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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응자, 지진아 어른들이 만드는 대안학교(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48
조회
192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날씨가 유난스럽다. 4월이 되도록 추위의 기승과 눈과 비가 그렇다. 어제 껍질을 뚫고 나온 개나리와 훈훈한 날씨로 두터운 옷을 벗어버린 오늘, 그러나 야속하게도 춥다. 과연 봄은 오려나? 자연의 봄도 봄이지만 사회의 봄은 언제나 오려는지,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리만치 사회적 냉기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둘러싼 환경은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성폭력과 성추행으로 뒤범벅된 정치인들이 복귀를 시도하고 있고, 깃발만 꽂으면 된다는 당선가능성은 정당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그로인해 여성들의 저항에 부딪혀 무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복당, 공천의 수순을 밟고 있다.

백령도 앞바다의 해군함의 수몰은 뭔가 께름칙함을 남겨두고 있으나 군 당국과 정권은 연일 미심쩍음만 남기고 실종자 가족들의 복장만 터지게 하고 있다. 이 모두가 정권의 획득과 연장을 위한 짓거리들 이라는 판단이 든다. 정권획득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양심을 팔도록 강요하는 무엇이 된 데는 어떤 이유가 있나? 정치권력과 그 획득의 과정이 국민들의 생활과 삶을 파괴하면서 존재하도록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치란 누가 뭐래도 일상의 삶과 생활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된 이러한 사태는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질문이 필요할 때이다. 우리가 그 과정에 동조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 앞에서 모든 것이 무화되고 희생되어버리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것은 분노를 넘어선 고통이다.

한편에서 정부는 ‘사회복지정보시스템’ 사용의 강제와 ‘지정기부금단체’에 대한 조건을 강화하고 기존의 단체들이 그 조건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체의 투명성과 관리의 효율성을 논리적 근거로, 국고보조금의 중단과 지정기부금단체에서의 배제를 협박으로 하는 두 제도의 핵심은 ‘단체 활동과 예산 상황에 대한 장악’ 과 ‘통제’에 있다. 여성단체는 특히나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로 여성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과 자립을 주요한 활동내용으로 하면서 그 피해자들의 정보를 전산망에 올려놓아야 하고, 후원자들의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모든 신상내역을 입력하고 사회복지통합전산망이라는 온라인 유통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피해자의 신상은 최소한의 조건으로 노출되도록 해온 지금까지의 관행에 전면 위배되는 정책방향이라 상당히 혼란스럽고 따라서 사용 자제를 요구중이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정부는 국고보조금을 받는 단체 외에,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하는 모든 민간단체들에 새로운 법령을 강요하고 있다., 일부 정관을 수정해야 하고, 통장을 통합 등록하여야 하며, 2년간의 결산 및 예산과 활동내용을 보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국고보조금을 받는 단체가 아니라 순수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고, 공익적 성격을 갖는 단체 활동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는 비판이 일 수 밖에 없는 지점이다. 한편에선 공익성을 띈 ‘민간단체 죽이기’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결말이 나고, 어떤 민간단체들이 기부단체로 지정되는 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문제는 기부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조치가 그나마 나눔과 기부의 관행을 퇴행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혹자는 이 기회에 기부금영수증 없이 후원할 수 있는 후원자들과 함께하는 진정한 운동(?)으로 거듭날 기회라고 하지만, 그렇게 의미와 비장함만 갖고 대응하기엔 현실적 절박함 들이 존재한다. 이 대목에서는 시민들의 협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단체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것은 단체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동무역할을 하고 있음이다. 3월 한 달간, 전국에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이들을 모아 직무연수를 진행하였다. 교육과정에는 서로를 드러내어 나누는 시간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새롭지 않으나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본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어느 면에서든 ‘지진아’ 이거나 ‘부적응자’들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삶의 경로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공통적인 점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개인적 저항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제도권 교육을 일찍이 박차고 나왔던 이, 가부장적인 집안분위기에 저항하여 집을 나온 이, 모태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의 절망.... 이들이 겪었을 배제된 자로서의 삶의 경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다수 비슷한 경로의 삶을 겪어온 이들인 만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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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국여성의전화


우리 중 누군가는 그래서 여기를 ‘대안학교’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대한 대안학교. 참 그럴듯한 말이다. 아이들만 대안학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인이지만 여전히 부적응하는 자들, 기득권-적응된-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진아’들인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는 더욱 필요하다. 성인은 아이에 비해 동정의 여지가 적기 때문에 기회도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성이 수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부적응자는 필연이다. 더욱이 사회구성원 중 일부가 일부에 의해 현저히 억압되거나 왜곡됨을 강요당할 때 아웃사이더의 양산은 당연한 현상이 된다. 이러한 아웃사이더들이 모여서 위로받고 지지받고 지지해주어 집단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필요하고 다행히 내가 속한 곳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위로와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누구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서라도 사회적응에 목을 매고 그만큼 적응하고 누구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만 적응 못하거나 적응을 거부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프다.

삶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나, 누구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누구는 자신의 삶을 포기함으로써 파괴한다. 그리고 사회제도는 그러한 간극을 더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복지정보시스템이나 지정기부금단체에 대한 조건의 강화는 그 중간지대에 새로운 적응상황을 만드는 것들을 애초에 차단하는 형태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결국 제도에 순응하는 제도화된 시민단체를 양산하거나 탈 제도화된 시민단체를 양산할 뿐이다. 순응하거나 벗어나거나 양자택일을 강요할 뿐이다. 시민단체의 영역은 제도화와 제도 밖, 탈 제도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에 있다. 시민단체 활동의 영역자체가 다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는 오로지 한 길, 순응하거나, 배제됨으로서-시민단체 생존권을 버림- 생존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택하게 되게 한다. 양극화는 이제 시민단체의 양극화로 확대되고 있는 경향이다.

이러저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이러저러한 대안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한다. 제도자체에 대한 저항을, 제도밖에서의 저항을, 그리고 제도자체에 대한 저항을. 아무래도 뾰족한 대안은 없다. 다만 추방되거나 스스로 벗어난 자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 공간을 바탕으로 사회질서에서 거부되거나 거부한 자들이 정체성을 선명히 하고, 그들의 경험을 보편화하고 일탈/부적응의 맥락을 드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곧 획일성에 다양성을 포함시켜가는 과정이자 기존사회질서에 대한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곧 대안의 학교로서의 여성/시민단체여야 한다. 기존의 상식을 상식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과정-정치가 삶의 위에 있지 않고 삶을 위해 존재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이 다양한 현존하는 대안학교-여성/시민단체-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부적응한 이들, 지진아들의 대항의 공간으로서의 대안학교에 다니는 나는 행운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