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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이 더 단거 모리나!” - 여성주의(를 지향하는)자의 고백과 궁금증(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7:34
조회
132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몇 년 전부터 동문회니 동기회니 하는 모임들이 하나 둘 씩 늘어가고 있다. 아마도 나이 40줄에 들어서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얌전하고 적극적이지 않던 친구들이 동창회를 주도하기도 하고, 괄괄한 성격에 많은 일들을 주도해서 모임도 주도할 것이라 여겼던 친구들은 오히려 모임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명확한 주제가 없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남성들이 많은 집단이 주는 위계적인 문화에 그런 모임들이 벅차기도 하다. 이것도 병이지 싶어 가급적 모임이 있으면 참여를 하는 편이다. 모임참여의 우선 목적은 ‘운동권’이란 테두리 안에 갇혀 지내는 나를 성찰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동물이기에 조금 어색해도 자꾸 어울려야 한다는 자기최면을 걸기도 한다.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만남, 소위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이란 것이 끼리 끼리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주만나야 교류와 소통이 형성되고 그럴 때 다른 생각들이 만나고, 사람들이 상호변화를 통해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을 굳이 육체적인 것과 사회정치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은 아마도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성장시키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리라.

나는 육체적인 생명 외에 사회정치적으로 ‘여성주의자로서의 생명’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여성주의인가? 라는 질문은 나를 곤혹스럽게도 하지만 무엇이 여성주의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제법 답을 내어놓을 수 있다. 물질만능, 위계, 폭력, 차별, 억압, 전쟁, 경쟁, 이기주의, 자연파괴 등. 여성운동이란 남녀관계의 위계적인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모든 활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대결로 몰아가는 식으로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을 해석하는 것은 반대한다. 여성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여성운동은 가깝게는 남성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사회정치적인 질서와 문화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에 있다. 그동안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고 유지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재구성과 재조직을 목표로 하는 어쩌면 지난한 대안을 만드는 작업과정이다. 이는 현재의 사회정치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 생활패턴을 전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쩌면 여성주의, 여성운동은 기존질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도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여성주의는 아주 편협한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여성운동을 하는, 그리고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에 대해 모난 척, 잘난 척, 남성 적대적이라는 혹평이 붙고 그리하여 때로는 공공의 적이 되기도 한다. 항상 날을 세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성주의를 지향하면서 살고자 할 때는 스스로에 의해서보다는 남에 의해 날이 세워지는 경우들이 생긴다.

나는 전교생이 280여명이던 좀 작은 시골초등학교를 다녔다. 전교생이 얼마 되지 않아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이름과 얼굴을 다 욀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초등학교도 매년 총동문회를 개최하고 체육대회를 진행한다. 올해도 이번 달에 총동문회가 열렸고 매년 참석권유를 받기만 하고 참석치 못했던지라 연휴에 고향 어머니도 뵐 겸 동문체육대회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체육대회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인삼각경기도 하고 단체 줄넘기도 하면서 즐거운 한나절을 보내며 흥겹게 그 시간을 즐겼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흡연문제로 남자동창이 시비를 걸고 물건을 던지고, 언쟁이 오가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날 뻔하다 수습되기까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로인해 즐겁던 모임은 순식간에 찬물 끼얹은 듯 냉랭해지고 나는 분노와 억울함에 치를 떨면서 그 뒤 며칠을 엉망인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80년대 겪었던 흡연문제를 이 나이에 다시 겪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과 그 동창 놈과 주변에서 사태가 위기로 진전될 때까지 구경만 하던 친구들에 대한 분노가 좀체 가시지 않아 마침 고향집에 온 동생들과 언니들에게 고자질을 해대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쫓아가 똑같이 복수를 하고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내 편이 되어 함께 그 원수 놈을 욕해주길 바랐던 내 기대와 달리 언니는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언니가 경남의 시골마을 버스를 탔는데 할아버지 두 분이 타시면서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탈 수도 있으니 떨어져 안자고 하셨단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 옆 자리에는 불행히도 지팡이를 짚으신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께서 앉게 되셨다. 그러자 할아버지 왈 “늙은 호박꽃도 꽃인가?”라고 비꼬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흘기는 사이 할머니께서 응수하시기를 “늙은 호박이 더 단거 모리나?” 하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같이 할아버지에 대한 고소함과 할머니의 재치에 감탄하여 웃었다고 한다.

앞에서 여성주의란 기존질서와 가치에 대한 전복이자 대안을 형성해내는 과정이라고 장황히 언급하였다. 언니의 일화를 듣는 순간은 ‘할머니 참 재치 있으시다.’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그 친구가 전화와 문자로 사과를 하였으나 받아들일 맘이 나질 않았다. 오로지 복수 외에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대응 방식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버스안의 할머니는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농담으로 할아버지를 무안함으로 한방에 제압하고 승객들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를 고민하면서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폭력을 이기는 것이 비폭력저항이고 전쟁을 이기는 것은 평화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보복중심의 갈등해결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폭력성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무슨무슨 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과정이 그러한 주의를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설득력이 생긴다. 더불어 안과 밖이 일체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입 따로, 몸 따로 갈 때 그의 말은 설득력을 잃고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나는 얼마나 여성주의자라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삶의 과정에서 겪어왔던 날선 갈등과 상처의 자국에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가끔 비열하게도 약한 고리를 찾게 되면 폭발한다. 이런 한계와 모순덩어리가 나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것이 나의 한계라는 점을 안다. 알게 되면 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아니 매순간 시작해왔는지 모른다. 사람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지만 변화가 그리 쉬운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한계를 고백하는 순간에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남자들은 자기가 모든 여자들의 남편이나, 오빠,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것도 꽤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진정한 남편이자 오빠, 아버지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현 한다고 하면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