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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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교육과학기술부가 16일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한 보수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인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는 “교육자에게 가장 기본적인 상식은 ‘평가를 안 하면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이렇게 평가를 하면 교사들이 눈치가 보여서라도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사들이 평가 때문에 학생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열심히 가르친다는 지적은 학교의 현장을 몰라서 하는 얘기이다. 이번에 발표된 학업성취도의 결과를 보더라도 주요 과목 학력 격차의 주요인은 빈곤, 부유층 밀집도 등 사교육에 의한 격차로 나타났다. 나는 비교적 저소득층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강북에 있는 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10개 이상의 교과목을 배운다. 중간, 말 등 시험성적이 다른 학급에 비해 학급평균이 10점 이상 높은 학급을 지도하는 담임교사가 있었는데, 영어가 아닌 언어를 가르치는 교과목 또한 학급간의 점수가 10점을 넘어 20점 이상이 차이 나도록 교육시키고 있었다. 1년 동안 그 학급의 학생들은 많은 교사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내가 바라본 학생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급의 학생들보다 일찍 등교해서 자율학습을 했고 방과 후에도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면서 교사가 실시하는 평가 시험에 통과해야만 귀가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사의 과목을 학습하는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었다. 그 교과목 시간을 위해서 다른 교과목 시간에 몰래 공부를 하고, 심지어 그 교과목 시간이 지난 후에 등교를 하거나, 교과목이 들어있는 날에 결석하는 학생도 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그 교사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학년을 마치고 올라간 학생들은 새 담임교사와의 적응문제로 더 많은 방황을 하기도 했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지난 16일 오전 정부중앙청사에서 지난해 10월 치른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순일 광주교육감, 안 장관, 공정택 서울교육감, 신상철 대구교육감.       사진 출처 - 한겨레    관리자(교장)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유능한 교사로서 교원평가에 당연히 최우수교사에 속했다. 많은 학부모들이 중간·기말 성적표 한 장으로 자녀의 가치를 가늠 질하고 교사를 평가한다면 그 담임교사는 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교사일 것이다. 동료교사들도 그 교사의 교육적인 열정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선행학습과 평가에 의해서만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학생들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전인교육이 중요한 학교에서 성적에 의해서 평가되는 학생들 보다, 학생과 학생을 둘러싼 환경(부모, 친구 등)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교사로서 학생이 무엇에 관심 있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며, 남과 소통하는 방법을 익혀 행복하고 창조적인 인생을 준비하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진보연대 장대현 대변인은 “우리나라 안에서 서열화하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경쟁력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며, 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획일화해 평가하기보다는 다양한 방면에서 발현되는 창조적인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는 8학년까지 전국 단위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고 한다. 공부를 빨리 익히는 학생, 공부가 늦되는 학생이 있기 때문이란다. 교사들이 평가해야 할 학생은 성적으로 평가된 학생의 모습 보다는 어떤 꿈이 있는지와 어떤 모습을 가졌는지를 생각해야 하진 않을까 좀 늦되는 학생도 기다리는 여유도 가지면서 말이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94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필자가 교육대학원에서 강의하는 ‘인권과 교육’ 과목에서 꼭 등장하는 단골 주제 중의 하나인 ‘체벌'은 인권과 늘 부딪히면서도 뾰족한 해결이 아직 제시되지 않는 문제이다. 요즈음의 용산 참사를 보며 필자는 ‘교육’을 위해서 ‘체벌’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와 ‘법치’를 위해서는 ‘강제진압’이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묘하게 상통한다 싶어, 서글픈 생각이 먼저 들고,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과 ‘공권력’을 투입하는 이들의 그런 논리가 참으로 미워진다. ‘논리’가 밉지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우선, 정부는 최근 용산 참사를 자초한 ‘강제진압’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국민의 정당한 요구와 생명마저 빼앗으며 이를 법·질서·공권력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연대를 외부세력, 테러집단, 좌파로 규정하고 추모집회까지 끝까지 추적하여 주동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전열을 다지고 있다. 이러한 적반하장의 발상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검찰, 경찰, 그리고 청와대에서 지휘권을 행사하는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이들이 청소년 시절, 곧 군부독재시기에 받은 교육, 즉, 국가안보·반공·경제발전 이데올로기로써 온 국민을 세뇌하고 통제했던 그런 교육 탓 아닐까? 그리고, 시위세력 진압에 꽤나 자주 동원되면서 막강한 위용을 과시하던 군대의 논리, 즉, 아군 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분법, “시위 세력의 배후엔 분명히 불순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라는 근거 없는 확신,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식의 막무가내 명령, “초전박살!”을 구호로 외치며 속도전을 강조하던 작전, 그리고 제대하고도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의 뇌리와 감수성과 의식구조 깊숙이 남아있는 그런 군사문화 탓 아닐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와 유가족들은 9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앞에서 '오늘 검찰은 죽었습니다'는 검은 현수막과 고인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용산철거민 참사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법치주의의 근본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며 그것을 위해 통치자는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선 안 되고 법이 정하는 바에 의해 견제와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일진대, 그것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 배웠기에 이번 강제진압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철거민들의 목숨을 빼앗고도 정부와 검찰, 경찰은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국민들에게 “할 테면 해보라! 한번 끝까지 가보자!”라고 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학생들이 등교하는 학교 정문에는 여전히 복장위반 혹은 지각에 대한‘응분의 대가’로 기합과 체벌이 행해지고 있다. “선생님에게서 맞는 것은 부모님에게서 맞는 것처럼 구타가 아니라 사랑의 매이다.”라는 훈육 이데올로기가 계속 주입되며, 일류대 입학을 위해서는 행복추구권, 신체의 자유, 휴식의 권리 등의 기본적 인권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며, 학생들을 인권의 주체가 아니라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입시독재’라고 해야 하나? 필자의 수업을 듣는 교사들은 체벌문제에 대해 공통적으로 고민들을 하고 있다.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리지 마라”고 하지만 한국 교육현장에선 체벌이 불가피하다고 하면서도, 모두들 체벌이 아닌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다. 이젠 학생이 맞는 게 아니라 교사가, 때로는 학부모에게, 심지어는 학생에 의해 구타당하고 있으며, 체벌을 안 하려고 교사가 노력하면 오히려 학생들이“재는 좀 맞아야 하지 않아요?”라고 반문하고, 잘못을 저질러서 꾸중 듣는 학생들은 “알았으니까 빨리 때리세요.” 아니면, “벌점 먹느니 차라리 맞을게요.”라고 오히려 체벌을 재촉하기도 한다고 전한다. 그러면, 체벌의 대안은 없는가? 교사들은 교실 청소, 화장실 청소, 혹은 영어 시 구절 외워오기 내지는 한국 시 몇 편 외우기 등을 대안으로 시도한 경험을 말한다. 그런 것들도 좋겠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래도 가장 좋은 대안은 학부 인권수업 도중에 어느 학생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그 학생의 경험담인즉슨, 고교 시절에 잘못했다 하여 교무실에 불려가게 되면 담임교사는 그 학생에게 아무 꾸중도 않고 그냥 차 한 잔 같이 마시기만 했고, 또 불려가게 되면, 그 주말엔 그 학생과 함께 등산을 가서 역시 꾸중과는 무관하게 인간적이고 정겨운 얘기들만을 나누었다 한다. 그 후 그 학생은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학생에 대한 ‘믿음’과 교사와 학생 사이의‘소통’이 그 학생을 바꾸었고 믿음을 주면 학생은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로써 보답한다는 것, 그리고 학생과 소통하고자 할 때 그 학생은 비로소 스스로가 인권의 주체로 대우 받음을 느끼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 더 나아가 교사에 대해 마음 깊이 감사와 존경을 갖게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 ‘벤허’의 그 유명한 전차 경주 장면이 떠오른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채찍 없이 달리게 하는 벤허가 네 필의 흑마가 끄는 전차를 고성능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쳐서 질주하게 하는 적장과의 결전을 앞둔 전날 밤, 그는 마구간으로 찾아가 말들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아마도 “너희를 믿는다,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속삭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날, 벤허와 네 필의 백마는 가혹하게 채찍을 맞으며 분을 못 이겨 악에 바쳐 질주하는 흑마들과 벤허의 전차를 부수려 반칙을 도모하는 적장을 결국 이긴다. ‘믿음’과 ‘소통’이 ‘체벌’보다 훨씬 낫고 위대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지금 새삼스레 든다. 아울러, 필자는 오래전 ‘모래시계’라는 TV 드라마에서의 장면과 대사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법고시를 치르겠다고 내려 온 아들(박상원 분)에게“넌 잘 할 거야. 내가 알아.”라고 격려하던 그 아버지의 그 말씀은 아들을 훌륭한 검사로 키워준 명언이었다. 교육 현장에 만연한 “맞아도 싸. 맞아야 싸.”라는 식의 체벌 문화, “학생이 무슨 인권? 인권타령은 명문대 들어가서나 해!”라는 식의 입시 풍토, 성적 떨어져서 유서 쓰고 자살하는 초등학생이 생겨나는 교육, 철거민들이 불에 타 죽어나가도 끄떡없이 몰아 부치는 공권력 투입과 재개발 정책, 이런 교육은 이미 교육이 아니며, 이런 공권력은 이미 공권력이 아니다. ‘체벌’이 아직 행해지는 것을 국민 앞에, 학생 앞에 부끄러워하는 그런‘교육’과, ‘강제진압’이 아직 벌어지는 것을 국민 앞에, 철거민 앞에 부끄러워하는 그런 ‘법치’를 제발, 제발 보고 싶다. 그리고 ‘교육’과 ‘법치’를 바로 잡고자 투신하는 이들과 함께 외치고 싶다. “할 테면 해보라! 한번 끝까지 가보자!”라고.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00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와는 아주 간략한 인연이 있다. 내가 경찰청에 출입할 때 그는 경무기획국장이었다. 경무기획국장이라는 자리가 주로 내부 살림을 챙기는 자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유독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보였다. 경찰보다는 경제부처 공무원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라고 할까. 일본 파견 생활을 오래 했다는 그의 자기소개가 합리적인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서울경찰청장으로 승진한 그는 갑자기 기존의 자기 이미지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승진 후, 유례없이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내던 그의 경찰청장 내정 소식이 들려올 무렵, 용산 참사가 터졌다. 용산 참사 직후, 청와대가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을 철회할 것이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대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조중동을 중심으로 철거민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기사가 쏟아지더니, 수사를 시작한 검찰은 화재원인을 철거민이 제공했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에 출연해 경찰청장 내정을 철회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수사가 끝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불법 폭력 행위를 일삼다 스스로 죽은 걸 왜 경찰이 책임지나’라는 선언으로 들렸다. 결과적으로 예상이 들어맞아 도리어 참담했다. 며칠 전, 알고 지내는 한 대기업의 홍보담당 과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용산 희생자 추모 미사에 참석하려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외모를 가진 그의 평소 성향을 생각하면 뜻밖이었다. 문화·예술에 관한 주제에서는 얘기가 잘 통하다가도 사회적인 주제, 예를 들어 조중동을 거론하면 무척 부담스러워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정권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이제 못 참겠네요. 임계치에 다다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30일 밤 서울 양천구 목동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대통령과의 원탁대화에서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부터 탤런트 박상원씨, 조국 서울대 교수, 김형민 에스비에스 부국장, 이 대통령, 정갑영 연세대 교수, 김민전 경희대 교수. 청와대 사진기자단         사진 출처 - 한겨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 정부가 국민을 싸움의 대상 혹은 제압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번 무너지면 계속 밀린다.’는 식인데, 이건 정치이념이라기보다는 전투 개념에 가깝다. 조선일보 칼럼조차 사마천의 표현을 빌려 “각박한 법치”라고 우려할 정도다. 국민을 적으로 돌리고 싸우려 드는 정부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백낙청 선생은 “내년 봄에 대규모 군중시위가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막기는 어려울 듯하며, 정권이 하기에 따라 겨울이 채 가기 전에 그런 사태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예견했는데, 이 정부는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는 듯하다. 사실 집권 2년차에 대규모 군중시위란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예상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이 정부의 일관되고 비타협적이며 투쟁적인 노선 때문이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새삼 들이댈 필요도 없다.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깎아주고, 서민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이 정부의 세금정책은 조선 후기의 삼정문란을 연상케 한다. 부패한 집권세력과 아전들의 학정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란을 일으켰고, 결국 나라가 망하는 주요 원인이 됐다. 부자와 일부 집권세력만을 위해 일반 국민과 가난한 서민들을 짓밟는 철권통치는 반드시 거대한 저항을 부르게 돼 있다. 용산 참사는 그 신호탄이다. 여기에 권력형 부패 스캔들마저 터진다면 전 국민적 공분이 들불처럼 번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정부야말로 체제 위협 세력이 아닌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가리타니 고진은 역사가 60년을 주기로 반복된다고 했지만, 대한민국의 정치역사는 30년을 주기로 반복되고 있다. 박정희가 비극이었다면 이명박은 희극일까.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건 나만의 감상(感傷)일까.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83 | 추천: 0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들어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이런 물음을 대할 때마다 대번에 머릿속에서는 이른바 ‘통박’부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왜,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 데는 필자가 종교 신문에 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고는 하나 필자의 시각이 그리 객관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들 묻는 지 그 의도가 궁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단순해서 어쩌면 묻는 이가 실망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잘 모르는 거지요.”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 그렇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 미국마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아니 눈치 보게끔 만드는 유대인들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 그래서 한때 그 위세가 부럽기까지 했던 이스라엘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분수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다가 무슨 일 당할 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정도만 나온 이들이라면 유대민족이 창조주께서 택하신 선민이고 그 때문에 그들의 선민의식이 대단하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필자도 중학교 도덕시간에 중동전쟁이 터지자 아랍인 유학생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귀국을 안 하고,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는 전설 같은(?) 중동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애국의 표상인 양 귀가 닳도록 들은 기억이 있는지라, 더구나 우방인 미국과 절친한 대단한 나라라, 찬양까지는 아닐지라도 그 비슷한 수준으로까지 우러러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과대 포장된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며 그 ‘선민의식’이 안타까울 때가 적지 않다. 특히나 내면과 실재에서 드러나는 괴리를 대할 때면 인간적으로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주한 이스라엘 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갈 카스피(Yigal Caspi) 대사의 경우가 한 예가 될 만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으로 사상자가 1000명을 훌쩍 넘어선 데다 유엔 시설까지 폭격으로 파괴돼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센 가운데서도 카스피 대사는 국내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이 팔레스타인 무장정치조직인 하마스 탓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카스피 대사를 거론하는 것은 3년 전 쯤 그가 이스라엘 외교부 동북아시아국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스라엘 현지에서 만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는 만면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웃음으로 먼 이국에서 온 이들을 환대하던 평화주의자였고 자신은 이스라엘 땅에서 5%도 되지 않으면서도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름을 몇 번이고 강조했었다. 만찬 중 자신은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유대인이 먹지 않는다고 하는 돼지고기나 새우 같은 것도 먹고 필요에 따라서는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까지 얘기했다. 필자가 놀랐던 것은 비록 공개되지는 않을지언정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스라엘 국민 대다수가 근본주의적인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선선히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나는 유대인이지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유대인이 아니다”고까지 했다.       이갈 카스피 대사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런 그의 태도에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분리장벽 설치문제가 테러에 대한 이스라엘 국민들의 과민반응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연민의 정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이번 사태는 전쟁도 아니고 하마스를 제거하는 군사작전일 뿐”이라고 하니 몇 년 새 영판 딴 사람이 된 것인지 어수룩한 우리가 속았던 건지 헛갈린다. 이도 아니라면 그가 그토록 아니라고 했던 5%도 안 되는 ‘근본주의자’들에 끌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해 자신의 신념이나 의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기억과 현실의 혼재 탓일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중동 분쟁에 대한 질문은 결국 “당신은 둘 가운데 누구 편인가” 하는 조금은 과격한 물음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민족이 유대민족이니 이스라엘 편이요”라고 하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모습일까. 하지만 유대인이나 아랍인 모두 한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된 민족이란 성서상의 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이스라엘이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이라는 내 의심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더불어 ‘나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나’ 고민하시는 하느님의 혼란도 좀 생각해줄 때가 되지 않았는지 이스라엘에 묻고 싶어진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87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총 맞은 것처럼”이란 노래가 있더군요. 방송에 하도 많이 나오니 아무래도 제목이 수상해서 가사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헤어짐의 아픔이 총 맞은 상처처럼 가슴을 뚫어 추억이 흘러넘친다는 내용이지요. 그 노래를 무심히 흥얼거리는 아이에게 슬쩍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총 맞으면 넌 어떨 것 같니?” 전쟁 기념관에 갔더니 갖가지 무기가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구한말 의병들이 썼다는 날카로운 죽창을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친구가 사진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또 슬쩍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저 죽창에 찔리면 넌 어떨 것 같니?” 각종 언론을 통해서 쏟아지는 전쟁보도를 보면 마치 전쟁 기념관에 들어가 잘 만들어진 전쟁 찬양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이 전쟁의 정치적 배경이 무엇인지, 어떤 무기를 동원해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였는지, 서로간의 군사력을 비교 분석하고 누가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에 대한 예상 답안까지 내놓지요. 덕분에 우리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어느 마을을 포격했는지, 아파치 헬기가 얼마큼의 포탄을 떨어뜨렸는지를 알고 몇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폭격을 당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죽어 갔는지의 과정을 설명해주는 언론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TV에서 포연에 휩싸인 폐허의 도시와 한방에 웅크리고 기도하는 겁에 질린 가족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금방 숨이 넘어간 듯한 아이의 머리를 무릎에 받치고 뺨을 비비는 어머니의 비명소리엔 눈물이 나기도 하구요. 그러나 그뿐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전장에서의 주검은 그 형체가 온전한 것만으로도 축복일 만큼 비참합니다.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 제멋대로 펄떡이는가 하면, 쏟아진 내장을 뱃속에 주워 담으며 위생병을 부르짖는 병사가 있고, 단 한방의 총성에 죽음의 고통조차 느낄 사이도 없이 풀썩 쓰러지는 여인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피 흘리는 젖가슴을 울면서 파고드는 어린 아기도 있습니다. 인종청소라는 섬뜩한 목표점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은 도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가자지구 남쪽 라파 난민촌까지 공습하는가 하면 가자 씨티에 있는 유엔건물도 폭격했고 급기야 시가전까지 감행했습니다. 사망자가 1000명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죽어갔는지를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 뉴스를 보거나 신문만 뒤적이는 것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 졸일 때가 많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전쟁기념관에 갔습니다. 구석기 시대에 쓰던 돌도끼나 외날찍개 등은 이름의 살벌함에 비해 외려 앙증맞습니다. 잘 벼려진 삼인검, 사인참사검은 내 심장을 세 번쯤 포개 놓고 뚫어도 뚫릴 만큼 날카롭고 길쭉합니다. 한국전쟁 때 썼던 총포류부터 현대화된 각종 최신장비까지 5천년 역사 속의 무기들을 총 망라한 듯 보였습니다. 죽임의 역사를 한데 모아 놓은 것입니다. 저 무기들로 인해 나의 사지가 찢기는 듯한 상상을 하며 몸서리치는 순간 어린아이하나가 전시된 천자총통 위에 엎드려 포 쏘는 시늉을 하고 엄마는 그 모습을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합니다. “어떻게 사람을 죽였나”를 전쟁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아이의 자연스런 행동과 부모의 모습에서 미래의 또 다른 전쟁을 예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몇 해 전 미군의 개(犬)가되어 음부를 드러낸 채 그들의 군화를 핥는 아브그레이브 수용소의 이라크 포로를 우리는 기억 합니다. 그러나 윤간 뒤 생매장 당한 여고생과 젖가슴이 도려진채 나무에 묶여 표창 연습의 대상이 되었던 젊은 빨치산의 아내와 딸이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음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몽키 스패너에 혓바닥이 뽑히고 손톱과 발톱 밑에 대못을 박았으며 팔은 팔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사지를 찢어 전봇대에 전시했던 일이 (이산하의 시 한라산에서) 우리의 역사에 여전히 한으로 남아있음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빨치산 사내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그 어미에게 물리는 참혹한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음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전쟁을 기념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한다면 전쟁은 “어떻게 사람을 죽였나”가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죽었나”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폭격으로 죽은 아들을 묻고 돌아온 새벽. 또 다른 폭격으로 이미 숨져있는 딸아이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아비의 심정으로 피눈물의 역사를 선명히 기록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중의 역사입니다. 전쟁은 “지배 계급”에 의해서 준비, 결정, 조직되고. 전쟁에 나가서 싸우고, 전쟁을 치르며, 고통 받는 것은 바로 일반 민중이기 때문입니다. (베너 빈터스타이너)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음보살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어진 미소를 중심으로 양쪽에 각 20개의 손이 25개의 다른 세계를 계도하니 합이 천수(千手)요, 그 손에 눈이 하나씩 달려있으니 천안(千眼)이 됩니다. 그 많은 눈으로 뭇 중생들의 고단함을 살피고 그 많은 손으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지옥불에나 떨어질 가난한 영혼들까지도 살핍니다. 그러나 총탄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아이와 군인을 구별하지 못하고. 병원과 군수공장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유엔 인권 이사회의 이스라엘 규탄 결의안에 기권을 하고 내놓은 정책과 추진하는 입법마다 민생을 옭아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정부도 눈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입법을 꿈꾸면 어떨까 상상 합니다. 꽃이 준비 되지 않으면 그 어떤 싸움도 할 수 없습니다.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고 했으나 정 그럴 수 없다면 꽃으로만 사람을 때릴 수 있습니다. 만약 법을 어길 시에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 자연생태교육 몇 년. 평화교육 몇 년 등의 형량을 수행해야 합니다.        “저 총탄이 우유공장과 탱크를 구별한단 얘기를 난 듣지 못했네       총탄이 날아온 그 숫자만큼 나무를 심어요 평화의 나무를       포탄이 날아온 그곳을 향해서 노래를 불러요 평화의 노래를“                                                -졸작 나무를 심는 사람들 중에서   물론 천수관음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더구나 미디어 관련 7대 법안이나 사회개혁으로 포장된 반인권 법안에 골몰하고 있는 국회에서 언감생심 이런 꿈이나 꾸겠습니까?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50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정치인과 종교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받든다 하고, 종교인이 하늘의 뜻에 따른다고 하는 ‘형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자신보다는 국민과 하늘을 앞세우는 듯 한 모습에서 이들은 참 닮았다. 그러면 그 받들고 따르는 ‘내용’은 어떨까? 국민과 하늘이란 서로 다른 개념일 듯싶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다. 전 국민이 정치 평론가인 마당에 나라고 정치 현실 판단에 한 몫 끼지 못할 이유도 없겠거니와, 나름 종교 전문가이기도 한 내 눈으로 보건대, 국민과 하늘의 그 실질적 내용이 정말 다른지는 크게 의심스럽다. 국민의 뜻과 하늘의 뜻 운운하는 언어는 외견상 다르지만, 정말로 받들고 따르는 것은 사실상 자기의 ‘욕망’일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받든다’는 미명하에 사실상 그 이름을 ‘팔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가 많다면 그것은 억측일까. 행여 ‘욕망’이라는 원초적인 표현이 거슬린다면, 그저 자신의 뜻이라고 해도 좋다. 국민/하늘의 뜻이라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사실상 자신의 뜻일 때가 태반이다. 흔히 자신의 뜻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뜻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 아닌 것을 가져오는데, 그것이 자신을 자신되게 해준 존재론적인 근거, 정치와 종교의 용어로 하면, 국민과 하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은 아닐 것이고, 모든 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도 아닐 터이다. 그러나 비록 의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뜻과 하늘의 뜻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받들어져야 할 국민이 이렇게 바닥까지 무시될 수가 있겠고, 다 같이 하늘의 뜻을 따른다면서 종교인들의 아집과 종교간 갈등이 어찌 이리 끝없을 수 있겠는가.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 개정 강행처리 시도에 반발해 파업을 계속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6일 저녁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언론장악저지 민주주의 수호' 촛불문화제에서 언론관계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 자기의 뜻과 국민/하늘의 뜻은 구별될 수 있을까. 있다.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것인지, 하늘의 이름을 ‘파는’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준과 증거가 있다. 정말 국민의 뜻을 받들려면, 정말 하늘의 뜻을 받들려면, 그렇게 받드는 주체의 뜻은 스스로 발아래 내려놓고, 욕망은 깨끗이 비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놓고 비워진다면, 실제로 손해가 올 가능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설령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기꺼이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국민/하늘의 뜻을 받든다면서, 그 실제 목적과 결과가 자기 이익의 확대 쪽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분명 욕망의 증거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던 권력이 주어질 수도 있고, 뜻밖에 재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의외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받든다면서 결국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고, 하늘의 뜻에 따른다면서도 무언가 금력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국민/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듯 분명한 사실이자 원리이다. 물론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실제로 받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때의 국민은 극히 일부이거나, 자신의 뜻/욕망을 정당화하도록 자의적으로 해석된 국민이다. 당연히 국민 전체가 아니다. 종교인이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있지만, 그 때의 하늘 역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해주도록 투사된 하늘일 때가 많다. 하늘 자체가 아닌, 자신의 뜻에 맞게 해석된 하늘인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맞음직한 일부 국민의 뜻을 전체 국민의 뜻이 되도록 조작하기 위해 정치인이 손대고 싶어 하는 분야가 언론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본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욕망을 하늘의 뜻이라며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인은 자신의 욕망에 어울리는 경전의 구절을 본래 맥락과 관계없이 뽑아 내세운다. 경전에 그렇게 써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자신 안에 가두고, 결국은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런 식으로 국민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하고, 하늘의 이름으로 전쟁까지 벌인다. 이러한 엄청난 착각도 오래 습관이 되다보니, 양심의 가책도 받지 못한다. 가책을 받을 양심조차 실종되었달까, 아니면 두터운 무지로 인해 전혀 볼 수 없게 된 것이랄까. 물론 모든 정치인과 종교인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람과 하늘을 받드는 이들도 도처에 많겠기 때문이다. 세계적 추세 운운하며 이른바 코드가 맞는 거대 미디어 재벌을 탄생시켜서 결국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 및 확대하려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들의 추태, 하늘의 이름으로 이웃을 정죄하고 저주하면서 스스로 하늘에 자리에 오르려는 종교인들의 교만을 곳곳에서 보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았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35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시 교육청 앞 농성장에서 열리는 촛불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유난히도 추운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7명의 부당 해고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모인 선생님들이 냉랭한 바람과 창백해 보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집회하는 모습이 다소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 동안 온기를 제공했던 가스난로에서 정겨운 나무 난로로 바뀌었다고 너스레를 떠는 해고자가 떨고 있는 동지를 난로 가까이에 밀어 넣으면서 촛불을 드느라 언 손을 녹이라고 권합니다. 앞에서 발언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득해 지면서 내 머릿속에는 10년도 더 된 지난 과거의 일이 떠오릅니다. 나의 아득했던 해직 시절이. 그 때도 지금의 해고된 선생님들처럼 추운 겨울에 아이들과 헤어졌습니다. 6학년이 아닌 1학년 아이들과. 행여 학년 마무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생각에 이사장집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현실을 깨닫고 절망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울부짖던 총각선생님의 눈물과 절규! 해마다 내게 주어졌던 아이들을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청천벽력 같던 느낌! 세상이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충격! 횡령을 한 사람보다 그것을 폭로한 사람에게 더한 징벌을 가하는 이 사회의 비상식적 잣대가 10년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것에 대하여 절망감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한 젊은 해직 선생님의 반 아이들이 촛불집회에 각자의 엄마와 함께 왔더군요. 그 또랑또랑한 눈망울에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부릴 수 있는 철없음이나 치기도 없었습니다. 그저 잘못된 일이고 그래서 부르짖었음을 당연히 여기는 당당한 눈빛이었습니다.       해직된 정상용 교사의 서울 구산초등학교 6학년 8반 학생들이 지난 22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정상용 교사 (윗줄 중앙)와 역시 해직된 최혜원 교사(아랫줄 오른쪽)와 함께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토사구팽! 현 서울시 교육감이 두려워할만한 사자성어입니다. 지속적으로 필요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분노를 자아내게도 하지만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판단이 가능한 일들을 너무나도 대담하게 비상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는 썩소(썩은 미소를 줄인 말로 비웃는 듯 한 미소를 뜻함)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그들의 운명이 보입니다. 선거를 치른 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는 승리감에 젖은 오만한 태도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삶의 과정 속에 있으므로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하더라도 늘 지나치면 문제가 되더군요.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언제나 깨달음을 주지만 지금의 정부는 일장춘몽과 같은 이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사필귀정! 이 정부에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사회는 변화해야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그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흘러가야 하는 지향점을 향해 도도하면서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요. 생뚱맞을지 몰라도 '진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또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 속에서도 이 사회는 진보되어야하고 진보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법무부 홈피에 올라온 임수빈 검사를 응원하는 댓글들이나 엄마와 함께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아이들의 결연한 눈빛에서 그들은 알아야합니다. 와야 할 미래는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온다는 것을요! 아무리 급속 후진을 하고 장기 집권을 위한 포석을 여기저기 깔아놓아도 그 방향성을 되돌릴 수 없음을 그들은 깨달아야합니다. 당신들은 과거를 살고 있지만, 아이들은 미래를 살고 있고 우리 모두는 미래를 향해 살고 있다는 것을요. 2008년의 마지막 날에 타종으로써 새해를 맞이하는 보신각에서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촛불을 저마다의 손에 들고서. 그래서 누구나 한 살 더 먹어야하는 12월의 마지막 밤 북악의 누군가는 어느 때보다 두려운 새해를 맞이하게 되겠지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음을 지금의 이 정부만 제외하고 모두 다 알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밝게 하는 촛불을 무서워하는 코미디 같은 현실이 마음 아프지만 한 번 더 힘주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워 눈앞을 볼 수 없어도 수사자처럼 무서워 날카로운 발톱을 고추 세워도 그 밤이 지나면 새벽은 오고, 새날이 밝아 오는 것임을요!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24 | 추천: 0
정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단지 전체가 종부세 부과대상인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채가 평균 10억 원 이상은 되니 아파트 1동은 1,000억 원, 단지 전체로 보면 1조가 훌쩍 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관리비 경감을 위해 경비 인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 대신 현관에 카드 인식키를 설치하기로 했다. 카드 인식키 설치 공사를 지켜보는 경비 아저씨들의 모습은 처량했다. 공사가 끝난 후 경비아저씨들 절반이 사라졌다. 주로 평소에 불친절하다고 찍힌 분들이었다. 기존 경비원 감축으로 이 아파트 주민들은 얼마나 이득을 보았을까. 이 아파트는 원래 아파트 두 라인 당 한 명의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두 라인이면 총 60세대니까 세대당 한 달에 만 몇 천원 남짓 경비원 급여를 분담해 왔을 것이다. 그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것이니 한 달에 6~7천 원 정도 비용이 줄어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가 1조가 넘는 단지 주민들이 매월 6~7천 원 정도를 아끼기 위해 여러 가장들의 생업을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정말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개별경제주체가 합리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사회 전체적으로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경비원 감축은 개인적 비용을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매달 받아보는 관리비 영수증에는 줄어든 액수만 기재되어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을 것이다.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증가만이 문제가 아니다. 실업은 소비감소를 가져오고 소비감소는 경기침체를 경기침체는 자산가격하락을 수반한다. 조금 과장일 수 있겠지만 아파트에서 경비원을 줄인 행동이 연쇄과정을 거쳐 그 아파트의 가격하락을 가져온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말이다. 경비원 감축은 개인적 비용을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정말 걱정되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 아파트 주민들이 한 경비원감축 같은 일을 계속 벌이는 것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최근 60세 이상에 대하여는 최저임금을 낮추고 최저임금 이하를 지급할 수 있는 수습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방안으로 최저임금법을 개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최저임금 이하로도 일하겠다고 하는 노령인구가 최저임금법 때문에 제대로 고용될 수 없기 때문에 고용확대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경비원감축 문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최저임금수준을 낮추더라도 노인층 고용이 확대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현재 고용되어 있는 60세 이상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역할을 할 공산이 크다. 루즈벨트 대통령 따라 하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정책을 펼쳐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뉴딜정책의 근간을 이룬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의 핵심조항 중 하나가 노동3권과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뉴딜을 대규모 토목공사로만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경제위기의 폭과 깊이를 더 넓고 깊게 만들고 말 것이다.   정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12 | 추천: 0
홍승권/ 인권연대 운영위원 드디어 이마트를 비롯한 전국의 대형 마트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국민들의 불안감 및 여론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일제히 판매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위험에 둔감한 사람들과 싼 가격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게 구매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의 식탁을 넘보게 될 미국산 쇠고기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가끔 장례식장에 문상 갈 때면 어떤 국이 나오는 지를 따져보고 먹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앞으로는 식당 뿐 아니라 남의 집에 초대될 때도 식탁 메뉴를 잘 살펴보아야 하게 생겼고 아이들이 친구 집에 놀러갈 때를 대비해 더욱 단도리해야 하게 생겼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처럼 ‘안 먹으면 그만’인 권리만큼은 확실히 지키고 싶다. 대형마트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11월 27일 오후 서울 이마트용산점에서 시민들이 수입육 코너에 진열된 미국산 쇠고기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나 위탁 급식으로 운영되는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군대에서 복무하는 군인들, 그리고 숱한 대형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해야 하는 많은 근로자를 비롯한 국민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과 이명박 대통령의 치욕스러운 조공외교의 문제를 떠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미국에서 유통되는 쇠고기 중 20개월 이내의, 믿을 만한 도축장 산 쇠고기가 프리미엄 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에서 근무하는 주한미군들도 20개월 이내의 쇠고기만을 먹는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과연 인간들의 탐욕과 오만의 끝은 어디까지인지 아연했다. 김성이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지금까지 30개월이 안 된 소를 먹는 줄 몰랐다"며 "사람들이 너무 잔인해진 것 같다. 소도 엄연한 생명체인데 10년은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무지한 발언이 오히려 인간적이기까지 한, 웃지 못 할 현실이다. 소에게 20개월이라면 사람으로 치면 한창 십대의 나이이다. 30개월이라고 해 봐야 20 전후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육우농장에는 사람으로 치면 삶의 지혜와 도리를 가르칠 경륜 있는 어른 소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온통 십대와 20도 되기 전의 혈기 넘치는 젊은 소들이 사람들의 식량이 되기 위해 사육되다가 생을 마감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소도, 짐승도 어엿한 생명체이고 자연의 섭리 속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가축 사료를 먹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자연이 부여한 수명에서도 아주 짧은 생만 살아야 하는 소가 미국에서만 연간 수천 만 마리나 된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인가 말이다. 제안컨대 광우병이니 뭐니 할 것 없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미국산 쇠고기를, 아니 국내 유통시스템도 믿을 게 못 되고 또한 한우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니 아예 이 기회에 쇠고기 소비를 중단하는 것이 그나마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처신이 아닐까 한다. 촛불의 진정한 승리는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국가 권력 및 정책에 대하여 보이콧운동으로 확산되어야 가능하리라 믿는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84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7년 9월부터 약 200일 동안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 측에 정규직으로 자신의 지위를 승격시켜줄 것을 요구하며 여의도에 있는 회사건물 근처에서 농성시위를 벌였다. 자기들 자리가 아웃소싱 직원들로 대체되는 것에 항의하는 농성이었다. 결국 정부는 코스콤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장기 농성장인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앞 천막을 철거함으로써 명백한 노동반대 행위만을 보여주었고, 농성을 벌인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랜드 노조원들은 모두 불법행위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벌금부과를 받았다. 그런데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대기업 노조와 정규직 직원들의 침묵이었다. 겨우 체면치레의 말이 조금 오가고, 몇몇 인권단체들의 피켓동조가 있었을 뿐,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이들의 아픔에 동참한 정규직 노동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기업 노조들은 자기들의 임금 인상과 혜택 증가에 목을 맨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종종 자기 회사가 가진 취약한 소유권 구조와, 소규모 납품업체 및 그들 회사의 직원들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경영진의 운영방법을 간과하는 것 같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노조 지도자들은 자기 회사의 고용 시스템을 조종하기 위해 종종 경영진과 결탁하여 불법 자금을 챙겨 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 대기업체의 대다수 노동자들은 높은 보수를 받고 있으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개 보험혜택도 없고 적절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부 지방 신문 사설에서는 이를 대기업 노조들과 경영진간에 일종의 은밀한 결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이들은 모두 경제 부담을 중소기업 특히 국가 초대형 산업체에 납품하는 회사들의 정규직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시스템을 창출해 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소규모 회사 노동자들의 희생 결과 대기업의 노사관계가 안정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소규모 납품업체의 불만은, 자기 회사의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올려줄 경우 납품 받는 대기업 측에서 자기들이 추가이윤을 남겼거나 납품 물건의 가격이 인하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부유층의 수는 늘어나는 반면 중산층의 수는 줄어드는 요인일까? 이 현상이 중산층 사람들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무금융연맹과 코스콤비정규지부가 코스콤의 성실 교섭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노동부의 통계에 의하면, 2007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총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48.2%에 불과하다. 또한 주요 회사들에 납품하는 업체들의 직원 평균 임금은 그들 의뢰업체의 정규직 직원들의 60%에 불과하다. 정부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미국 및 유럽의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비율과 비교해볼 때 그 수가 높은 문제에 대해 노동정책에서 거론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한국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아니며, 그들 중 적어도 4분의 1은 저임금을 받고 있다. 또한 정부는 기업 친화적이 되길 원하지만 외국 자본가들을 몰아내는 경향이 있는 노조의 호전성 및 노사 간의 부정직성과 불투명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008년 초기에는 한국 노동 인구의 10%만이 노조에 가입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 귀족”이라 부르는 행위 뿐 아니라 노조 세력의 호전성과 일부 대기업 노조의 정치적 동기를 띤 노동쟁의는 노동계에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스스로 약자라 생각하는 ‘노동 귀족’들이 실질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와 하청업체, 소규모 납품업체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에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이중으로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구조들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불공평한 상태로 인해 고용주들과 직원들 그리고 직원들과 직원들 간에 갭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랜드와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정치적 또는 이념적 동기를 띤 파업으로 보고 완력을 사용하여 해체시키는 정부의 행동은 공정하지 못해 보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생계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동자는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이제는 대기업노조들이 소규모 납품업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을 보태주고,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감싸 안는 배려와 연대가 필요하다. 노동자 스스로 차별과 배제 없이 함께 하는 노동구조를 이루어 내야 한다. 꿈일까? 그래도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리이기에.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5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