픈 역사적 경험에 기반하면서도 국민과 인류에게 두루 통할 자유를 말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이룩한 번영이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과 믿음의 결과였다”며 “번영”을 주어로 내세운 것으로 봐서는 경제적 차원의 자유,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유, 더 좁히면 반사회주의적 자유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번영을 이끈 자유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부끄럽고 슬픈 역사”를 기억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나 정서와 거리감이 있는, 너무나 현실적인 언어이다. 게다가 “부끄럽고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행위와 우리의 역사를 그렇게 슬프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번영을 위한 자유’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역사와 정서를 생략해버리고 만다. 오늘까지도 꼬여있는 한일 관계는 쌍방이 균형감 있게 풀어야 한다. 3.1절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고 성찰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잊지 않도록 요청해야 하는 날이고, 쌍방 간 해결방안을 더 고민해서 제시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 쌍방적 균형감 없이, 세계적 복합 위기 및 북핵 위기에 일본과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일방적 제안은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과의 갈등을 다시 촉발시키고, 해묵은 남남갈등을 풀지 못할뿐더러, 일본과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만드는 발언들이다. 무엇보다 한·미·일 협력에 비례해 북·중·러와 척을 지는 방식은 한·미·일 협력의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한다. 이번 기념사는 3.1절이라는 슬프고도 자랑스러운 역사적 정신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일국의 대통령(실)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개념적으로 불명료하고 의미상 비약이 크며 전체적으로 안일한 문장들이 많다. 여러 걸음 양보해, 외교적 편향성이나 자의적 자유 관념 같은 것은 정권의 속성에 가까우니 교정에 시간이 걸린다 쳐도, 문장만이라도 격조있고 간결하며 논리도 어느 정도 완결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 국민이 보고 들으며 국내외적 영향력도 큰 기념사 아닌가.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3-03-22 | hrights | 조회: 876 | 추천: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