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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자유에 대한 일고(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2-08 09:19
조회
226

조광제 / 철학아카데미 대표



  1. 광기의 자유

권력과 광기의 결합만큼 결정적인 위험이 있을까? 여기에 돈벌이의 기회 조작까지 더해지면 타는 불에 계속 기름을 끼얹는 격으로 광기가 더욱 솟구쳐오른다. 게다가 거기에 현존하는 거대 정치권력의 뒷배가 작용하면 완벽하게 인간성이 소멸하고 정치가 실종된다. 2023년 2월 4일에 방영된 《뉴스타파》의 <정치깡패가 된 ‘아스팔트 유튜버’>를 시청하고 난 뒤, 예상을 뛰어넘는 사태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극우 유튜버들의 작태들을 대략 알고 있긴 했으나, 단편적이나마 정돈된 영상을 통해 그 실상을 접하고 나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노골적이고 비합리적인 광기의 폭력에 휩쓸리고 말았는가, 하는 절망감이 일순간 나의 심정을 억누르면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불어 어떻게 만든 민주 사회인데, 하는 심정에 분노가 치솟으면서 폭력에는 폭력 외에 다른 치유책이 없다는 확신이 나의 심사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출처 - 뉴스타파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대통령 윤석열 씨의 집권이 이런 ‘정치깡패 유튜버들’의 활동에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힘입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연설 때면 대통령 윤석열 씨가 왜 그렇게 자유를 거듭 강조하는지 알쏭달쏭 그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뉴스타파>의 저 영상을 보고서 그 이유와 내용을 짐작하게 되었다. 내심 논리 비약이길 바라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향해 “시체 팔이” 운운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김상진이라는 인물이 주도하는 ‘신자유연대’라는 단체의 이름에 들어있는 ‘자유’와 같다는 것, 말하자면, 극우 보수 무리가 말하는 자유와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른바 민주주의를 외치는 진보 세력은 알고 보면 친북 좌파 빨갱이 간첩의 집단들이다. 그리고 그 수장은 문재인이고 이재명이다. 그 증거는 한반도 평화를 빌미로 북한과 중국에 예속되어 미국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고 친일을 범죄시한다는 것이다. 멀쩡한 우리 공무원을 탈북자로 만들어 죽이는 게 그 증거다. 언필칭 민주 세력이라는 이 집단들이 내세우는 민주주의와 자유는 엉터리고 위장일 뿐이다. 이 세력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예 함께 할 수 없는 적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 집단을 철저히 적으로 여겨 척결하는 길만이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를 이루는 길이고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 이 적들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을 척결할 수 있는 확실한 무기는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이고, 검찰 권력을 곳곳에 정치권력으로 확대해 정확하게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검찰 공화국’이니 ‘검찰 독재’니 하는 말은 우리가 잡은 기회를 정당화하는 말이니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달가워해야 한다. 저들에게 조그마한 틈을 보여서도 안 된다. 내가, 우리가 집권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왜 영수 회담 운운하는 짓을 하지 않았겠는가. 적과 마주 앉아, 더군다나 국정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대 야당의 힘을 내세워 협치 운운하는데, 거기에 휘둘리면 안 된다. 어떻게든 아차 했으면 질 뻔했던 적의 두목인 이재명을 감옥에 잡아넣어야 한다. 그 인간을 살려 두면 종북 좌익의 준동을 막는 일이 힘들어진다. 만약 다음 대선에 정권을 넘겨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로지 죄를 법으로 정당하게 다스렸을 뿐 죄를 지을 수 없는 우리를 오히려 잡아넣지 않겠는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나와 우리가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걸 눈치채도록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실수를 했건, 무슨 일을 벌였건, 무슨 일이 벌어졌건 간에 결단코 의무를 다하지 못해 잘못했다고 사과하거나 잘못 실수를 저질렀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딱 잡아떼야 한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저것들이 뭐 어쩌겠는가. 의혹이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도 겁내지 말고 오히려 역공을 취해야 한다. 우리가 쥐고 있는 검찰과 경찰의 공권력을 활용해야 한다. 고발하고 고소해서 겁을 주고 몰아붙여 입을 다물게 하고 굴복시켜야 한다. 대다수 국민이 못 살겠다고 나설라치면 전번 정권의 탓이라고 몰아붙여야 한다. 막강한 언론들이 다 우리 편이지 않은가. 재벌 기업들이란 본래 정권에 아부하기 마련이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그동안 내가, 우리가 많이 봐주었잖아. 언론과 재벌을 장악하면 그걸로 얼마든지 우리의 뜻을 펼칠 수 있잖아. 최대한 함께 보조를 잘 맞추도록 해야 한다. 내가, 우리가 어떻게 통치 권력을 거머쥐었는가. 국민이 나를, 우리를 선택한다고 해서 가능하겠는가, 신적인 운명이 나를, 우리를 택했으니까 가능했다. 그러니 아예 걱정해서는 안 된다. 나의, 우리의 통치 권력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여실히 보여줘야 한다. 무조건 밀어붙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자가 있으면 눈치 볼 필요 없이 틀림없이 제거해버려야 한다. 나를, 우리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놈들은 철저히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거짓말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경선 때건 대선 때건 무슨 공약을 내세웠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게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이고, 진정한 자유다. 김정은이 핵무기 좀 있다고 나를, 우리를 내놓고 함부로 욕하는데, 가만두면 도저히 안 된다. 전쟁을 겁내면 안 된다. 선제공격, 조금이라도 기미가 보이면 먼저 쳐야 한다. 확실한 우리 편이 있지 않은가. 미국도 있고 일본도 있고 나토도 있지 않은가. 내가, 우리가 나토에 괜히 갔겠어? 일단 미국 바이든에게 전술 핵무기 배치해 달라고 하고, 안 되면 우리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는 거야. 중국이 문제라고? 중국과의 교역? 지금 교역이 문제야? 자유가 문제지. 좌고우면하지 않는 자유, 조금이라도 나, 우리를 비방하고 말 안 듣는 놈은 안에서건 밖에서건 다 적이야. 작건 크건 적은 무조건 척결해야 해. 그게 자유야. 그게 자유 민주주의야.



  1. 진보주의적 자유

워낙 불안하고 갑갑한 마음에 잠시 흥분했다 싶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악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악이 무지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잘못된 짓인 줄 알긴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짓을 하고 말았다는 건 소크라테스에게 통하지 않는다. 잘못된 짓인 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나쁜 짓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짓을 할 때, 그 짓이 잘못된 것임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그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하는 짓이 잘못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과연 제대로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만약 알 수 있다면, 그 앎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아무도 없는 외딴섬에 사는데도 올바르거나 잘못된 짓이 성립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이 올바르거나 잘못된 짓이 성립할 수 있을까? 여러 전제들을 고려해 따지게 되면 복잡하겠지만, 단적으로 보면 복잡할 게 없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남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올바르다거나 잘못되었다거나 할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짓이 올바른지 잘못된 것인지의 기준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찾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온갖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겠지만, 올바름과 잘못됨에 관한 기준을 찾기 위해 고려해야 할 일은 일단 간단하다. 내가 하는 짓이 남에게 득이 되면, 내가 하는 짓은 올바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짓이 남에게 해가 되면, 내가 하는 짓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남에게 득이 되는 일이 무엇이며, 해가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문제다. 이를 정확하게 분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남에게 득이 되는 게 분명하다고 해서 내가 그 일을 남에게 함부로 권유하거나 심지어 강권하거나 강제로 시킬 수 있는가? 남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내가 남에게 강제로 하도록 하는데도, 과연 그 일이 그 사람에게 득이 될 수 있을까? 남의 자유를 빼앗으면서까지 그 사람에게 득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달리 말하면, 내가 올바른 짓을 하기 위해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만약 누구에게나 자유가 가장 큰 득이라면, 이는 아예 불가능하다.


묘하게도 누구나 자유를 추구한다. 자유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데 가장 근원적인 요소라 여긴다. 그래서 자유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득이고, 따라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유만큼은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유조차 근원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만 의미 있게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자유롭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만큼 나의 자유의 폭이 더 커지지 말란 법도 없다. 실제로는 오히려 그런 법이고, 그래서 자유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자유로운 만큼 남도 자유롭고, 남이 자유로운 만큼 내가 자유로우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는 자유에 관한 이상적 상황이다. 묘한 말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상을 포기할 자유가 없다. 어렵게 들리겠지만, 오로지 남들과의 관계에서만 나의 자유가 성립한다고 할 때, 자유롭지 않은 남들을 통해서는 나의 자유가 성립할 수 없다. 남을 마음대로 부리는 데서 나의 자유가 성립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남들을 존중할 때 나의 자유가 제대로 성립한다. 자유는 아무것도 아닌 텅 빈 형식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 자유는 실질적인 내용을 통해서만 제대로 성립한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행동의 자유지만, 자유로운 행동은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새로운 여건을 창조할 때 그 실질을 확보한다. 남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을 때, 그런 남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사는 나의 자유가 더 풍부하게 실질을 획득할 수 있다. 자유로운 상상과 창조적인 행위의 공동체를 통해서만 실질적인 자유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현실화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자들을 일컬어 진보주의자라 일컫는다. 그래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근원적으로 일치한다. 진보주의자는 더 나은 미래의 현재를 향해 상상한다. 이때 더 나은 미래의 현재는 창조적인 상상을 현실로 구현한 현재다. 진보주의자는 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그 전제 위에서 그 제한의 폭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이런 까닭에 진보주의자는 평등을 지향한다. 평등은 자유와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불평등이야말로 자유를 위협한다. 불평등한 자유는 텅 빈 형식에 따른 자유일 뿐, 실질적인 자유가 아니다. 실질적인 자유에서 실질은 배타적인 소유와 처분을 통한 향유를 넘어서는 데서 주어진다. 함께 향유 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는 결과물들, 예를 들어 예술과 문학, 학문과 기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종교 등을 향유 하는 데서 자유의 실질이 주어진다.


배타적인 나의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는 자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적이라고 여기는 자의 입에서 발설되는 자유에 대한 강조는 무지와 확증 편향에 따른 것으로서 자유의 실질을 파괴한다. 남들을 지배하는 권력만이 자유를 가능케 한다고 생각하는 자의 자유는 남들은 물론이고 저 자신마저 노예로 만든다. 이러한 자의 생각이 뭉쳐지게 되면 자신만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자유를 자신에게 일관되게 맞추어야 한다는 파쇼적인 사상이 된다. 파쇼는 자유주의의 적이고, 더욱이 진보주의의 적이다. 최대한 보편적인 실질의 평등을 통해서만 실질적인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그런 만큼 자유를 훼손하는 자다.


현행법은 현실 권력의 충돌과 타협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는 현행법의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등과 자유의 일치를 방해하는 법은 그런 만큼 배타적인, 자유 아닌 자유를 위한 것이기에 수정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의 궁극적인 정당성을 고려하지 않고 법의 한계를 무시하고 현실 권력의 법을 절대적인 양 내세우는 자는 실은 법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거머쥔 현실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고자 법을 악용하는 것이다. 그 증거는 자신의 배타적인 유불리를 따져 배타적 · 선택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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