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뽀빠이의 추억(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7:33
조회
139


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득바득 살림을 일구던 부모님은 아들을 유치원에 보낼 여력까진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소꿉놀이를 했다. 나에게도 소꿉친구가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했다. 우리는 뒷산에 올라 진달래를 따먹었다. 여자 아이는 풀잎 뒤에 매달린 달팽이를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배시시 웃었다. 여자 아이가 하자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자”고 여자 아이가 말했다. 교회에 가면 돈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유치원이 있다고 했다.

지방 도시의 교회에는 널찍한 강당이 있었다. 코흘리개들은 마룻바닥에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점심 무렵이 되면, ‘뽀빠이’를 나눠 줬다. 라면을 구워 만든 과자였다. 과자 봉지 안에는 작은 ‘별사탕’도 있었다. 그저 입에서 스스르 녹는 별사탕은 별천지였다. 별사탕을 먼저 먹을지, 나중에 먹을지 항상 고민이 심했다. 뽀빠이가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별사탕이 있기 때문이다.

뽀빠이 때문에 그 아이와 멀어지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100여명의 코흘리개들이 오직 뽀빠이만 쳐다보고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 어른들이 나눠주는 뽀빠이는 항상 부족했다. 뽀빠이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쟁탈전이 치열해졌다. 아이들은 줄을 서지 않고 우르르 몰려 들어 어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센 아이들은 꼭 뽀빠이(그리고 별사탕)를 차지했고, 숫기 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렸다. 어떤 아이는 울었다. 어른들이 말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내일은 꼭 (뽀빠이를) 받을 거야.” 그건 옳지 않았다. 힘이 약한 아이들도 과자를 받을 수 있도록 줄을 세우고 차례를 정하면 부족하나마 공평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교회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성들여 기도하고 또다시 뽀빠이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나는 보았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뽀빠이를 매일 받아먹을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교회를 드문드문 나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한 아이는 그런 나를 타박했고, ‘뽀빠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 아이에게 나는 서운했다. 우리는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헤어졌다. 그 아이가 이사를 갔다. 이사 가던 날, 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콧물 흘리는 지저분한 사내 놈들과 구슬치기를 시작했다. 사내 녀석들은 진달래 대신 솔방울을 모아 전쟁놀이를 했다.

뽀빠이의 기억이 도드라지는 때가 있다. 해외 취재 때, 현지 한인 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취재에 도움을 준 교민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뽀빠이 문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지 30여년만에 교회에 나간 셈인데, 또 한번 놀랐다. 목사의 설교는 “요즘 한국 교회에서 이단 종파가 ‘잠입’해 장로와 집사 자리를 차지한 뒤, 목사를 몰아내는 사태”에 대한 개탄과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험담과 “그런 일이 우리 교회에선 없을 것으로 믿는다”는 당부 섞인 경고가 주를 이뤘다. 나는 예배가 편치 않았다. 사랑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증오의 언사만 귀에 담은 듯 했다. 뽀빠이의 기억은 정화되지 못했다.

나는 믿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믿기보다 의심하는 일을 주로 한다. 다만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 사상·양심의 자유의 맥락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고, 그것은 각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침의 영역이다. 나의 사상·양심·종교를 잣대로 타인의 사상·양심·종교를 타박하면 안 된다.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형태를 존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과 명절 차례를 거부하는 개신교와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가톨릭의 금기와 습속을 나는 진심으로 존중한다.

다만 (모든 믿음을 존중함에도) 모든 믿음을 좋아하진 않는다. 예컨대 교회의 붉은 십자가 전광판은 ‘싫다’. 밤거리를 헤매는 노숙자에게 화장실을 개방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부족한 전기를 쏟아 부어 홍등가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주택가 곳곳에 밝혀야할 이유가 없다. 밤마다 문을 걸어 잠그는 교회에 왜 유혹의 네온사인이 필요하겠는가. 예컨대 대통령의 기도는 ‘싫다’. 대통령이라면 공개석상에서 반복적이고 노골적으로 특정 종교의 기도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교분리 원칙이 엄연한 헌정국가의 수반은 헌법의 경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일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종류의 중층적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유독 대통령은 오직 목사의 시선만 의식하며 사는 것 같아 ‘싫다’.

낮은 곳에 임하여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목사·장로·집사·신도가 있는 것을 안다. 비종교인인 내가 종교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조건 없는 헌신과 사랑을 실천할 때다. 그러나 헌신과 사랑이 아닌 것을 향하여 기도할 때, 나는 그 종교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1304403267_7000685903_20110509.JPG


사진 출처 - 한겨레21


종교는 인격으로 현현한다. 어느 종교건 믿음을 가진 자들이 믿음을 바탕으로 사람의 힘을 입증할 때, 그 믿음이 빛난다고 나는 믿는다. 선량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기독교도와 불교도와 무슬림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코란을 끼고 인질을 참수하는 무슬림은 싫다. 신도 머릿수대로 가격을 매겨 교회 매매 광고를 내는 목사는 싫다. 신도들의 돈을 받아 외제차를 몰고 산사를 드나드는 스님은 싫다.

이런 일반론에 입각해 두루 평균적으로 봐주려 해도, 자꾸 목사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눈에 밟힌다. 다른 종교보다 월등한 ‘사회적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결코 조용하지 않다. 코흘리개들에게 뽀빠이를 먹을 수 있다는 당근과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를 던져놓고 기도를 익히게 하려했던 장로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박애와 봉사의 말씀 대신에 다른 종파에 대한 증오와 공격의 언사를 늘어놓는 목사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여론을 통한 성찰과 회개는 내팽개치고 하나님의 용서만 구하는 대통령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할리 없다고 나는 믿는다.

올해 초, 일본 지진에 대해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무신론·물질주의로 나간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했던 조용기 목사가 다시 기사에 등장했다. 교회 사유화 논란 끝에 물러나기로 했으나 사실은 순복음교회의 실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인류의 재앙에 하나님의 경고를 들이대고, 신자들의 공동체여야 마땅한 교회를 집안 재산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습속이다. 그런 목사들이 가장 힘 있고 돈많은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한다면, 나는 그들이 믿는 신이 ‘싫다’. 그들까지 보듬어 안는다면 참 졸렬한 하나님 아닌가.

※ 웹진 <단비뉴스>에 실린 칼럼을 첨삭·보완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