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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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37살에 대기업 부장이 된 친구는 1억 원 연봉계약을 마친 날 자랑스레 저녁을 샀다. 서울 강남의 집은 나날이 가격이 오르고 있었고, 맏딸은 전국 단위 영어경시대회에서 메달을 땄다고 했다.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둘이 앉은 3차의 호프집에서, 그는 축축한 눈으로 이렇게 물었다. ‘근데, 산다는 게 뭐냐? 내가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 돈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말을 마친 그는 급하게 취해갔다.” 이 글은 “CEO가 인문학에 빠진 날”이라는 제목의 어느 잡지(2009년 4월 20일자)의 첫 부분이다. ‘돈’만 추구하다가 ‘혼’을 잃는 건 아닌가 싶은 두려움과 ‘잘 나가는 삶’의 척박함, 그런 깨달음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싶다. 이 기사를 보며 대학시절에 필자의 친구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에 참으로 잘 나가던 신문방송학과 학생인 친구가 철학과 학생인 다른 친구에게 “넌 왜 철학과를 택했니?”라고 묻자 들려온 답인즉슨, “넌 왜 사니?”였다. 이삼십 년이 지난 지금의 대학에서도 문학, 사학, 철학(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 과목들은 학생 수가 아주 적거나 폐강이 속출하는 반면, 경영학 과목들은 200명 가까운 대형 강의가 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기업이 지배하는, 기업 중심 사회로 들어선 지 이미 오래이며, 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과 기업 문화는 대중들의 민생고와 의식 구조 뿐 아니라 대학 교육까지 흔들고 있다. 대학 교육이 지녀야 할 ‘혼’과 대학 교육의 뒤를 받치는 ‘돈’이 혼돈되고 있는 형국이다. 대학 고유의 교육이념과 교육 철학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재계 인물이 대학총장으로 영입되어 기업식으로 효율을 강조하고, 기업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해야 대학이 경쟁력이 있다는 식의 척박한 혹은 천박한 철학을 내세우고 있다. 헤르만 헤세, 쌩 떽쥐페리 등의 작품이 젊은 가슴들에게 희망과 삶의 의미를 잔잔히 전해주던 시절에는 적어도 ‘돈’이 전부는 아니었다. ‘혼’이 있었고, 배움과 깨우침이 있었고, 스승이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도 있었다. 허나, 지금은? ‘혼’에 대한 목마름이라도 있는가? 사실상 보수와 극우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체제 속에서 서민과 노동계급의 이익 및 요구는 대표되지 못하고 좌절될 뿐이며, 노동을 천대하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져, 부동산 투기나 재테크, 펀드 관리와 같은, 생산적 노동을 동반하지 않는 그야말로 돈벌이 그 자체에 우리 사회가 열병처럼 휘말리게 된다.     지난 4월15일 서울대 신양학술정보관에서 기업인 등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들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21    이런 가운데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하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사회정의’ 관련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힘들어지며, ‘효율성’이라는 ‘무규범적 기술합리성의 논리’가 사회 지도층 및 정치인의 언어를 지배한다. 아울러, 이른바 ‘명품’에 대한 맹목적 선호, 외모지상주의가 처절한 생존경쟁, 출세경쟁과 함께 두드러지며, “부자 되세요”라는 터무니없는 인사가 유행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 내면은 돌본 지 이미 오래되어 극도로 황폐하다. 아울러, 대학사회는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의 터전이 아니라 사회입시 학원같이 변했고, 지식인들, 학자들 중에서 안락한 보수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 참여적 지성인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느 진보적인 원로 정치학자가 이렇게 한탄하는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을까? 다시,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언급한 인문학 강좌로 되돌아가보자. 중견기업의 대표이사, 대기업·중견기업의 임원·간부, 현직 판사, 병원장 등이 서울대 인문대학의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에 모여 스스로에게 ‘왜 살까?’ 질문하며 이제라도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닌 ‘제대로 살자’고 스스로에게 외치는 자리가 이번 달에 시작되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는 그 기사에 따르면, “술과 골프, 부동산 이야기를 바꾸고 싶었다,” “정신적 삶이 없으니 가난하다”며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음을 새삼 느끼기에 지금껏 돈 안 되는 공부라서 쓸 데 없다고만 여겨진 인문학이 바야흐로 성황을 이루는 거란다. 커다란 조직이나 기업일수록, 그리고 최고위 의사결정권자일수록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엔 외롭고 두렵기조차 하며, 그러한 결정을 좌우하는 것, 혹은 좌우해야 하는 것은 경영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인간관, 혹은 이념, 신념, 신앙이라 한다. 그래서 세계적 기업의 성공한 CEO들 중에는 경영학 전공자보다 인문학 내지 사회과학 전공자가 더 많다고 한다. 위의 기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클레멘트 코스’의 유래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미국의 언론인 얼 쇼리스가 지난 1995년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20대 초반의 한 여죄수를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살인 혐의로 8년째 복역 중이던 여죄수는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정신적 삶이 뭐냐’고 되묻는 질문에 그녀는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이오’라고 답했다. 그 말에 깨달음을 얻은 얼 쇼리스는 곧바로 뉴욕의 노숙자와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클레멘트 코스의 첫 수료자 17명 중 2명이 의사, 1명은 간호사가 됐다. 그들은 그렇게 삶을 되찾았다”고 한다. 인권실천시민연대도 이러한 소신을 갖고 재소자 대상의 인문학 강좌를 열어오고 있으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렇듯, 인문학은 사람을 되살린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지만, 더 나은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바다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 각자가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고 ‘삶’이라는 큰 바다를 아직 항해할 수 있음을 고마워하게 된다면, 그리고, 정신적 세계에서 맛보는 기쁨과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깨달아 퇴근 후에 종종 서점을 들르는 게 일과가 된다면, 자기의 ‘혼’과 자주 만나 친해지리라. 극도로 황폐해진 마음에 물을 대기 시작하리라. ‘정신’이 황폐해진 자는 ‘인권’을 알 수도 존중할 수도 없다. 현 시기에 더욱 척박해진 인권 현실은 이 시대 지도층 인사들의 ‘정신적 황폐’에 연유하는 바 크다. 이 글 맨 앞처럼, 그들이 축축한 눈으로 “근데, 정치인이라는 게, 사업가라는 게, 가방 끈 길다는 게 다 뭐냐? 내가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며 급하게 술에라도 취해갔으면 좋겠다. 그러한 인문학적 목마름과 방황을 거쳐 풍요로워진 정신 속에서 ‘인간’이 왜 그리 귀한 것인지, 왜 ‘인간’이 곧 ‘하늘’인지 새로이 터득하길 기대한다. 자, 건배!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64 | 추천: 0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후 가히 ‘김수환 추기경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열풍이 우리 사회 곳곳에 불어 닥쳤다. 이 신드롬의 기미는 이미 김 추기경 선종 직후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명동성당으로 이어진 40만 명이 넘는 추도 대열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김 추기경이 마지막 가는 길에 각막을 기증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전 사회적인 신드롬의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매스컴은 물론이고 수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알려진 대로 김 추기경 사후 장기기증 신청이 급증하면서 장례 기간을 포함해 일주일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통해 장기기증을 희망한 이만 1500명을 넘어설 정도였다. 천주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 사회 각 분야도 김 추기경으로 인한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해외 언론들까지도 김 추기경으로 빚어진 기이한(?) 현상을 앞 다투어 보도하며 ‘기적’이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가까이 일본은 물론이고 멀리 미국이나 스페인 등지에서도 김 추기경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 불어 닥친 현상을 특집으로 다루며 그의 이름 앞에 ‘성자(聖者)’라는 표현을 붙이기까지 하는 현실을 보면서 필자는 많은 생각을 품게 됐다. 김 추기경의 삶과 그의 죽음에 어떤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해서가 아니라 고인의 살아생전 잠시나마 이어졌던 인연의 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기자로서의 삶에 발을 들여놓고 얼마 되지 않아 선배 기자로부터 물려받은 취재처 가운데 하나가 당시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수환 추기경 집무실이었다. 알려진 대로 김 추기경의 하루 일정은 거의 분 단위로 짜여 있어서 어떤 때는 거의 하루 종일 추기경 옆에 붙어있다시피 할 때도 적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큰 명절이라 할 크리스마스 때나 부활절 무렵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장소를 옮겨 다니며 수행해야 할 정도였다. 더구나 김 추기경의 모친과 필자가 같은 종씨여서 종종 추기경의 살가운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런 고인과의 만남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추기경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었다. 어느 해 성탄절 무렵인가에는 오전 오후에 걸쳐 몇 군데의 철거민촌과 사회복지시설들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 때마다 추기경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따뜻한 아버지’나 ‘인자한 할아버지’ 상 그것이었다. 철거민촌을 찾은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모습 사진 출처 - MBC 스페셜    그런 김 추기경의 상에 흠집이 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5월 고인이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나고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였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만에 물러날 당시 이미 77세로 연로한데다 지병까지 있었던 김 추기경이었지만 은퇴 후에도 우리 사회에서 누구 못지않은 권위를 누렸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추기경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던 필자의 눈에 추기경의 적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물론 이전에도 추기경 주위에는 그를 흠집 내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때만큼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추기경이 지병 등으로 집무실을 벗어나 가난한 이들 가운데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줄어들자 고인의 주위는 이른바 ‘방귀깨나 뀌는’ 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육체만큼이나 정신도 어려움에 놓이게 됐던 것 같다. 한 마디로 고인이 사랑하며 늘 관심을 기울이던 ‘가난’과 그 가난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멀어지면서 ‘성자’로서의 그의 삶에 흠집이 하나둘 늘어갔던 셈이다. 이미 김 추기경이 갔음에도 그의 적들은 지금도 활개를 치며 다른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다. 김 추기경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관심’이 사그라질 때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적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그 적들에게 서서히 질식당하고 마는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존재가 삶으로 보여준 진리라 더욱 시리게 다가온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80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몇 년 전 어느 공연장 대기실에서 있었던 풍경입니다. 출연진들이 각자 리허설을 끝내고 주최 측이 마련한 도시락을 저녁으로 먹고 있었습니다. 공연전의 긴장감 때문에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갑자기 옆방 대기실에서 큰소리가 나기 시작 했습니다. 내용인즉슨 다른 출연자들은 도시락을 다 줬는데 왜 우리는 안 주느냐. 왜 우리를 푸대접하느냐를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에는 외국에서 모셔온 대규모 예술단(A예술단이라고 해두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주최 측은 A예술단원 전체가 한꺼번에 식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 도시락 배달이 늦어지니 개인 출연자에게 먼저 드린 것뿐이라고 해명하고 A예술단을 홀대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술단을 인솔해온 분은 분이 덜 풀렸는지 이후 약 10여분이 넘게 큰소리로 항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공연 전에 먹는 도시락은 넘어가지도 않는데 그거 먼저 먹는다고 텃세 부린 꼴이 되었으니 다른 출연자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내 옆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시던 J 선생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에이그 ~~ 저 엽전들 조금 기다렸다 먹으면 되지 무신 대접을 받을라고 저 지랄이여? 쯧쯧”. J 선생은 무대에서 충청도 사투리로 “아줌마~ 희망한단 에 을마유~~~우?” 하시는 분인데 느릿하고 구수한 사투리조로 “에이 엽전들.....” 하니 웬 말이 그리도 정겨워 나름 심각한 상황에도 모두들 킥킥대고“넌 떠들어라 난 밥 먹는다”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엽전들” 이란 말은 내가 자란 동네에서는 지금도 참 많이 쓰는 용어입니다. 이 말은 전라도 사투리인 “거시기”처럼 사용되는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서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뭔가가 있는 사람. 혹은 집단에 두루 적용 됩니다. 이를테면 작은 교통사고인데도 너무 가해자가 물어내기 버거운 배상금을 요구한 사람. 그저 섭섭하다 한마디 하고 웃고 넘어갈 일을 동네방네 시끄럽게 싸움 거는 사람. 조금 양보하면 될 것을 뭔 영화를 보겠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꼭 상대방을 이기고야 마는 사람. 우리 동네에서는 다 “에그 저 엽전~~” 하는 비아냥을 들어야 합니다. 평소에는 소심하기 이를 데 없구만 술만 먹으면 마누라 패는 사람한테도, 마을사정을 x도 모르는 면서기가 와서 이래라 저래라 왜 내말 안 듣냐 언성을 높일 때도 다 엽전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가 하면 좀 높아 보이는 치들에게는 오금 못 펴고 살살 기는 사람들에게도 이 표현은 적용 됩니다. 주로 마을 상갓집에 국회의원 후보가 오면(실제로 국회의원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일이 악수시키면서 보좌관인양 행세하는 사람, 군수가 보낸 근조(謹弔)깃발을 내가 얘기해서 갖고 왔소 하는 따위의 공치사를 하는 사람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엽전들”이란 말에는 “허삼관 매혈기”의 “자라 대가리”라는 욕처럼 찌질 하고 궁상맞고 못난 것들이나 “완장” 에 나오는 저수지 관리인 종술이 처럼 서푼짜리 벼슬을 조자룡의 헌 창 인양 휘두르는 어리석은 무리들, 또는 회장님 방귀소리에 화장지 미리 갖다 바치는 그야말로 알아서 척척 기어주는 딸랑딸랑 잔챙이 나리들의 능글맞은 웃음 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주 올드한 코미디 마니아 이셨던 분들은 배추머리 김병조 선생의 유행어를 기억 하실 겁니다. “나가 놀아라~~아아아”. 실제로 우리 동네에서 엽전소리들은 사람은 그 버릇 고쳐질 때까지 거의 나가놀아야 합니다. 동네사람들이 별 상대를 안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공동체가 지녀야할 가치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엽전”이란 굴레로 경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4.29 국회의원 재선거를 앞둔 22일 오전 울산시 북구 명촌동에서 한 유권자가 선거벽보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요즘에 “나가 놀아”야 할 사람들 참 많습니다. 찰랑 찰랑대는 엽전들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칼리 쥐 오브 블루하우스, 스프 구락부에 계신 분들 얘기는 하도 지겨워서 이젠 말하기도 싫습니다. 4월 29일엔 국회의원 재선거가 열립니다. 다른 곳은 관심을 놓은 지가 오래인데 유독 울산 북구 상황은 무척 궁금해집니다. 조승수 후보와 김창현 후보가 각각 진보의 기치를 들고 표심을 잡고 있습니다. 진보 단일화가 안 되면 당연히 스프 구락부에서 국자하나 들고 딸랑대실 분이 당선 되실 겁니다. 갖가지 방안으로 단일화를 시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선거 끝나고 나는 그 분들께 “엽전들... 니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니미럴~~”하는 자괴감 섞인 독백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염소새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듯 서로 대가리 디밀고 버티다가 결국 둘 다 개울에 빠지는 요런 부류의 인간형이 우리 동네 “엽전들”의 최고수이기 때문입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94 | 추천: 0
이재상/ CBS PD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인 PSI 참여문제가 논란이다. 국제사회는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을 채택함으로써 북한의 행동을 한 목소리로 비난했다. 그리고 2006년 안보리 결의안 1718호에 포함된 제재방안의 이행도 밀어붙일 태세다. 우리 정부도 ‘때는 이 때다’를 외치면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인 PSI의 전면 참여를 선언했다. PSI 전면참여를 통해 북한과의 대립을 공식화 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공조강화에 기대를 걸어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PSI 참여문제는 뜨거운 감자라서 미국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때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남-북간 무력 충돌 가능성이 높고 PSI가 아니더라도 남북해운합의서가 있기 때문에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북한선박에 대해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란 이유였다. 이런 논란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PSI는 국제적 규범이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써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 북한 로켓발사와는 별개로 검토해오던 사안이란 입장이다. 또한 PSI가 북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이 괜히 긴장하거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북한이 PSI 참여를 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마당에 이번 조치는 강경일변도로만 치닫던 남북관계에서 마지막 고삐마저 놓아버린 것으로 보인다. 지난번 키리졸브 훈련기간 동안 개성공단 통행중단 조치가 취해졌듯 이번 PSI 참여로 인해 남북간 경협도 더 경색되고 무력충돌의 가능성도 더 높아졌다. 이런 긴장고조는 우리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란 건 분명하다.       이번 참여를 보면, 정부가 군사충돌 가능성까지 감수하면서 굉장히 강경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을 보면 무기력함과 자포자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남-북간에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위기를 증폭시키기 보다는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지금껏 정부의 대북정책은 기다리는 전략과 강경대응 외에는 보여준 것이 없다. 대화의 기술이나 전략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이고, 이미 꽉 막힐 대로 막힌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다. 747공약이 실질적 알맹이가 없는 빈 공약이었듯 비핵개방 3000도 거기에 버금가는 깡통계좌로 전락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또한, 미국과의 공조강화가 남북관계의 해법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유추가능하다. 북한은 안보리 의장성명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6자회담을 거부하고 그동안 진행해온 핵불능화조치도 다시 되돌리고 폐연료봉 재처리에 돌입하겠단 입장을 밝혔다. 경수로 건설도 검토하겠단 카드도 꺼내들었다. 예상보다 강경한 반발이다. 여기엔 북미 직접대화로 가자는 메시지가 강하게 들어있다. 하지만 북미대화는 상당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북미대화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남북관계가 복원될 것이란 기대는 우리 정부의 희망사항일 뿐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상당한 비용과 대가가 요구될 것이다. 결국 PSI 전면참여가 북한에 강경대응해서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국제사회와 공조한다는 명분을 얻을지 몰라도 실리와 실용은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 이상 고온으로 때 이른 여름이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남-북간에는 봄은 고사하고 여전히 기나긴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에는 언제쯤이나 ‘실용’의 봄이 찾아올까.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56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장자연 사건은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의 종합세트처럼 보인다. 우선 지적되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의 상층부, 그 중에서도 남성 권력 집단이 가진 오래 된 부도덕함이다. 사실 권력자들이 연예계의 젊은 여인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수십 년 전 저 유명한 정인숙 사건까지 가지 않더라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가 젊은 여성 연예인들의 시중을 받던 자리에서 최후를 맞았던 역사를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긴 그 사이 접대를 받는 주체가 정치권력에서 자본 권력과 언론 권력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장자연 사건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연예계, 혹은 연예산업이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한 레드 오션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체가 늘고 연예 시장의 규모가 커졌다고 하지만 그 바닥에서 스타로 뜨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연예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진 까닭이다. 왜 그런가.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와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뀐 것을 포함해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나는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가 고착화하면서 신분 상승의 통로가 좁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국 사회는 매우 급격한 성장과 변화를 겪었고 그 와중에 사회적 유동성이 비교적 높았던 사회였다. 이를테면 시골의 가난한 수재가 이른바 일류 대학에 진학하고 고시에 패스해 팔자를 고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런 일들을 보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한동안 신분 상승의 지렛대 역할을 하던 교육 체계가 철저히 돈 놓고 돈 먹는 머니 게임으로 변질되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더 이상 흔하게 생기지 않는다. 부르주아의 자식이 부르주아가 되고 노동자의 자식은 노동자가 되는 사회에서 연예계는 몇 남지 않은, 아직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는, 신분 상승의 공간이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연예인을 꿈꾸며 그 바닥에 몰려드는 데에는 이런 구조적 요인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진 출처 - 뉴시스    관문은 좁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을 때 관문을 쥔 수문장들의 권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수문장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방송제작자, 연예제작자, 언론사 관계자, 대형 기획사 등의 힘은 커진다. 게다가 어찌어찌하여 용케 연예계에 입문한다 해도 치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니 그 바닥 권력자들이 가진 힘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연예계 노비문서니 PR비니, 성접대니 하는 사건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고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그러그러한 직업의 사람들인 것도 그러하다. 이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함은 물론이고 자신이 가진 권력의 우산 아래 여배우의 인권을 유린한 부도덕한 자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려지고 단죄되어야한다는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또 이참에 연예계의 불합리한 관행과 부조리가 고쳐져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단지 연예계의 좁은 울타리에서 벌어지는 문제 정도로 보거나 일 부 부도덕한 개인들의 문제로만 보면 안 된다. 그와 함께 이 사건 뒤에 깔려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경쟁 만능주의, 승리 지상주의, 게다가 승자 독식의 구조는 비단 연예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81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학 2학년 어지러운 군부 독재 시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제법 깊은 인생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는 화학과 학생이었지만 앞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목사가 되겠노라 다짐을 하고는 부전공 제도를 이용해 학업의 방향을 신학과 종교학 쪽으로 선회했다. 그래도 졸업은 해야겠기에 화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고민의 격랑은 지속되었다. 전공에 전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시험에 임할 심리적 여유조차 없던 어느 날 ‘물리화학’이라는 전공과목 기말고사를 한 번 포기한 적이 있었다. 시험 직전까지 필요한 모든 과정은 이수했지만, 당시 기말고사를 볼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그 결과 F학점을 받았다. 일부 시험을 보지 않은데다가 철저한 상대평가가 적용되던 학과였으니 경쟁에서 밀려 그런 학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겨우 F를 모면했던 다른 과목들도 몇 개 있었다. 그런데 그 ‘F’라는 성적은 내게 묘한 인생철학을 갖게 했다. 아무리 시험을 한 번 걸렀기로서니, 나는 기말고사 직전까지의 거의 모든 강의에 참여했고, 좋은 성적은 아니었겠지만 중간고사도 치루며 공부했다. 그렇다면 그 수업을 수강하지 않은 다른 학생보다는 물리화학을 조금은 더 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F라는 성적은 그 수업을 듣지 않으니만도 훨씬 못한 평가였다. 가만 생각하니 그것은 모순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공부를 했다면 안한 학생보다 무언가 ‘득’이 있다면 있어야지 ‘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뒤 나의 F학점 경험은 기존 제도나 관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사람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종교학을 공부한 뒤 대학에서 종교 관련 과목을 가르치게 된 나는 학생들의 시험 성적을 최종 평가할 때 수강생에게 가능한 한 F학점은 주지 않으려 했다. 제도가 바뀐 요즘은 해당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교수에게 일부러 F학점을 요청하고는 다음 학기에 재수강해 성적을 올린 뒤 F라는 기록 자체를 없애려는 학생들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 과목을 일부라도 수강했으면 안 한 다른 학생보다는 그 분야에 관해서 좀 더 안다고 간주하게 되었다. 그 점에서 나는 거의 모든 교육을 거부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F학점을 주지 않으려는 긍정적인 원칙을 그 뒤로 쭉 이어가고 있다. 요사이 이른바 일제고사를 둘러싸고 대립각이 날카롭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일제고사 긍정이라는 진리와 일제고사 부정이라는 진리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진리와 비진리의 대립에 가깝다. 대학 시간 강사를 포함해 20여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온 나의 교육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종교교육학회 이사로 여러 해 관계하면서 배운 교육철학의 기본에 비추어보건대도, 학생들에 대한 평가 방법은 다양해야 한다. 학생들의 타고난 재능이 저마다 다른 만큼 모든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줄 세워 평가할 수 있는 일방적 잣대란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선생이라면 가능한대로 학생들 하나하나의 재능을 살려줄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제대로 된 학교라면 선생들이 그렇게 교육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제대로 된 교육 당국이라면 그 학교가 그렇게 교육할 수 있도록 정책적이고 재정적으로 후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 투자의 영순위는 우수한 교원 양성, 그리고 학생들 개개인을 돌볼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마련해주는 데 두어야 한다. 일제고사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을 학생 대 교사 비율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데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신을 가지고 행한 교육이라면 그것이 다소 형식이 다르고 관례에 어긋나더라도 존중하고 때로는 더 잘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어야 한다. 전국 초등학교 4~6학년과 중학교 1~3학년생들을 대상으로 ‘교과학습 진단평가시험’이 동시에 치러진 지난 3월 31일 오전 서울 중구 만리동 봉래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칸막이를 세운 채 시험을 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런데 일제고사 대신 체험 학습을 선택한 교사에게 징계라니, 그것도 파면이라니, 도무지 교육을 책임진 당국의 처사가 아니다. 교육 정책은 그 정책도 교육적이어야 한다. 교육을 한다면서 정책이 창의성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비교육적인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된다. 물론 이른바 일제고사를 통해 교육 정책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반영될 교육정책보다 일제고사로 인해 불가피하게 드러날 서열화 과정 및 그로 인한 또 다른 무한 경쟁의 후폭풍을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이른바 능력 있는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학업 능력의 향상이 아니라 그저 석차를 궁금해 하면서 무한 경쟁을 내심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교육당국은 먼저 그러한 상황을 우려하고 학교가 무한 경쟁의 전쟁터가 아니라 자녀들을 잘 돌보고 교육할 수 있는 곳이라는 신뢰를 쌓는데 매진해야 한다. 이 마당에 다른 의도도 아닌, 교육을 걱정하며 일제고사와는 형태가 다른 교육을 행한 교사를 징계하는 것은 교육적이지 않다. 교육 자체를 거부했다면 모를까, 다른 교육 방식을 시도했다고 해서 중징계를 내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교육이 아니다. 이제라도 이 나라 교육이 그나마 1%라도 나아지려면 파면된 교사를 복권시키고, 계획하고 있는 징계를 철회하고, 학생들의 능력이 모두 동일하지 않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눈뜨게 되면 좋겠다. 왜 그렇게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일제고사 지지자들 내지 정책 입안자들이 자기들의 자녀는 경쟁에서 앞설 만큼의 우월한 능력을 지녔거나 자기 집안이 경쟁에서 이길 만큼의 여유가 있는 등, 숨어있는 이기적 동기가 작용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33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중에 한 여인의 슬픈 음성을 들으십니다. 그 여인은 지금 죽은 아들의 상여를 따라가며 슬피 울고 있습니다. 과부인데다가 외아들마저 잃었으니 그 여인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당시에 과부나 고아, 외국인은 사회 안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시민으로서의 어떠한 권리도 누릴 수 없는 딱한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 기댈 외아들마저 죽었으니 이제 그 여인은 어찌될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자리에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예수님만 그 여인의 슬픈 울음을 들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은 외세의 지배와 억압에서 풀어줄 강력한 왕, 선택된 민족인 자신들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주인으로서 떵떵거리며 살 왕국을 이루어주실 분이 예수님이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서시기만 하면 천지가 개벽하고 새세상이 찾아와 자신들이 잘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대의(大義)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바쁜 걸음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큰 뜻을 품은 그들의 눈에 이 여인의 딱한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겠지요. 아니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딱하고 불쌍하긴 하지.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런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나? 큰일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만 올라가시면 이 모든 게 다 해결될 테니, 서두릅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과부가 아니라 예수님을 빨리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거야. 서둘러 올라갑시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오히려 그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울지 마라' 위로하시며 그 아들을 살려 여인에게 돌려주십니다. 그 아들이 어떻게 죽은 아들인지 언급이 없습니다. 병들어 죽었는지,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은 용사인지, 사고를 당한 건지, 왜 젊은 나이에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얼마나 훌륭한 여인인지, 죽은 아들을 살려 줄 만큼 사회적, 종교적으로 공로가 많은 사람인지 나와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성서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아들을 살려주셨답니다.(루카복음 7장 11-17절 참조) 대의(大義) 명분(名分)을 앞세워 양심도 속이고 작은이들의 슬픔이 무시되거나 밀려나는 이 사회의 현실에 큰 가르침을 주는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대의를 앞두고 가련한 여인의 울음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슬픔에 귀를 기울이는 용기가 이 사회에 필요합니다. 용산참사로 마지막 기댈 곳마저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이들이 화염으로 사라져 간 것은 그 어떤 대의명분을 앞세운다해도 나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노동계의 지도자들이 체면과 단체의 명성을 위해 한 여인의 아픔에 위압을 가하고 모른 체 한 행위는 그 어떤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그럴싸하게 포장한다해도 나쁜 짓거리입니다. 이런 모든 아픔이 돈만 많이 벌어 경제만 살리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우리들의 마음 역시 정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잘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얼만큼 벌어야 잘 사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힘없는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면, 그렇게 해서까지 잘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요? 혹시 나만 불행하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복불복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 겁이 납니다. 그래도 김수환 추기경님의 죽음 앞에 그 많은 조문 행렬이 이루어진 것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셨던 추기경님의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2월 18일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故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잘 사는 것 좋습니다. 경제를 성장 시키는 것 좋습니다. 개발을 통해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아주 소수라도 고통이 따른다면 잠시 멈춰 그들의 아픔을 살피고 개선하는 여유와 기다림도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만이 아닌 모두가 잘사는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없는 이들이 웃을 수 있는 사회가 정말 잘 사는 사회입니다. 어느날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쩐 일이냐?” “형이 어머니 좀 말려 주세요.” “왜? 어머니께 무슨 일 있니?” “그게, 엄마가 이곳저곳 후원한다고 난리셔” “좋은 일 하시는데 뭐 잘 못하시는 것도 없구먼.” “한 두 군데라야지. 벌써 수십 군데도 넘어. 이제 그만 하셔도 된다고 형이 좀 말씀드려요. 내 말은 안 들으셔.” 어렵게 자식들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께 좋은 것 사드시고 친구분들과 즐기시라고 동생들이 모아 드린 용돈을 거의 다 후원금으로 쓰시는 어머니 모습이 동생에게는 좀 속상했나 봅니다. “엄마,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우리 신부님 생각나서 그렇지 뭐. 후원금 받으러 오시는 신부님들보면 ‘우리 신부도 저렇게 고생할텐데’ 하는 생각이 나서 도저히 안할 수가 없어요.” 오늘도 매달 드리는 용돈을 이곳저곳 시설과 어려운 사람에게 후원하시려 지로 용지 들고 은행을 들어서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선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경제를 살린다는 지도자들보다도, 경제성장의 주역이라 자랑하는 기업 총수들보다도 더 훌륭하십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95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방법이 기가 막히다. 잡셰어링을 위한 대졸초임 삭감이라. 공기업과 한국의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경총이 앞장섰다. 전경련은 통계도 제시했다. 한국의 대졸초임이 일본의 대졸초임보다 더 높단다. 경제위기에서 자본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임이 분명하다.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 삭감이 현실화 된다면 기존의 대졸 사원의 임금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한 일이다. 노사간 올해 임금협상은 하나마나할 게다. 어거지 고통분담이지만 신입사원조차 일자리 나누기에 동참하는 지경에 이르러 임금인상은 언감생심이요, 임금동결은 감지덕지요, 임금삭감은 공생을 위한 고통분담 대타협이다. 연대하여 저항하지 않는다면 자본의 이간질에 노동자 사이의 경쟁과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25일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청년실업 해결을 촉구하는 대학생 기자회견’을 열고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그나저나 취업준비생들의 반응이 걱정이다. 취업 준비생들은 대졸 신입사원 초임 삭감으로 일자리가 늘어나면 취업의 경쟁이 완화되어 문호가 넓어질 것으로 믿는단다. 애당초 그들이 저항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들의 대학생활은 처절했다. 오로지 취업준비로 대학시절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업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찌감치 학점, 토익점수, 자격증, 인턴경험 등 소위 스펙을 쌓는데 몰두해 왔다. 취업 준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동아리 활동도 마다한 그들이다. 정작 대학졸업 후 취업의 문턱에 다다라 그들이 쌓아올린 스펙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고통의 시간들이 엄습한다. 면접 보기를 반복하고 주변 눈치 보기에 지쳐나간다. 졸업 후 백수 신세가 되는 것은 아찔하기만 하다. 부모님의 등골을 빼먹은 비싼 등록금으로 인한 학자금 대출 원리금조차 갚을 길이 없다. 누구는 부모님 등쳐먹지 말고 자립하란다. 눈높이를 낮추면 기어들어갈 일자리가 많단다. 생뚱맞은 훈계라도 채찍질이다. 눈높이를 낮추면 백수 신세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건 맞는 소리 같다. 나아가 눈높이를 낮춰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행정인턴 일자리라도, 시중의 알바 일자리라도 열심히 하면 부모님 등쳐먹지 않고 자립할 수 있단다. 이건 사기다. 눈높이를 낮춘 일자리를 통해 졸업 후 자립이라 함은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정말 귀신 씨나락까먹는 헛소리다. 백보 양보하여 운 좋은 이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 우선은 일자리에서 절대 짤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비정규직 고용연한을 4년으로 늘리는 게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란다. 권리 주장하다가 짤리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살아갈 길이 막막해진다. 일하면서 다치지 않아야 하고 정말 몸이 건강해야 한다. 눈높이를 낮춘 일자리는 일은 빡세고 급여는 낮다. 최저임금도, 4대 보험 보장도 없기 십상이다. 중병이라도 걸리고 산재사고라도 당하는 경우 손 벌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무조건 고시원에 살아야 한다. 고시원 월세도 만만찮다. 쥐꼬리만 한 급여로 살아갈 곳이 고시원이 아니라 집이라면 행운아다. 연애, 결혼, 임신은 함부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꿈도 꿔서도 안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로또 행운을 기대하는 편이 낫다. 신용불량자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게 더 낫다. 다단계가 솔깃해지고 만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그들에게, 요행을 기대하는 그들에게 저항을 기대할 수 없으니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자본이 항거불능의 그들을 이용하여 고통분담 대타협의 매서운 공세를 취하는 게 틀림없다. 자본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에 더하여, 신입사원과 기존 사원의 임금의 갭까지 유도하는 작금의 사태는 민주노총이 빠진 노사민정 대표자 회의에서 고통분담 대타협 합의의 후과다. 자본은 안다. 그들에게 손해를 볼 장사가 절대 아니다. 원래 줄 돈에서 나눠서 고용할 뿐인데. 그들에게 요구할 고통분담의 목록은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조용히 사라지고, 자본의 손해를 강요하는 시도는 불순하게 만든다. 마침내 노동자 전체에게 임금삭감을 강요하는 형국이 도래하고 있다. 자본이 취하는 절대 이득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취업 준비하랴, 면접 보랴 허덕이며 불안과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이들을 인질로 잡고 노동자 전체를 상대로 최악의 고통분담을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꽃놀이패를 쥐고 즐기는 자본의 미소가 느껴진다. 저항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본의 의도는 잘 보이지 않으리라. 허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대졸 초임 임금삭감이라는 반노동자적 작태를 보며 노동자에게 고통과 피해를 전가시키는 이 얄팍한 구조를 어찌 방치할 것인가. 자본의 위기에서 비롯된 경제의 위기를 서민대중의 생존의 위기로 치환하는 그들의 작태를 용인할 수는 없다. 경제위기에서 자본의 위험을 회피하고자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행태에 맞장을 떠야 한다. 자본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들의 요구에 절대 순응하지 아니하며, 그들을 향해 노동자가 단결하여 연대하고 저항하는 바로 거기에서 노동자의 희망이 도래하고 자본으로 말미암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경제가 열린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05 | 추천: 0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난 요즘 너무 혼란스럽다. 꿈자리마저 꽤나 뒤숭숭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꾸 뇌리에서 지워져 가고 있어 안타까운데다 그것이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데서 오는 분노까지 겹쳐 마음의 평정을 잃은 때문인 것 같다. 정말이지 요즘 쉼 없이 터지는 굵직한 사건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기억하려는 몸부림이 뒤섞여 나를 압박하는 느낌이다. 용산 철거민들의 참사에 분개하여 동분서주하다 갑자기 일제고사로 인해 해직당한 선생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때만 해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뒤늦게나마 성직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가진 뒤 선생님들과 함께 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중 당한 일이라 그 미안한 마음이 더했다. 그러나 결국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분위기에 휩쓸렸고, 가끔 교육청 앞을 지날 때마다 언론과 시민들의 외면 속에 외로이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상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경기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강호순에 대한 언론의 보도 때문이었다. 미해결 살인사건들이 갑자기 일거에 해결되는 것도 의아했는데 살해 동기와 방법, 현장검증 내용 등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으로 보도하더니 용의자의 신상공개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고 강호순이 책을 쓰고 싶어 한다는 내용까지 소재삼아 뉴스를 만들어 내는 모양이 참으로 개운치 않았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음모가 있었다. 청와대의 한 행정관이 '이메일 보도지침'을 통해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해 용산참사를 뭉개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전에도 경찰이 직원들에게 용산사건 관련 인터넷 여론조사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했었고, 경찰청 홈페이지 게시물에 소방차 사전 배치 주장 등으로 왜곡을 시도하려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우리는 그들의 음모대로 용산을 잊어갔다.   용산참사-진입을 시도하는 경찰 특공대원    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다. 추기경의 선종과 관련한 언론보도는 정말이지 대단한 호들갑이었다. 추기경에 얽힌 일화와 덕담, 각계각층의 추모사에 더해 유리관과 목관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세밀한 분석, 스포츠 중계를 방불한 정도였던 끝없는 추도행렬에 대한 중계까지 언론은 추기경 릴레이를 이어갔다. 나는 그 보도를 접할 때마다 불편했다. 혹시 ‘또 다른 홍보지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예의가 아닌 줄 안다. 그러나 그 결례가 어찌 내 잘못만이라 탓할 수 있을까. 결국 청와대 홍보지침 같은 것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용산참사가 발생한지 한 달 되는 날을 앞둔 2월 19일, 철거민 희생자 5명은 장례는커녕 입관조차 못하고 무관심속에 방치돼 있는 현실과 국내외의 깊은 관심 속에서 진행된 김수환 추기경의 입관식은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루었다. 용산참사 추모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열리지 못했고, 추기경 추모행렬과 달리 용산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줄었고, 용역업체의 철거작업은 슬그머니 재개되었다. 의심이 꼬리를 문다. 국회 문방위 고흥길 위원장의 미디어법 날치기 상정 장면을 보면서, 지뢰밭인 줄 알면서도 뛰어들어 무리한 수순을 밟는 이유가 궁금했다. 언론의 해석처럼 정치 역학이나 정부와 여당의 이해관계 정도로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 행태가 과연 그렇게 상식적이었단 말인가. 분명 그 이면에 다른 음모가 있을 것이었다. 온갖 음모론에 해박한 친구가 있다. 심하게 말하면 과대망상이 질환 수준이라 할 정도이다. 얼마 전엔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족에 마오주의자들이 많다고 어이없는 주장을 하다 나에게 구박 꽤나 받고 쫓겨난 적도 있다. 앞으로 그 친구 이야기에 귀 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나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누구 때문일까?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71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강○○의 연쇄 살인 사건을 계기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논쟁이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즉 연쇄살인범 등 흉악범죄자의 얼굴 공개, 흉악범에 대한 사형 집행, CCTV 전국적인 확대 설치 주장 등이 마치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용산 철거민 참사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강○○의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고 경찰에 지시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 된 점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논쟁 유발이 준비된 시나리오라는 생각도 지워 버릴 수 없는 심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위와 같은 논쟁 중에서 흉악범죄자의 얼굴 공개 문제에 국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얼굴 공개 헌법 제27조 제4항에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흉악범의 얼굴 공개는 위법 또는 부당하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그 이전의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의 유죄 입증이 불분명한 경우에도 혐의만을 가지고 처벌을 함으로써 억울한 피고인을 양산하였고, 이에 따른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부터 형사절차에 실천원리로 구현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얼굴 공개가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유죄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피고인의 얼굴을 공개한다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여 피고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아울러 피고인에 대한 여론재판의 위험성까지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흉악범 얼굴 공개의 문제는 무죄추정의 원칙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의 원칙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원에서 범인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 범인의 얼굴을 공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이 확정된 경우에도 범죄자와 범죄자 가족 등의 인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행하는 재판에서 오판 가능성은 항상 염두 해 두어야 한다. 만일 오판이 발생하는 경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피해와 인권침해를 야기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 공개 문제 역시 더욱 신중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여전히 중요성과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미국에서 1973년 이래 99명이 유죄확정 후 무죄로 밝혀져 석방되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아무리 흉악범죄자라고 할지라도 그 얼굴 공개 등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국가가 얼마나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흉악범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천하에 얼굴을 공개하는 것과 같은 감정적 대응 방식은 예기치 못한 후유증과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길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자각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사안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국민적 합의도 없이 일단 터트리고 보자는 식의 보도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인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얼굴공개의 실효성이 거의 없다. 그러면 흉악범 얼굴 공개를 주장하는 측의 논거는 무엇인가. 대표적으로 범죄 예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얼굴을 공개당한 흉악범의 경우 이미 체포 또는 구속 상태가 십중팔구이기 때문에 얼굴을 공개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형벌의 일반 예방적 효과가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여부는 아직도 입증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아울러 연쇄살인범과 같은 흉악범들은 대다수가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인격 장애자들이 대다수인 현실에 비추어보면,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얼굴이 알려진다는 두려움 때문에 범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냉정하게 살펴보면 흉악범의 얼굴 공개에서 범죄예방효과도 기대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얼굴 가린 연쇄 살인범 사진 출처 - 뉴시스    흉악범의 경우에 한정해서 얼굴을 공개한다고 하는데 흉악범의 기준을 어디에 놓을 것인지도 여전히 논란꺼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1명을 살해하는 행위는 흉악범이 아니고 강○○처럼 7-8명을 살인해야 흉악범이 될 수 있는가. 성폭력을 1회 자행한 자는 흉악범이 아니고 몇 번 정도 더 범행을 저질러야 흉악범인가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정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률이라는 것은 명확성이 그 생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명확성 때문에 흉악범의 개념을 언론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곤란하다. 따라서 수사기관에서 법률을 제정한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위와 같은 불확정적인 개념으로 인하여 법률제정도 대단히 곤란하다. 이러한 논란은 흉악범으로 지목하여 수사기관에서 범인의 얼굴과 범죄혐의를 공개적으로 전국에 지명수배 하는 수사의 수단과는 차이가 존재한다. 공범이 이미 확정판결을 받았으나 여타 공범이 붙잡히지 않은 것과 같이 범인이 확실시되고 증거도 명백하게 존재하는 경우 등에는 얼굴 공개를 포함한 지명수배를 통해서 범인에게 심리적 또는 행동적인 위축을 주어서 범죄를 예방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공개된 사진 등을 통해서 일반인과 수사기관이 범인을 좀 더 용이하게 검거하는데 기여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라면 범죄예방 효과, 범인 검거의 필요성과 같은 공익적 필요성이 지극히 높아서 피고인의 초상권 등과 같은 피고인의 인권 보호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얼굴 공개가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흉악범 얼굴 공개의 문제는 얼굴 공개의 필요성 및 공익적 요구와 범죄자의 인권과 그 지인들에 대한 인권 보호 필요성, 공개한다고 할지라도 인권 침해를 어떻게 최소화 할 것인가에 대한 법익의 충돌에 대한 조화점을 찾는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는 위와 같은 경우와는 다른 상황이다. 강○○의 얼굴을 공개한다고 해도 아무런 공익적 필요성을 충족시켜주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 공개는 현대판 연좌제 도입과 다름이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세계의 역사 속에 존재해왔고, 지금의 문명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진 공개처형제도를 살펴보자. 대중이 모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사형을 집행하거나 사형집행 장면을 공개하면 동일·유사한 범행을 일반인들이 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하여 공개처형이 실시되어 왔었다.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의 사형집행 장면이 공개되면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문제가 심각하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기도 하였던 사실을 상기해보자. 북한의 사행집행 공개는 잔인한 형벌, 비인도적인 형벌 집행, 잔혹한 인권침해, 인권의 보편성, 비문명국가로서의 수치 등의 방정식으로 활용되지 않았는가. 그러면 아직 유죄판결도 확정되지 않은 범인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위와 같은 공개처형과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른 것일까. 형벌이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죄인을 만천하에 공시하고, 신체에 낙인을 찍고, 공개적으로 효수형을 집행하였던 야만적인 과거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형벌은 인간이 이성을 회복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는 인권유린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다시 상기해 보아야 한다. 먼 과거에 범죄자 얼굴에 천형처럼 낙인 도장을 찍어 “나는 범죄자다.”라고 공시하였던 것과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언론매체를 통해서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실질적으로 대동소이한 ‘주홍 글씨’ 아닌가. 강○○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어떠한 이득을 얻게 되고, 어떤 손실을 입게 되는가. 화려한(?) 처벌을 통해서 얻을 것은 야만적인 형벌 수단을 구사하는 비문명국가라는 조롱일 뿐이고, 준엄한(?) 공개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강○○와 관련을 맺고 있는 부모형제, 자식, 친구 등의 충격과 아픔일 뿐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인가. 강○○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개된 흉악범의 얼굴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고, 고통스러워야 하고, 이들이 얼굴을 들고 돌아다닐 수 없도록 수치심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얼굴 공개의 목적인가. 강○○는 자신의 얼굴이 공개된 사실을 알고 “내 아들은 어떻게 살라고”라는 말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 실제로 범죄자의 아들 미니홈피가 온갖 비난으로 넘쳐나서 홈피를 폐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한다. 그럼에도 각종 언론에서는 타인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자식새끼만 걱정한다는 식으로 범죄자의 악성을 부각시키면서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이러한 질타가 과연 옳은 태도이며 이성적인 언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가. 거꾸로 역지사지 해보자.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강○○의 잔혹한 범행을 옹호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강○○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강○○가 미워도 강○○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불가피한 사람들의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 아무리 죄인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식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고통을 부과해야 할 이유는 없다. 범인의 자식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본권을 향유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고통을 가할 권리를 사회와 국가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러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판 ‘연좌제’ 혹은 현대판 ‘마녀사냥’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 모든 문제는 강○○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다. 따라서 아무리 흉악범이 미워도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고유한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공개해서는 안 된다. 범죄자의 얼굴 공개로 범죄자의 인권이 침해되는 결과는 곧바로 범죄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의 인권침해로 귀결되기 때문에 얼굴을 공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범죄자의 인권과 범죄자 가족 등 지인의 인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한 국가와 사회가 강○○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관용의 한계점이며, 지켜져야 할 관용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동시에 강○○와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국가가 범죄자를 정당한 법절차에 따라 처벌하는 것 이상으로 범죄자의 지인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무모한 시도는 포기하는 것이 이성적인 태도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의 인권도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얼굴 공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피해자의 인권에는 무관심하고, 가해자의 인권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형사법에서 피해자의 인권과 범죄자의 인권은 두 마리 토끼와 같은 존재다. 수사기관이 상대적으로 피해자 입장에 경도되어 있는 사실은 수긍할 만한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수사기관에게는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을 앞장서서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사안의 진상을 밝혀서 범죄자를 처벌해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자 인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범죄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인권을 짓밟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두 마리 토끼라는 숙명적인 함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랜 형벌권 남용에 대한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언론매체를 포함한 사회도 역시 마찬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 어느 하나에 경도되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인권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하였다”는 세계인권선언문을 다시 상기해보자. 범인의 얼굴공개를 주장하는 의견이 과도한 사회라면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랑할 자격을 잃는 것이고, 인권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범죄는 미워해도 범죄자는 미워하지 말라”는 법언이 있다. 이런 태도가 성숙한 시민사회의 태도이며,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지점임은 분명하다. 미국의 저명한 대법관 홈즈는 “사상의 자유는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인권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도 지켜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의심치 아니한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이 글은 수사연구사에서 발행하는 수사전문 잡지「수사연구」월간지에 기고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64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