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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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학폭의 그늘(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3-14 09:46
조회
237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출처 - YTN뉴스


1. 


국민학교(오래 전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4학년 교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우리는 시험을 보고 있었다. 시험문제를 푸느라 조용한 교실에는 난로에서 타닥 타다닥 탁, 나무 타는 소리만 들렸다. 난로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나는 뜨거운 난롯불로 벌게진 얼굴을 돌리느라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아이가 지금은 학습 참고서인 전과(책)을 넘기며 양옆에 있는 아이들한테 무엇인가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아이들 바로 앞에는 선생님의 책상에서 선생님이 책을 읽고 있었다.


“선생님!”


책을 보던 선생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들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일어나서 “ㅇㅇ이 전과를 보면서 시험을 봅니다. 그리고 ㅇㅇ과 ㅇㅇ한테 알려줍니다.” 하고 말하였다.


순간, 교실 안이 잠시 술렁이는 듯하더니 이내 적막감이 흘렀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내 얼굴과 선생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고, 얼굴빛이 차가워진, 잠시 할 말을 잊은 듯하던 선생님이 나한테 “네가 봤냐?”고 물었다. 내가 “봤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앞의 아이들에게 “네가 정말 그랬냐?”라고 물었다. 그 아이가 들릴 듯 말 듯 한 조그만 소리로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얘가 아니라고 한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나한테도 그 아이들한테도 더 이상 확인을 하거나 책망 같은 것은 없었다.


사실 전과를 보는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그 양옆에 앉은 아이들은 반장과 부반장이었고 부잣집 딸이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을 짝꿍으로 엮어 자신과 가까운 맨 앞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벌이는 부정과 횡포를 방조하거나 방임하였다. 모두 가난하던 시절에 조금 잘사는 집안의 딸들, 고만고만하게 공부하던 아이들 중에 공부를 조금 잘하는 아이를 학교에서 제일 예쁘고 멋쟁이인 선생님은 이렇게 모두가 알게 차별(?)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운동장에서 한바탕 눈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분노를 담아 뭉친 눈을 그 아이들을 향해 던졌다. 쏟아지는 눈 뭉치를 피해 그 아이들은 도망갔다. 우리는 도망가는 아이들을 쫓아가며 눈 뭉치를 던졌다. 그 아이들은 왜 우리한테만 그러냐고 항의하지도 않았고 그만하라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바빴다. 우리는 화가 났고 비열한 선생님의 그늘을 벗어난 아이들은 비굴했다. 그리고 5학년에 올라가면서 당시 부잣집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반장과 부반장은 서울로 전학을 갔다. 물론 집은 이사 가지 않은 부정 전입이었다.


 


출처 - 드라마 더글로리 중


2.


중학교 2학년, 우리 담임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눈이 너무 나빠 뱅글뱅글 도는 돋보기 같은 안경을 끼고 목소리는 쉰 것처럼 허스키하지만 감수성 예민하신 시인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어느 날 종례를 마치면서 몇 명의 아이한테 잠깐 남으라고 하였다. 모두가 돌아간 교실에서 선생님은 이유는 말하지 않고 일요일인 다음 날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선생님 집으로 오라고 하는 걸 보니 뭔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시간에 맞춰 선생님 집으로 갔다. 우리 감수성 예민한 시인 선생님은 몸이 약한 선생님의 부인을 대신하여 무거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배추를 나르고 펌프질을 해 물을 길었다. 몸이 약한 선생님 부인은 이것저것 우리한테 주문했고, 감수성 예민하신 선생님은 부인이 주문한 일을 되풀이하여 말해 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시키는 일을 하고는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갔다. 우리는 창피함을 느꼈다. 그 일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시인이신 선생님을 직장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때 일하던 잡지에 원고를 가지고 왔다. 나는 그냥 외면했다. 쪽팔린 그때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그이를 외면하게 했다.



3.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병가를 내셨단다. 임시 담임으로 사회 과목을 맡은 옆 반 선생님이 오셨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안경 너머의 눈매와 목소리가 몹시 날카로운 선생님은 무섭기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복도에서 마주친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무시하는 선생님,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선생님은 때리지는 않았으나 늘 가는 매를 들고 다녔다. 언제든지 우리를 향해 그 매를 휘두를 수 있다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때리지는 않는 그 선생님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폭력적이었다. 대다수의 여고생들은 알지도 못하는 남녀간의 일을 마치 당연히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말하거나, 우리는 그저 나쁜 짓을 저지를 아이들로 대했다. 비아냥거리며 무시하는 선생님의 말을 들을 때면 한 대 맞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무시하고 미워하고 폭력적인 말로 학생들을 대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울대 나온 사람은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냐며, 우리는 성질 더러운 선생님한테서, 지옥 같기만 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아직은 많은 게 서툴고 그래서 많은 가능성을 가졌을 그런 우리를 조금은 인정해 주는,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야단치는 선생님을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런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기가 죽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 무의식 속에 접혀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선생님, 왜 그렇게 저희를 무시하고 미워하셔요? 저희가 그렇게 나쁜 아이들인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다. 그런데 권위라는 폭력의 그늘에서 정말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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