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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참회록을 쓴다(김희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6-12 14:59
조회
1042

김희교 /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윤석렬 대통령이 대만의 문제가 곧 북한의 문제이자 세계의 문제라고 발언하던 날 저녁, 다시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을 틀었다. 정부가 위기의 한 복판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시점에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라도 뭔가 혜안을 찾고 싶었다. 역사는 공시성만큼이나 통시성이 존재한다. 그 때 그 일이 지금 일어날 리는 없지만 이 위기를 우리 힘으로 넘길 수 있을 수 있는 한 올의 실마리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중


 

지금의 위기는 병자호란 시기와 유사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국면적 위기가 아니라 체제적 위기란 점에서 그렇다. 조선에게 명·청 교체기는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다. 지배계층의 세계관이었던 사대주의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중화의식의 위기이자 중화체제의 위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가 흔들리고 있고, 한국 주류의 반공·친미주의가 근본적으로 도전받는 시기이다.


 

떠오르는 세력들을 적대화하고 기존의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주전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점도 그 때와 유사하다. 그때의 주전파들과 지금의 한미일 삼각 동맹파 들은 공통점이 있다. 저무는 세력의 힘을 신성화하거나 과대평가한다. 그들을 따르는 것이 곧 대의라는 주장도 비슷하다. 대의를 위해서는 국익을 희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떠오르는 세력과 대화나 타협보다 싸워 이기는 것이 미래를 위하는 길이라는 주장도 매우 유사하다.


 

지금의 미국의 지위는 그때 명나라의 지위와 유사하다. 미국은 이제 전 세계 GDP의 겨우 25%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패권을 장악하던 시기의 반 정도에도 못 미친다. 올해 예상 경제성장율은 1% 대이다. 이미 구매력기준 실질 GDP는 중국에 뒤졌다. 그들의 핵심 동맹국인 G7을 다 합쳐도 44%에 그친다. 세를 불리고 있는 브릭스(BRICS)에게도 뒤진다. 미국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맹국을 동원한다. 그러나 동맹국의 국익을 보전해 줄 여력이 없다. 그러니 핵심동맹국들은 더 이상 미국의 속국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다.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중국과 디커플링에 동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독일이 그렇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국의 적국인 이란과 손잡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은 또 있다. 대의니 명분과 같은 가치를 떠드는 자들은 백성들의 생명권이나 민생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남한산성에 살던 대장장이 날쇠에게는 “전하와 사대부들이 청을 섬기든 명을 섬기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아끼는 동생을 살릴 수 있으면 되고,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 겨울을 배곯지 않고 날 수 있는 세상”이면 된다. 미국 편에 서서 일본과 협력하여 중국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외치는 지금 정부의 이념 놀음에는 날쇠의 삶에 대한 걱정이 없다. 지속되는 무역적자에도, 언제 일어나도 이상할 리 없는 전쟁의 위기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의 1970년대 식 이념놀음에 지금 국민들은 남한산성의 갇힌 대장장이 날쇠 꼴이 되어있다.


 

하기사 이들이 이럴 줄 몰랐던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중국을 적대화하는 신냉전 세력이 단숨에 득세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제도적 민주주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와중에도 반공·친미주의는 본질적으로 해체되지 않은 채 대물림되고 있었다. 1970년대 친미반공국가로 회귀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꽤 오랜 기간 그들의 시대로 회귀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가 무시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추락하는 시대에는 추락한 엘리트들과 몽매한 시민들이 있다. 그것이 독일에서 나치의 등장을 연구한 일상생활사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독일의 평범한 시민들도 나치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침묵하거나 방관했던 결과가 나치의 시대를 열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위기를 대통령만 탄핵하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런 대통령을 뽑은 사람들이 건재하고 있다. 그런 대통령이 섬기는 미국이 좋다는 사람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한순간에 다시 1970년대로 회귀하는 이유 중에는 그런 회귀의 시대를 준비하지 못한 시민들의 안일함이 숨어있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주전파 김상헌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책임을 지고 자결을 택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란 임금과 같은 낡은 것들이 사라지고, 주전파나 주화파가 필요 없는,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었다. 다행히 수백 년이 흘러 이 땅에서 임금은 사라졌다. 전제군주제는 무너지고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김상헌이 말한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공화제는 그저 1차 층위의 민주주의를 가져다 준 민주주의의 한 부문일 뿐이다. 2차 층위의 주권의 민주주의, 3차 층위의 국가간 평등이라는 민주주의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 여전히 우리 주권의 절반쯤은 남에게 맡겨져 있다. 남의 전쟁에 뛰어들라고 하면 뛰어 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처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의식이다. 그런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세력을 쥐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설파한 것처럼 의식은 제도를 초월해서 유전된다. 의식은 의식대로 청산되고 다시 형성되어야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근대의 꿈을 상실했다. 온전한 주권국가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이 우리 민족의 근대의 꿈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핵을 느끼기 위해서 미국에게 주권을 가져다 바치는 전근대인들이 우리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평온하다. 수많은 청년들은 소비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마치 더 나은 세상은 필요 없다는 듯 살고 있다. 역사상 가장 보수화된 20대가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말을 맞은 것처럼 등장했다. 다수의 노년들은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전쟁이 북한과 중국을 적대화하기만 하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또 다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는가? 병자호란 때도, 조선말에도, 한국 전쟁이 끝나고도 한국 민중은 한 번도 제대로 그들의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동학 농민들의 꿈은 일제와 썩어빠진 지식인들의 야합에 짓밟혔다.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타율적 역사 속을 걸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 위기만 온 것은 아니다. 다시 기회가 왔다. 지금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 역사를 만들 힘이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냉전 세력에 편승하여 역사를 거꾸로 걷지 않아도 정치경제적 힘이 있다. 세계정세도 우리의 근대의 꿈을 실현하기에 나쁘지 않다. ‘글로벌사우스’가 G7에 버금가는 힘을 가져 나가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고 있지만 미국의 패권을 대신하여 미국식 패권시대를 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자주의 시대도 열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만들어 구획지어 주는 대로 살아야 했던 그 때와 다르다.


 

무엇부터 할 것인가. 이미 이 정부가 우리의 근대의 꿈을 이루어주길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우리 힘으로 날쇠의 시대를 열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일상부터 변혁해야 한다. 지금 여기는 시대의 길을 터야 할 이 땅의 엘리트들마저 일상에 매몰되어 있다. 위기를 말하는 언론인이 없고, 길을 제시하는 교수가 없으며, 새 길을 열고 자 노력하는 정치가가 없다. 중요한 시대마다 나태한 엘리트들에게 길을 열라고 경종을 울려왔던 청년들은 일상에 빠져있다. 소비자의 정체성을 가진 채 아르바이트에 목 매달고 반지성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큰 싸움이 전개되는 지금, 우리는 남한산성에 갇혀있다.


 

좀 더 많은 근대의 꿈에 매달리는 시민이 등장하지 않는 한 다시 타율적 역사를 걸을 수 있는 시기이다.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이 울리도록 조아리고 있는 지도자가 두 번 다시는 나와서는 안된다. 윤동주의 시를 빌리면 시대가 살기 어렵다는 데 일상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오늘부터 나부터라도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다시 참회록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