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직무연수

“예수와 지장보살은 서로 닮았다” ‘이찬수 강좌’ 5강…‘구원의 종교’라는 공통점을 가진 불교와 기독교 이연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 지옥)에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1벧3;19)라는 전승이 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지난 30일(화) 저녁 7시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다섯 번째 시간에 이찬수 교수의 ‘다르면서 같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주제의 강의가 열렸다. 이번 시간은 불교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이 얘기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불교적 언어와 기독교적 언어는 서로 다르며 지향하는 세계관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 교수는 ‘동서철학의 만남’을 지은 김하태씨의 말을 인용해 “동양을 대표하는 불교는 직관적이고, 서양을 대표하는 기독교는 지성적인 경향이 있다”는 설명으로 불교와 기독교에 차이가 있음을 전제했다. 신과 인간 사이를 보는 다른 시각 기독교는 세계의 기원과 근거를 인격적 유일신에게서 보고, 불교는 존재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면서 일체의 기원적 존재, 인격적 신을 거부한다. 또한 기독교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신의 주도권을 부여하고 신과 인간 간의 불가역성을 말하지만, 불교는 주도권을 쥔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일적이고 우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극적 실재와 인간 사이의 가역성을 전제한다. 이 교수는 “기독교에서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 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반면, 불교에서는 원천적으로 인간과 부처의 동일성에 대해 말한다”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분명히 갈라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종교간 신앙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닮은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철저하게 신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였을 뿐 스스로를 신의 차원까지 높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이 예수 선포의 확실성을 위해 예수자신까지 신의 차원으로 높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깊은 수행과 명상 속에서 인생의 원리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았던 고타마 싯달타는 ‘법이 나의 스승’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여 제자들에게 깨달은 이, 즉 ‘붓다’로 불리게 되었다. 붓다 역시 자신은 스스로 신격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존중과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예수와 붓다는 역사 내적 존재이지만 제자들은 예수와 붓다를 그들이 전하고 실천한 하느님의 말씀 혹은 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역사적 예수와 붓다가 하느님 말씀의 구체화와 영원한 법의 구체화로 고양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영원한 하느님 말씀과 그 구체화된 육화 도식으로 하느님과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불교에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신과 그 구체화된 색신 도식으로 법과 붓다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붓다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을 보는 시각이 닮아 있다 이 교수는 불교에서 몸을 물리적 혹은 생물학적 몸과 본질 혹은 주요 부분, 두 가지로 본다고 했다. 중생은 흔히 생물학적 몸을 불변하는 실체처럼 여기고 그 욕구에 집착하지만, 이것은 극복과 타파의 대상이라고 했다. 몸에 대한 집착을 이겨낼 때 진여를 보게 되는데, 그 진여를 제대로 본 근원적인 주체가 바로 법신이며, 붓다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난 법이 바로 법신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붓다 그 본래 모습은 역사적 존재 혹은 생물학적인 몸이 아닌 붓다의 지혜(반야)인 것이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타마 붓다에 대한 강조로부터 역사적 구체성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로서의 법신에 대한 강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점이, 성서에서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초기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다가 점차 초형상적 그리스도로 전이했던 것과 유사하다. 예수나 붓다는 모두 괴로운 육체를 지니고 살았지만, 그리스도나 보신불의 몸은 그러한 근원적 괴로움의 초월자 차원에서 재조명된 몸이라는 점에서 양쪽 다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중생이 구원을 얻으려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과 ‘아들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준다’(요한14;13-14)는 하느님의 외아들 혹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구조도 서로 통한다”고 덧붙였다.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 지옥)에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1벧3;19)라는 전승이 있다. 여기서 ‘갇혀 있는 영혼’이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1벧3;20)로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간주되는 이들이다. 알려진 바와 달리 예수는 그들을 영원한 죄인으로 남기려 하지도 않았고, 지옥에 남겨두지 도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곧바로 ‘하늘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갇혀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향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1벧4;6)는 성경구절을 통해 “예수의 모습이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밝혔다. ‘지옥으로 간 예수’와 ‘지장보살’ 신앙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보신불이라는 양쪽 신앙구조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 비슷한 깊이를 지닌다.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미와 불자들에게 아미타불, 지장보살 등 다양한 구원자들이 지니는 의미는 깊이의 차원에서 대립되기는커녕 상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표현 형식은 모순과 우열 차원에서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저마다 신앙 체험의 근거가 되는 각 전통의 깊이 혹은 그 전통 안에서 발생한 신앙체험의 깊이에 서로 물리칠 수 없을 유사성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교수는 신학자 존 캅이 “기독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가 아미타에서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불교 신자들도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아미타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 말에 동의했다. 또 “산의 등정로는 다르지만 호연지기는 비슷하다. 구원에 대한 이론과 개념 설명이 설혹 종교마다 다양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태도에는 상통하는 점이 있다”라고 한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마다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 내지는 근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체험은 세계관과 그 표현 방식 상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물리칠 수 없는 비슷한 깊이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고타마 붓다에서 보신불로, 구체적 몸에서 정신적․영적 몸의 차원으로 전개되어 나간 두 종교 전통의 역사는 인간 종교 심성의 구조적 유사성과 함께 무엇보다 신앙적 깊이의 상통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에서 쓰는 용어들은 다르지만 신앙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세계로, 불자는 불성의 세계로 받아들이면서 세계 해석의 기초로 삼는다”고 했다. 아울러 “표현에서는 문화적 다양성과 차별성이 드러나고 교의적 표현 내지는 세계관에서는 상반되는 듯 보이는 기독교와 불교지만, 인간 구원의 차원에서는 저마다 비슷한 깊이를 지닌 동서양의 대표적 종교전통이다”라고 정리했다. 2월 6일(화)에는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2월 8일(목)에는 이찬수 교수가 ‘성서적 타종교관’을 주제로 마무리 강의를 한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로 하면 된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44 | 추천: 0
“너희도 내 애인을 사랑하라” 강요 말아야 - 윤영해 동국대 교수 ‘이찬수 강좌’ 4강 강연…종교다원주의 배격하면 기독교 패배할 것 이연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불교 신자들은 기독교를 ‘애증’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윤영해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한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윤 교수는 지난 25일 ‘강남대 이찬수 교수 대책위’ 주최로 열리고 있는 ‘종교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네 번째 강연자로 나서 불교 신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을 ‘선망의 대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도 본다고 밝혔다.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실패한 종교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은 20억 중에 불과 8천여만명만이 기독교 신자이고, 인도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이슬람교이거나 불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유독 한국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25%에 이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윤 교수는 교회조직과 운영, 선교방법, 봉사활동 등 전반적 체제에서 구태의연한 불교에 비해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 등 역사 속에서 사회적 참여와 실천에 적극적”이었던 점을 성공의 요인으로 꼽았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의 적극적인 ‘선교’를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자 ‘선망의 이유’로 지목했다. 윤 교수는 “기독교 신자들은 입교하면 해야 하는 게 선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심지어 지하철에서 승복을 입은 스님에게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기독교 신자들을 보면서 “불교 신자들은 이런 모습에 질겁하면서도 불교에는 왜 저런 열정이 없나하고 선망의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요즘 불교계의 찬불가, 일요가족법회, 가족탐방법회, 조계종의 포교원, 복지시설이나 학교설립 등도 기독교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배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 불교 신자들에게 기독교는 이해하기 힘든 종교다. 불교는 흔히 상식, 이성, 합리, 성찰 등 설명을 통해 이해를 구한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이해보다는 창조, 부활, 전지전능 등에 대한 믿음, 즉 초월적 신앙을 요구한다. 때문에 불교 신자들이 기독교를 이해하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윤 교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고, 겉옷을 달라하거든 속옷까지 주라’는 성경구절을 예로 들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면서 단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기독교를 이해하기 힘든 종교”라고 말했다. 선행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되고 불신에 대한 처벌은 너무 가혹하기만 한 것에 대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신앙은 주관적이고 각자의 선택적 결단인데 기독교의 이런 면이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악의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불교에서 ‘절’은 ‘신앙고백’ 의미 없다 우리는 90년대 말에 있었던 기독교의 불교에 대한 온갖 비방과 노스님에 대한 폭행치사, 파괴행위, 동국대 법당 본관 앞에 ‘만’자로 조경해 놓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간 일과 불상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를 새겨 놓은 일 등 기독교 배타주의에서 비롯된 참혹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윤 교수는 이찬수 교수의 해직사건에 대해서 “절에 가서 절해서 절단 난 절절한 사연”이라고 말했다. 불교에서 절하는 행위는 인사와 존경의 표현이고, 그 다음이 수행의 의미다. 흔히 기독교 신자들이 하는 ‘신앙고백’의 의미는 없다. 그런데도 기독교에서는 이 교수가 불상에 절한 것을 ‘인사’나 ‘존경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신앙고백’으로만 보았다. 윤 교수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배타성은 '신앙고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이라고 우기고 믿어야 만족하는 자족적 무지에서 자라난 측면이 강하다. 불교 신자들은 신앙을 연애감정과 비유하기도 한다. 신앙과 연애 모두 주관성, 비합리적 감성, 절대적 충성요구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연애 감정에 몰입한 연인이라도 내 애인이 최고니까 ‘너희도 내 애인을 사랑해라’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종교 때문에 행복하고 좋다면, 다른 사람도 그가 가진 종교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 애인이 예쁘면, 다른 사람의 애인은 그 사람의 눈에 충분히 예쁜 것이다” 내 종교가 절대적이고 진리라고 믿는다면 다른 종교도 그렇다고 (최소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타종교란 평행하게 뻗은 철길처럼 절대 만나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길게 뻗은 한쪽의 그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에 윤 교수는 “내 팔 내가 흔들고 네 팔 네가 흔들어라”고 일갈했다. '인정'의 바탕위에 대화가 생겨난다. 특히 종교는 서로 간 대화의 필요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서로 같은 진리일 가능성을 가설로나마 남겨두는 다원주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결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윤 교수의 “다른 종교로부터 배우려고 기독교 공부를 시작했는데, 기독교 공부를 하니 불교가 훨씬 풍성하고 훨씬 다양하게 보인다. 불교가 나를 성숙시키는 만큼 기독교가 나를 성숙하고 충만하게 만든다”는 얘기는 그런 면에서 대화의 중요성을 방증하고 있다. 이찬수 교수 역시 "불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더 깊은 신앙의 신비를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말도 이와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윤 교수는 “인간은 비교를 통해 모든 것을 인식한다. 나를 보고 ‘빡빡이’라 인식하는 건 머리를 기른 사람들과 비교해서이고, ‘이번 강의 되게 재미 없네’라는 생각도 지난 강의와 비교해서 나오는 말이다”면서 자기 신앙을 올바르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선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독교, 배타주의만 고집하면 패배할 것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독교는 사회적 현안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며 존경을 받았고, 신자들의 수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폭발적인 성장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멈췄다. 윤 교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회의 현안에 헌신하는 노력을 버리고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충족에 주력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기독교가 근대화시기에 우리사회에 전해지면서 시민의식을 형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지만, 일정 수준 근대화를 이룬 현재의 상황에서는 배타적이기만 한 기독교의 교의가 근대적 시민의식과 함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교를 가진 다종교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한국적 상황을 무시하고 기독교의 구원론만을 고집한다면 기독교는 갈수록 고립될 수밖에 없다. 다종교 사회에서 배타성은 종교가 갖는 전형적 기능인 사회통합의 기능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윤 교수는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희생’과 ‘사랑’이라는 기독교 본래의 메시지를 회복하길 바란다”라며, 기독교 신자가 자기신앙에 성실하다면 다른 종교에 대한 몰지각한 행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윤 교수는 기독교와 불교의 공동의 적은 바로 ‘세속주의’라고 지적했다. 신앙이 가진 본래의 의미보다는 대형화, 상업화에만 몰두하고 종파 간 세력다툼에만 관심이 있는 것에 대한 따가운 질책이다. 윤 교수는 “기독교가 그와 똑같은 메시지를 지닌 불교와 손잡고 세속주의를 향한 공동승리로 나아가야 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여전히 배타주의만을 앞세워 다른 종교를 공격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패배할 것이다”라고 강의를 마무리했다. 2월 1일(목)에는 ‘종교적 다양성을 소화해낸 신학 - 스미스, 힉, 라너의 신학’을 주제로 이찬수 교수가, 2월 6일(화)에는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의 강의가 이어진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로 하면 된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55 | 추천: 0
박용석/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 의문 1 만약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든지 “자업자득”,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이단일까 아닐까. 폐쇄적인 개신교회에서는 이단 판정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 불교 용어이며, 불교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 의문 2 한국 대형 교회에서의 대규모 부흥회나 통성기도는 기독교적일까, 반기독교적일까. 그리고 한국 기독교에서 유달리 많이 볼 수 있는 새벽기도회나 새벽미사는 과연 얼마만큼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신앙 실천의 모습에서 기독교보다는 무속 신앙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전자는 흔히 말하는 ‘굿판’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새벽 시간의 종교 의식 역시 무교적 분위기 내지는 새벽 예불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문화는 별개이면서도 별개가 아니다 지난 23일(화), ‘文으로 化 하다-한국종교문화론’이라는 주제로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진행된 이찬수 교수의 종교 강좌 3번째 강의에서는 현대 종교의 복잡한 현상을 짚어보았다. 많은 종교인, 비종교인들이 종교 그 자체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을 한다. 고민의 근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하나인 듯 하면서도 다양하고, 다양하지만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 같은 현상 즉,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진리를 부정하지 않되, 다양한 ‘진리 현상’에 대한 이해와 관용적 태도를 통해 진리의 참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진행된 지난 강의에 이어 이 교수는 ‘문화’라는 개념어 이해를 통해 종교를 이야기하였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문화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substance)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Form)이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종교가 문화 ‘안’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문화가 종교의 형식’이며, 종교가 문화를 규제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종교는 문화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이러한 명제는 하나의 문화와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종교간 관계에서만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에 다양한 문화 그리고 다양한 종교가 동시에 공존하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다양한 종교 현상이 공존하고 있는 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교수는 “종교가 다양하면 그만큼 다양한 문화적 형식이 있는데, 한국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면서도 한국적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포괄적인 틀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종교들의 존재 이면에 통일적이고 심층적인 근거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면면에 스며있는 ‘초월적인 종교 문화’, 혹은 ‘종교 이전의 문화’이다. 文化는 진행형의 동사 ‘문화(文化)’는 순우리말이 아닌 ‘Culture’란 외래어를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이다. 이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일종의 명사형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문화는 매우 역동적인 의미에서의 진행형의 동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문화를 고정된 의미의 명사로 보는가 또는 변화의 의미에 중점을 두는 동사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이 교수는 “문화란 인간 활동의 가시적인 소산의 총체다라는 정의가 문화를 명사로 이해하여 문화를 마치 고정불변의 외적 대상물로 제한하는 한계를 갖는다”라고 지적하며, “문화를 대상화하는 인식 행위 자체가 이미 문화의 소산이며, 현대 사회 문화의 일부 특성”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인간은 세계 내 존재(Being-In the-World)’라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을 빌려, “인간은 문화 내 존재(Being-In the-Culture)”라고 표현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인간은 문화를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100여 년 전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당시 조선인의 종교 상황에 대해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에 처했을 때는 무속신앙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이 교수는 이것을 종교가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것일 수 없다는 증거로 제시했다. “한국의 도교, 유교, 무교, 불교, 기독교 등이 서로 공존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배타적인 종교들인 듯하지만, 만약 이들이 진정 차별적이라면 현재와 같은 공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종교들은 공존하고 있는데, 각 종교들의 이면에 보편성, 공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현상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 운동이나 개신교의 타종교 비판과 같은 종교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 교수 자신도 강남대로부터 종교적 이유로 배척을 당했다. ‘나와 너’ 그리고 관계 “일반적으로 문화와 종교는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에 있으며, 문화가 종교이고 종교가 문화인 상즉(相卽)적인 관계입니다. 각각의 개별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이전의 문화를 고려해야만 한다.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유입될 당시, 이미 한국 사회에는 그 이전부터 불교, 유교, 도교, 무교 등의 다양한 종교가 만들어 낸 사회 문화 또는 종교 문화가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선교사들의 ‘God’은 ‘천주(天主)’가 되었다. 물론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신(神)’을 하늘의 주인으로 풀이하는 곳은 없다. ‘천주’라는 개념은 중국인들이 이미 3천여 년 전부터 사용해 왔던 ‘상제(上帝)’ 개념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God’을 이해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사람들은 ‘천주’를 순 우리말로 가다듬어 ‘하느님’, ‘하나님’으로 받아 들였다. 물론, 서양 언어 ‘God’에는 ‘하늘’이란 뜻도, ‘님’이란 뜻도 들어 있지 않다. ‘하늘의 주인’ 또는 ‘하늘에 계신 님’이라는 한국 고유의 문화 의식이 개입된 것이다. “마틴 루버가 말한 ‘나와 너’란 명제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나 ‘너’가 아니며 ‘와’입니다. 나와 너는 서로의 관계(‘와’)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 이전에 도교, 불교, 유교 등의 혼합적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한국적인 기독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종교와 종교 문화에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이 교수는 종교를 자신 안에 가두는 차별적인 종교관은 신을 가두는 것이라고 못 박으며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끊임없는 상호소통이 진정한 종교적 실천”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실천의 중요한 계기는 상호 교감이다.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착한 이유는 단지 그가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못 본채 지나친 제사장과 달리, 그 사마리아인은 원수와도 같은 유대인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구해줬기 때문이다. 그는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 섞인 호소와 교감하였다. 예수는 그러한 교감에 따른 실천을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실천이라 하였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타종교를 배척하는 일부 종파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1월 25일(목)에는 동국대 불교학과 윤영해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를 주제로 특강을 진행한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으로 하면 된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44 | 추천: 0
"기독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는 이슬람" '이찬수 대책위'의 두 번째 강연... 테러는 종교가 아니라 패권주의의 산물 박용석/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지난 18일 저녁 7시, '강남대 이찬수 교수 부당해직 사태 해결을 위한 대책위'(아래 대책위) 주최로 인권실천시민연대 교육장에서 '이슬람의 이해와 종교간 대화 : 칼과 코란의 왜곡된 방정식'이란 주제로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강의가 진행됐다. 16일 열린 이찬수 교수의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 1강에 이어 두 번째. 이 교수는 "신학전공자는 아니지만 지구상에서 기독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를 고르라면 이슬람을 들겠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보다 더욱 가까운 종교다"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종교적으로 이슬람은 앞선 일신교(하느님을 받드는 종교)들의 기본적인 교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코란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혁명적 변화를 가져다줌으로써 기존의 교회와 교의를 압도했다"고 말했다. 이슬람은 예수 이전의 예언자들 즉 아브라함부터 모세, 다윗 등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을 수용할뿐 아니라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 또한 예언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지난 18일, '이찬수 대책위'로 열린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두 번째 강의에서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강의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반면, 이슬람은 예수의 신성을 거두고 그를 완전한 인격체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또 하나의 예언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 교수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맞서 언덕을 옮기기보다 언덕 앞으로 자신이 직접 걸어갔다는 무함마드의 기적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예를 들면서 "이슬람교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예언자로 추앙하는 무함마드도 신격화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무함마드는 절대자의 권능을 부여받은 신격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적 인간형'의 예언자이다. 평화와 상생 존중하는 이슬람 이 교수는 "인류 역사상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 추악한 짓을 벌였던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정복방식엔 큰 차이가 있다"라고 설명한다. 1099년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들은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러나 1187년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도, 자신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기독교인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은 자는 재산을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해줬으며, 정착하는 사람은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했다. 또한 그네들 종교의 성소마저도 훼손치 않고 보존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예루살렘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운 1948년까지 상생과 평화의 상징으로 보존됐다. 이슬람 세계는 복잡하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용어로 정의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문화권에 비해 유독 잔인하다거나 종교적 강제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소수민족 간 문제는 실타래처럼 복잡한, 역사적인 원한관계로 얽혀 있다. 팔레스타인, 쿠르드족, 체첸, 발칸 지역의 코소보, 아프가니스탄의 소수민족 등 분쟁 유형은 너무도 다양하다. 다양한 분쟁의 근본 원인은 대부분 냉전체제가 끝난 뒤 지배민족에 맞서 싸운 소수민족의 독립 투쟁, 또는 반대로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민족의 박해에서 찾을 수 있다. 허나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는 영토와 석유라는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참여하는 강대국들은 개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용어를 내세우며, 이슬람 문화가 아직 미숙하며 개도되고 선도해야 할 문화라고 부당하게 강조한다. 이와 관련, 이 교수는 "나는 아직 인류를 위해 만들어지거나 계시가 내려진 어떤 종교에서도 폭력을 조장하거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도록 내버려두는 종교적 가르침을 보지 못했다"며 "많은 경우 갈등의 원인과 배경은 주로 침략자나 강자의 논리에 따라 조작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여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경우 진실을 들여다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오해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칼과 코란'이란 명제와 함께 따라붙는, 테러리스트라는 꼬리표다. 이 교수는 인류학자로서 25년간 중동을 다녔는데도, 단 한 번도 테러의 위협이나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생각하며 공포에 떠는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 등 강대국들이 언론을 통해 만들어낸 일방적인 정보를 수용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일반 시민들도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많은 언론들은 이슬람 관련 소식을 전할 때 알 카에다, 하마스, 지하드, 헤즈볼라 등의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폭력으로 얼룩진 테러라는 대명제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 중에서 실제 테러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단체는 오직 '알 카에다' 하나뿐이다. 헤즈볼라는 국민의 동의와 선거를 거친 레바논의 합법 정당이며,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집권당이다. 지하드는 말 그대로 어떤 특정의 조직이 아니라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표현에 불과하다. 이 교수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반대한다고 해서 이들을 테러조직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실 왜곡이자 지식에 대한 도전"이라며, 테러를 조장하는 현지의 세력 관계를 엄밀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네가 하면 테러, 내가 하면 자위권 행사? 이 교수는 기독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가 이슬람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테러란 무장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향한 모든 폭력"이라고 정의한 뒤, 언론에서 '이슬람 국가들에서 테러 행위가 벌어진다'고 보도된 행위가 명백히 '테러'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들의 테러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성이나 정당성이 있다고 말했다. 언론에서는 대부분 침묵하고 있지만, 중동 자살폭탄 테러범들의 대부분은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자라고 한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하루가 멀다 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미사일이 자신의 이웃과 가족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현실에서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기 위한 절망적인 행위라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도 국제법상 무장할 수 없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직접 제조한 조악한 폭탄을 자신의 몸에 감고 죽어가는 것뿐이다. 많은 남성 대학생들이 희생해 이제는 많은 여성 대학생들이 죽음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교수는 "국가 권력이 '니가 하면 테러, 내가 하면 자위권 행사'라는 말도 안 되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며 테러 근절을 위해서는 두 가지 테러, 즉 국가 테러와 자살폭탄테러를 동시에 비난하고 근절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동안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정보와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미국의 부당한 공격과 불공정한 이중 잣대, 그리고 자원의 약탈과 문명의 파괴에 맞서 저항하는 이슬람을 폭력적이고 잔인한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것에 자신도 모르는 새 동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교수는 "이슬람의 오늘은 '코란과 칼'이라는 위협의 시대라기보다 오히려 '미국이냐 칼이냐'를 강요받는 시대"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국제법을 어기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질서를 송두리째 짓밟으며 자행되는 미국의 횡포를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방관해야 하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며 현재 이슬람이 겪는 분쟁의 대부분 미국의 대중동전략이란 큰 흐름 속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해와 관용으로 이슬람에 다가가야 할 때 이슬람 문화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족적, 종교적 박해와 탄압을 단순히 이슬람교의 책임으로 매도할 수도, 이슬람만의 과제로 방치할 수도 없다.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주변 정세에 대한 통찰 없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끝으로 이 교수는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 문화로 바라봐야 할 것"이라며 "종교는 삶의 순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문화로서 의미를 지녀야 하며, 서로 다름을 이유로 탄압과 박해를 정당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지금은 상대적 강자의 입장에 있는 서구 기독교 문화권 국가들이 이해와 관용으로 이슬람에 다가가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23일 세 번째 시간에는 한국종교의 문화를 탐색하는 이찬수 교수가 '文으로 化하다'라는 주제로 강의한다. 25일에는 윤영해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를 주제로, 2월 6일에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특강한다. 모든 강의의 개별 수강 신청도 가능하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58 | 추천: 0
이연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1월 16일(화) 저녁 7시.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강남대이찬수교수부당해직사태해결을위한대책위’(이하, 대책위) 주최로 이찬수 교수의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 1강이 시작됐다. 지난 해, ‘대책위’는 이찬수 교수에 대한 강남대의 부당한 해직을 규탄하고, 시민사회에서의 올바른 기독교 이해를 위해 ‘기독교와 현대사회’ 강좌를 개최한 바 있다. ‘기독교와 현대사회’는 이찬수 교수가 강남대에서 6년이 넘게 진행한 교양강좌 제목이다.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이번 강좌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종교 현상을 둘러보고, 이를 통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일반에 대한 참된 이해를 고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양성, 진리에 이르는 지름길’ 이라는 주제로 열린 1강은, 전체 강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으로, 진리를 부정하지 않되, 다양한 ‘진리 현상’에 대한 이해와 관용적 태도를 통해 진리의 참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종교적 진리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많은 분야중에서도 특히 종교는 ‘진리’에 민감하다. 종교적 사고와 생활 그 모두의 밑바탕에 ‘신’이라는 우주적 진리에 대한 규정과 지향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인들은 그 ‘신’을 ‘자명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다양한 종교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종교적 인식의 함정이 있다. 현상을 인식하는 주체의 주관성을 강조한 칸트의 지적처럼, ‘자명한 대상’이란 단지 또 하나의 회의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살아 온 환경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관심사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온갖 감각 기관을 통해 접하는 외부 세계의 모습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과 평가, 선택과 집중의 원칙이라는 그물망을 통해 걸러진 것들이다. 이처럼, 주로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이뤄지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획일적이며 맹목적인 사유의 틀을 벗어나 보다 깊은 진리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 현대 사상이나 철학, 문학, 예술 등의 공통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흐름을 외면하고, 왜곡하며, 배제하는 유일한 영역이, 바로 종교다. 이찬수 교수는 “종교가 우주에 통하는 보편적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그런 진리도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수용되고 표현되는 순간,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달을 보라고 가리키면, 사람들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보고 있습니다. 지극히 제한된 언어의 함정에 빠져, 언어를 넘어서는 참된 우주적 진리, 보편적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찬수 교수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이슬람 등의 언어가 사실은 종교에 대한 참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각기 다른 듯이 보이는 종교를 하나의 이름으로 명사화하여 표현하는 것은, 그 내면에 각각의 종교가 그 이름만큼이나 서로 다른 종교이며, 결코 공통적인 부분을 갖지 않는다거나 서로 소통할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도 합니다. 각각의 종교들이 오직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존재할 뿐, 서로 융합하기는커녕 대화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명사와 명사 사이에는 오직 차이를 강조하는 두터운 벽이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차이의 벽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종교간 차별을 정당화시키고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한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종교 영역에서 차이에 대한 맹목적인 강조와 차별하기 관행이 유독 심하다. 개신교면 개신교, 천주교면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각각의 이름에‘만’ 절대적인 전우주적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찬수 교수는 “종교를 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의 ‘이름’으로 최종 규정하고 구분하는 순간 종교 본연의 세계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오직 기독교의 진리, 이슬람의 진리, 불교의 진리만이 서로 떨어져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 자체가 반종교적이며, 반진리적이다. “종교를 명사로만 이해하면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이라는 ‘신’의 속성이 각각의 ‘명사’로 국한돼 제한적이며 편협한 ‘신’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종교는 자신들의 신이 ‘무소부재’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모순이며, 인식의 왜곡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 신·진리에 대한 이와 같은 편협하며 제한된 이해를 벗어나기 위해 이찬수 교수는 명사가 아닌 ‘형용사적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 등이라고 잘라 말하기 보다는, ‘개신교적’, ‘천주교적’, ‘불교적’, ‘이슬람교적’이라는 표현이 종교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 오히려 종교 본연의 모습을 더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서로 이질적인 개신교와 천주교라는 소통불가능한 집단이 있다고 한다면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 개신교‘적’ 접근과 천주교‘적’ 접근이 있는 것이라면, 그 둘은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이찬수 교수의 표현을 쓰자면 “종교간 벽이 무너지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존경할 만한 종교인들이 대부분 ‘기독교적인 불자’, ‘불교적인 기독교인’인 점을 본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누구든지 유무형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타자에게 강요한다면, 그 사람은 폭력적이며 제국주의적이라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 조화와 관용을 최대 덕목으로 내세우는 종교는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짓을 ‘당연한 종교 행위’로 거꾸로 내세우고 있다. 안타깝지만 현대 종교, 특히 한국 종교 문화의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이찬수 교수는 “다양한 종교 문화가 혼재하는 한국 사회야말로 현대적 의미의 올바른 신학을 고민하고 이뤄나가기에 적당한 토양”이라고 지적하고, 3강부터 한국 종교 문화와 다양한 종교 등을 좀더 깊이 살펴보기로 하였다. 다음 강의는 “이슬람의 이해와 종교간 대화”를 주제로 한양대 이희수 교수의 특강으로 진행된다. 국내에서 이슬람 바로 알기에 앞장서고, 유익하고 즐거운 강의로 유명한 이희수 교수는 다문화 시대에 기독교 지상주의가 갖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기독교를 포함한 타종교와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이슬람교의 포용성을 이야기 할 것이다. 강의는 목요일(18일) 저녁 7시에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진행된다. 이찬수 교수의 기본 강의 외에 25일(목)에는 윤영해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며, 2월 6일(화)에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특강을 한다. 모든 강의에는 개별 수강신청이 가능하다. 문의: 인권연대(02-3672-9443)
2017-08-09 | hrights | 조회: 46 | 추천: 0
박용석/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지난 2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2007년 겨울 교사인권강좌’가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인권 유린 장소로 기억되는 서울 남영동의 옛 대공분실터(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서 진행됐다. 2005년 여름 1기를 시작으로 4기째를 맞는 이번 교사인권강좌는 ‘청소년 인권’을 주제로,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함께, 청소년 인권에 대한 접근 방법, 학교에서 자행되는 인권침해의 요소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런 것들을 개선할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고민해 보는 자리였다.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3일 첫날인 8일에는 ‘내가 생각하는 인권’이란 주제로 최철규 인권연대 간사가 강의를 시작해 남영동 대공분실을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한상희 건국대 교수의 ‘인권이란 무엇인가?’,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의 ‘학교와 자발적 복종’이 이어지며 포괄적인 인권의 개념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홍세화 위원은 “우리의 교육이 기존의 질서에 아이들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시스템화 되고 있다”며, 아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의식을 형성할 수 있도록 교육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미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존재’와 ‘의식’ 사이에서 이율배반적인 위치에 있는 일부 교사들을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둘째 날인 9일, 첫 번째 강의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이 진행했다. 주로 문답식으로 진행돼 인권의 개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어 이윤상 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청소년의 성과 성폭력’이라는 주제에서 “청소년의 성을 억압과 금기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한계를 떠나 성의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며, 아울러 성폭력 예방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강사진 중 유일한 현장교사였던 박현희 구일고등학교 교사는 ‘현장교사의 좌충우돌 인권교육 경험기’라는 주제로 실제 학교에서 적용가능한 인권교육 사례들을 소개하고, 모둠활동을 진행해 참가자들의 높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마지막 날인 10일에는 이밝은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가 ‘청소년 인권’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 “청소년 인권은 청소년의 입장에서”임을 거듭 강조했다. 또한 교사들 스스로 인권친화적인 학교를 위한 5개년 계획을 짜고 발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마지막 강의를 맡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체벌’은 명백한 ‘범죄’이자 ‘불법행위’”임을 먼저 강조하고,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 이전에 “스스로 ‘왜 안되나?’에 대한 답을 먼저 구하라”고 조언했다.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사들의 사고를 깨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3일간 전체적인 강의 일정이 포괄적인 인권개념의 이해, 실제적인 개선방안의 모색, 개선방안의 구체화 순으로 진행돼 참가자들이 짜임새 있는 구성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다른 한편에서는 좀 더 세부적인 주제를 정해 집중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강좌도 진행되었으면 한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아직 우리교육에는 수많은 인권문제가 남아 있다. 교육제도가 가진 반인권적인 요소를 비롯해 현장에서 교사에 의해 자행되는 인권침해사례 등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교사인권강좌는 바로 이런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시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시도가 결국 교육희망을 만들 것이고, 함께 하는 교사들과 함께 그 해답이 인권이었음을 확인하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46 | 추천: 0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겨울방학도 어느덧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네요. 소중한 방학기간을 어떻게 하면 알차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을까 고심하며 선택했던 ‘2007년 겨울 교사인권강좌’에서 여러 선생님들을 뵐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2007년은 특히 우리 교사들에게 의미 깊은 한 해였습니다. 한미 FTA를 관철시키기 위한 국가차원의 이데올로기 공략이 심화되는 가운데, 정부와 언론은 교원 평가제 도입과 교육‘시장’ 개방이 산적해 있는 교육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우리들을 설득하였죠. 하지만 많은 선생님들이 이러한 정책의 의도와 방향성을 직시하고 공교육의 의미와 본질을 지키기 위해 ‘성과급 반납, 연가 투쟁’에 참여하셨습니다. 학교 현장을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시스템으로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다인수 학급, 파행적인 승진제도, 확보되지 않은 교육 재정 등의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겨울 방학에는 교사로서의 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대안적인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우리들 주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대안을 만드는 것은 주체들의 몫 사실 고백하건대 제가 인권연수에 참여한 이유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참교육이네, 전교조 교사네 하며 떠들어대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체벌을 멈추지 않는 대표적인 ‘반인권적’ 교사였습니다. 이런 제 자신에게 인권에 관한 최소한이나마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식의 변환이 실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테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현장에서는 인간을 교육한다는 선배 선생님들로부터 인권에 관한 어떤 기본적인 상식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세련된 교수기술일수록 오히려 반인권적인 개념이 담겨있고 ‘아이들을 휘어잡는 기술’을 쫒느라 교육의 본질을 외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번 연수는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배우게 했으며, 새로운 실천에 대한 의지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선 강의의 형식부터 일제식이고 일방적인 강의 구조에 익숙해 있던 제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에 이어 바로 진행된 최철규 간사님의 강의는 모둠 토의 활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인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시겠지’ 하고 내심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의자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으려던 우리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모둠활동 장소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인지적 개념 학습에 익숙해 있던 저와 같은 교사들에게는 아마도 곤혹스러운 경험이었겠지만, 모둠 토론을 끝낸 후 듣는 간사님의 강의는 신기하게도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연수가 이루어진 남영동 인권센터 건물의 상징성과 박종철 열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조사실에 대한 답사는 강의로 전달된 그 어떤 내용보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한상희 선생님의 강의에서 인권에 대한 권리의 개념과 본질을 배웠고, 이밝은진 선생님의 강의에서는 ‘인권친화적인 학교를 위한 5개년 계획’을 고민하면서 배운 지식을 실제적으로 학교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소중한 단초들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창익 선생님의 “인권의 역사는 승인의 역사가 아니라 피의 역사요, 투쟁의 역사”라는 말씀은 인권의 개념과 역사에 관한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용기’를 선물해 주셨지요. 사실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주요한 기제이자 통제·관리를 위주로 한 우리 공교육의 현장에서 소신 있게 제목소리를 내고 실천한다는 것은 매우 큰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 어떤 연수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갑니다. 편안하게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세심하게 배려해주신 여러 간사 선생님들에게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아무쪼록 몸 건강하시길 빕니다. 제게 주신 소중한 선물을 더욱 큰 실천으로 돌려 드릴 것을 감히 약속드리며….  
2017-08-09 | hrights | 조회: 40 | 추천: 0
[서울시교육청 직무연수(서울교육 2006-466) 지정] ‘07년 겨울 인권교육 직무연수 - 청소년 인권’ 신청하세요 서울시교육청의 특수분야 직무연수 과정으로 지정된 ‘교사들을 위한 인권연수’가 겨울에도 진행됩니다. 겨울연수는 ‘청소년 인권’이라는 주제로 교육과정에서 부딪히는 청소년 인권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가서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려 합니다. 아울러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군사문화가 잔존하고 있는 학교 현실에 대한 이해, 현장교사의 인권교육 경험기를 통해 인권감수성을 기르고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인권교육을 나누고자 합니다. ○ 일시: 2007년 1월 8일(월) - 10일(수), 총 17시간 ○ 장소: 남영동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 약도 클릭 (지하철 1호선 남영역 1번출구, 4호선 숙대입구역 7번 출구) ○ 주최: 인권실천시민연대 교육센터/ 후원: 국가인권위원회·유네스코한국위원회 ○ 대상: 전국 초·중·고 교사 누구나 ○ 신청방법: 학교장 직인이 들어간 직무연수참가 신청서(다운) 팩스로 접수 ○ 마감: 2006년 12월 29일(금)까지 ○ 모집인원: 선착순 40명 ○ 수강료: 55,000원(수강료 40,000원+식사비 15,000원 별도) (인권연대 CMS 회원은 수강료만 20% 할인으로 47,000원) ○ 입금: 우리은행, 1006-601-221429, 인권실천시민연대 ○ 접수: (전화) 02-3672-9443/ (팩스) 02-3672-0438/ hrights@chol.com   청소년 인권 1월 8일(월) 1월 9일(화) 1월 10일(수) 시간 인권과 만나기 시간 청소년 인권 시간 실천을 위한 한걸음 10:00 O/T 09:00 주제별 교육 1 표현의 자유와 체벌, 그리고 인권 -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09:00 주제별 교육 3 청소년 인권의 이해 - 이밝은진 (다산인권센타 활동가) 11:00 내가 생각하는 인권 - 최철규 (인권연대 간사) 12:00 점심식사 12:00 점심식사 12:00 점심식사 13:30 인권이란 무엇인가? - 한상희 (건국대 법대 교수) 13:30 주제별 교육 2 청소년의 성과 성폭력 -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13:30 인권은 실천이다 -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16:00 학교와 자발적 복종 -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인) 16:00 현장교사의 좌충우돌 인권교육 경험기 - 박현희 (구일고등학교 교사) 15:30 종강 및 평가 설문 16:30 폐회   [프로그램 소개] ○ 내가 생각하는 인권 - 현장 교사들의 인권감수성을 알아보기 위해 각자가 생각하는 인권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는 시간 ○ 인권이란 무엇인가? - 세계인권선언의 각 조항들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며, 이를 현대사회의 주요현상과 연계하여 설명함으로써 인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시간 ○ 학교와 자발적 복종 - 일제 강점기에 정형화된 학교구조 아래 자발적 복종의식이 교육을 통해 어떻게 내면화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시간 ○ 주제별 교육 1 - 표현의 자유와 체벌, 그리고 인권 - 청소년 또는 학생들의 복장, 두발, 체벌 등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인권의 어떤 문제와 연결되는지 알아보는 시간 ○ 주제별 교육 2 - 청소년의 성과 성폭력 - 교사가 알아야 할 청소년의 성의식, 성폭력의 유형과 대처, 예방을 위한 방안, 피해자·가해자로서의 청소년의 이해와 관련법을 검토하는 시간 ○ 주제별 교육 3 - 청소년 인권의 이해 - 청소년 인권에 대한 기본 이해 교육과 교사들의 청소년 인권에 대한 접근 자세, 아동청소년권리협약에 나타난 구체적인 조항을 이해하는 시간 ○ 현장교사의 좌충우돌 인권교육 경험기 - 현장에서 직접 인권교육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교사로부터 생생한 경험담과 인권과 인권교육에 대한 교사의 자세에 대해 얘기 나누는 시간 ○ 인권은 실천이다 - 인권은 당사자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임을 강조하고, 인권교육 또한 현장교사들의 부단한 실천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강조하는 시간
2017-08-09 | hrights | 조회: 39 | 추천: 0
이지연/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우리사회의 미래를 만드는 중요한 공간은 교육이다. 그래서 인권친화적인 사회를 위해 교육에 ‘인권’이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교육 현장에서 직접 활동하고 있는 교사들과 함께 인권친화적인 교육을 위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일은 의미가 있다. 더구나 우리사회에 인권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교육현장에서의 인권교육의 부재라는 사실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인권연대가 지난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진행한 ‘2006년 여름 교사인권강좌’는 바로 ‘인권’과 ‘교육’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현장의 교사들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지난 1, 2기와는 달리 이번 3기 강좌는 ‘서울시교육청 특수분야 직무연수’로 지정되어 현직 교사들만을 상대로 진행되었으며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예림미술교육원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진정한 인권적 가치 실현의 모습 찾기 이번 강좌는 단순히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인권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인권에 대한 개념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권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등 포괄적 인권문제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었다. 인권은 권리라는 구체적 형태로 제시되는 기제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왜 인권이어야 하는지, 인권 침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문화적 담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도덕 교과서와 인권’을 주제로 첫째 날 강의에 나선 전남대 철학과의 김상봉 교수는 인권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반인권적인 시각이 팽배한 한국 사회의 교육 문화의 문제를 국가가 주도하는 도덕교육의 사례에서 지적하였다. 김 교수는 “현재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도덕교육은 타율적 강제의 체계로 이루어져있다”라고 지적하고 “이로 인해 타율적 강제에 학생들을 길들이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언급했다. ‘선’을 내세우는 도덕 교육이 사실상 맹목적인 길들이기의 과정에 불과하다면, 존엄하며 자율적인 인격체를 상정하는 인권의 철학과는 결코 양립할 수가 없다. 또한 일반적인 도덕 교과서의 내용이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이 보람있는 삶이라는 진부한 교훈만을 답습하는 것도, ‘나에게 이러저러한 권리가 있다’라는 인권의 표현과도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인권의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통해 타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과정에 좀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에 더해 김 교수는 ‘도덕’이 ‘강자의 도덕’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강요되는 흐름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도덕 교육의 올바른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깨어있는 문제의식과 적극적인 실천의 의지를 갖고 “학생들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고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자기규정의 능력을 함양 할 수 있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차별 넘어서기’를 주제로 진행된 둘째 날에는 한국 사회의 주요한 인권 문제인 장애인, 성적소수자, 이주노동자에 대한 집중 탐구가 진행됐다. 박숙경 시설인권연대 활동가의 장애학생의 교육권에 대한 강의에서는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의 통합교육에 관한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특히 교사들은 현장에서 직접 겪는 통합교육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얘기했다. 토론 과정에서 장애학생의 교육권 침해라는 관점에 앞서 비장애학생들의 인권과 교사의 인권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장애학생들의 인권보장과 차별에 대한 극복, 그리고 앞으로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이 장애/비장애를 구분하지 않는 통합교육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가 의견을 같이 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채윤 대표는 성소수자의 개념정리부터 첨예한 논쟁과 현실적 과제까지 훝어주었고,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이란주 대표는 10여년 동안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때로 싸웠던 생생한 경험을 전해주었다. 박숙경, 한채윤, 이란주씨 등 3명의 여성활동가가 전해준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는 인권이 단순한 차별극복을 넘어서 또 다른 질적 재구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이 날 마지막 강의는 ‘땅콩선생, 드디어 인권교육하다’(우리교육, 2003)의 저자로 참여한 구일고등학교 박현희 선생의 인권교육 체험담 나누기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박 선생은 교사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학생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일상 속의 실천과 의식의 변화를 통해 학교공간에서 학생들의 진정한 인권보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사실,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생과의 관계를 고민하지만 정작 바람직한 관계를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인권은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주춧돌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박 선생도 ‘교사-학생간의 권위적 관계를 깨고 인권의 기준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그들의 의사가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학생들 스스로 자기 존엄성을 깨닫고 학급 운영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특별활동 수업에서 인권을 주제로 학생들과 진행하는 모둠 활동에 관한 설명은 학교 현장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강의를 듣는 교사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개별 교사들의 적극적인 의지에도 불구하고, 몇몇 동료 교사들의 무관심과 학교의 반교육적 권위주의 문화 등의 제약은 여전히 넘기 어려운 산으로 다가 서 있다. 박 선생은 “결국 인권과 교육의 진정한 만남이 이뤄지도록 교사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만이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강조하여, 수강생들의 공감을 얻었다. 체계적인 인권교육의 필요성 전반적으로 이번 교사인권강좌는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수들의 이론적인 설명과 사회현장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 교사의 경험이 반영된 강의가 병행되어 이론과 현실의 접목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좌에 참여한 교사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잘 모르겠다’였다. 도덕교과서의 문제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 강의에서도, 장애학생의 통합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강의에서도, 같은 학교 현장에서 활동하는 동료 교사가 직접 느낀 인권을 소재로 한 강의에서도 선생님들의 질문 앞에는 이 말이 따라다녔다. 현실에서 실천과 함께 하는 인권교육이 학교현장에서는 부재하고, 교사들 또한 이러한 인권교육을 받을 다양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강좌를 마친 뒤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거의 모든 교사들이 전문인권교육으로는 이번 강좌가 처음이라고 응답하였으며, 이전에 경험이 있다는 2-3명의 응답도 그 경험횟수가 1~3회에 불과했다. 여전히 현장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인 인권교육의 구축과 확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2박3일이라는 짧은 기간만으로 모든 인권교육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인권감수성은 어느 한 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인권 개념 역시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서 함께하는 실천적인 인권의식을 형성하려는 교육이라면 지속적으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으며 끊임없는 반성과 개혁이 필요하다. 비록 아직은 소수에 의한 참여와 노력일지라도, 교사인권강좌에 참여하여 의욕적으로 고민을 하는 교사들이 있기에 그 앞날이 어두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교육의 희망을 보았던 교사인권강좌 정규원/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교사인권강좌’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교사와 인권이라는 개념이 잘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초, 중, 고 12년의 학교 생활동안 만난 선생님들 중에 인권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교직 생활을 하시는 분이 얼마나 계실까란 생각을 했다. 물론 그 분들을 모두 싸잡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라는 집단 내에서 이미 짜여진 틀 자체는 정말이지 ‘반인권적’이다. 그 틀은 그다지 인권적이지 않은 선생님들조차 어느 정도는 이해해줘야 할 만큼 굉장히 견고하다.  내가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다고 늘 외쳤던 이유는 바로 그거였다. 세상의 어느 곳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학교라는 곳에 너무도 견고하게 세워져 있는 권위주의의 틀은 날 분명 힘들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난 반장의 구령에 맞춰 반 전체 학생이 선생님에게 인사하는 것이 싫었고, 내가 인사했을 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고개만’ 끄덕이는 선생님들도 싫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선생님들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난 다만 아무리 좋은 뜻을 품고 교직에 선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학교라는 곳은 어쩔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 발 물러났던 것뿐이다. 난 늘 생각했었다. “현재 우리의 교육은 절망적이다. 방법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 교육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 라고 말이다. 2박 3일 동안 영월에서 만났던 선생님들 때문이다. 사실 그 분들 조금 특별나신 거다. 황금 같은 방학에 가방 챙겨 인권교육 받겠다고 강원도 산골짝까지 오신 열정만 봐도 말이다. 물론 2박 3일의 연수가 그 분들의 생활 자체를 완전히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분들의 배움을 믿는다. 최소한 그 분들은 돌아가서 학생들에게 교무실 청소를 시키면서 꺼림직해는 하실 것이다. 학생들이 인사할 때 한 두 번은 더 활짝 웃으며 받아줄 것이다. 매를 들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실 것이다. 학생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성소수자인지 한 번 더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조는 학생들에게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이 어떻다라고 한 번쯤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강의가 좋았지만 난 박현희 선생님의 강의가 가장 좋았다. 선생님께선 교육 현장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반인권적인 상황 -아침자율학습, 학생에게 교무실 청소 시키는 것, 야간자율학습 등- 에 대해 나서지 반항하지 못하고 ‘난 몰라’ 라며 피하고만 있는데, 그런 내가 과연 인권교육을 시킬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셨다고 한다. 난 선생님의 고민하는 그 자세가 좋았다. 그리고 느꼈다. 다른 선생님들도 이런 비슷한 고민들로 힘들어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쌓아왔던 벽이 조금이나마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학 1학년 때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을 우연히 만나 맥주를 한 잔 한 적이 있다. 그 때 선생님께선 그러셨다. “학교가 학생 생각을 안 해. 학생을 위해야 하는데 말이야. 내가 답답해.” 그 때 선생님의 눈엔 눈물이 아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우리 때문에 교감 선생님께 우리 보는 앞에서 호되게 혼나셨던 적이 있다. 그 때 우리는 운동장에 나가서 발로 ‘선생님 사랑해요’를 크게 썼었다. 그 때 선생님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였었다. 그 눈물에서 봤던 희망을 떠올렸다. 나는 바란다. 이번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신 선생님들의 눈에서 학생들이 나와 같이 눈물을 볼 수 있기를, 그리고 희망을 볼 수 있기를.
2017-08-09 | hrights | 조회: 62 | 추천: 0
권영미/ 부여중학교 교사 방학은 늘 설레임을 동반한다. 방학 그 자체도 즐겁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탈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방학이 가까워오면 이리 저리 인터넷을 뒤지고 공문을 뒤지며 내 일탈을 함께 해 줄 연수를 찾는다. 가능하면 집을 벗어나 나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짐을 싸들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 한 학기를 지탱해 줄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작년부터 나는 전교조 참실 연수나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많은 연수들 중에서 늘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바로 ‘인권’ 이다. 왜 인권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뚜렷이 대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의 시선은 줄곧 인권에 머물렀다. 이번 연수는 “왜 인권인가” 라는 질문에 나에게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내가 아이들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인권이기 때문이다. 몇 해 동안 학교 현장은 교권과 인권 문제가 부딪히면서 참 많은 담론들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교사들의 설 자리는 좁아지고 하루가 다르게 지쳐갔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더욱 경쟁체제를 심화시키고 그 속에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과 핸드폰, 거친 행동으로 자신들의 소외감을 분출시켰다. 그 결과는 교사와 학생들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정보가 개방되고 의견 표현이 자유로워지면서 학생들의 의사 표현은 자연스럽고 확고해진 반면 교사들의 단단한 권위 의식은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강했다. 두발, 체벌, 특기 적성, 자율 학습, 교칙 제정 등 교사 간의 너무 큰 의견 차이로 학생들의 최소한의 요구도 찾아줄 수 없으면서 교실에서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이 당당하지 못했고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강제적인 특기적성에 동의하는 희망서를 왜 내지 않으냐고 채근해야 했고, 내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에 감정이 폭발해 체벌을 가하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인권실천시민연대의 인권연수는 내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무시했던 아이들의 권리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와 어른들이 얼마나 단단한 권위로 아이들의 삶을 짓누르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다. 인권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을 담아낸 연수 내용이 모두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와서 참 좋았다. 소수자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고, 인권을 기준으로 학교와 아이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도덕 교과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던 내게 김상봉 교수님의 도덕교과서 속의 국가주의 문제 제기는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아이들과 만나야겠다는 다짐을 갖게 해주었다. 딱딱한 의자에서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쉼 없이 몰아대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머리 속에서는 끊임없이 내가 만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해 본 2박 3일이었다. 언제 이런 소중한 시간을 가져볼까? 강원도 영월 그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온 선생님들의 열정과, 새벽까지 이어진 뒤풀이에서 쏟아내는 아이들에 대한 고민은 참으로 반가운 모습이다.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지고 아이들과 만나는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교육희망, 인권이 해답이다”라는 인권실천시민연대의 연수 표제가 정말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연수 장소가 너무 멀어 옆 선생님과 함께 오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좀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충분히 고려해보겠다는 말씀과 함께, 연수 장소가 어디든 함께 할 수 있는 진정성을 가진 선생님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말씀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진정성을 가지고 아이들과 만나자. 그러면 아이들과 함께 한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마지막으로 2박 3일 동안 풍요로운 연수 내용과 자연 그대로의 건강한 먹거리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신 인권실천시민연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