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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범죄의 공소시효 배제(서보학)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6-07 10:04
조회
335

서보학 /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5월 8일 국회에서는 국가폭력범죄의 공소시효 배제 입법화를 위한 국회 토론회가 열렸다. 주최는 고 최종길 서울법대 교수 50주기 추모위원회였고 필자는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고 최종길 교수는 1973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항의하는 학생들 편에 섰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30년이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최 교수가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고문과 살인에 관여했던 중앙정보부 및 검찰 관계자들은 15년의 공소시효가 지나 아무도 형사처벌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상범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 및 생명 침해를 막기 위해서는 국가폭력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률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권고하였고, 이후 수차례 국가 폭력범죄의 공소시효 배제를 위한 입법안이 제출되었지만 아직까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출처 - 미디어오늘


 

공소시효제도는 행위가 종료된 형사범죄에 대해 검사가 법에 정해진 일정 기간 공소를 제기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 시효기간의 경과와 함께 국가의 소추권이 소멸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공소시효제도는 “시간의 경과가 상처를 치료해 준다”라는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범죄행위가 오랜 시간 동안 소추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다면 범죄행위로 초래된 법질서의 파괴가 이미 상당 부분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자 자신도 형벌에 상응하는 고통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다시 범죄자를 처벌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다(형벌필요성의 감소ㆍ탈락). 나아가 오랜 시간의 경과로 증거가 멸실되어 실체적 진실발견이 용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진실발견의 어려움과 오판의 가능성), 한정된 인적ㆍ물적 자원으로 끊임없이 증가하는 사회의 범죄현상에 대처해야 하는 형사사법기관으로서는 묵은 사건은 털어버리고 새로운 사건 해결에 전념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있는 것(형사사법의 경제성 측면)도 공소시효제도를 필요로하는 이유이다.


 

반면 공소시효제도는 단지 시간이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생명ㆍ인권ㆍ자유ㆍ성적 존엄성ㆍ재산을 침해한 범죄인들을 오히려 정당한 형사처벌로부터 보호하는 결과를 초래해 정의의 요구에 반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사실이다. ’법은 정의에 봉사하는 법이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법철학적 명제가 지켜지지 않을 때 국민들은 법제도를 불신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공소시효제도가 배제되는 범죄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난 1995년 제정된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은 형법의 내란죄ㆍ외환죄, 군형법의 반란죄ㆍ이적죄, 국제법이 규정하는 집단살해죄 등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였다.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은 강간등 살인ㆍ치사죄 및 아동ㆍ청소년에 대한 강간ㆍ강제추행 등의 죄에 대해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고 있다. 형사소송법은 2015년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였다(속칭 태완이법).


 

이미 여러 국제법은 소위 반인도적 범죄들에 대해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고 있다. 예컨대 1968년 UN총회에서 채택된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제정법상의 시효의 부적용에 관한 협약’은 전쟁범죄, 무력공격과 점령에 의한 추방, 인종차별정책으로 인한 반인도적 행위, 집단살해범죄 등에 대해 어떠한 제정법상의 시효규정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은 집단살해를 국제적 범죄라고 규정하고 행위자는 신분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처벌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51년 이 협약에 가입했다. 1998년 로마회의에서 마련된 ‘국제상설형사재판소를 위한 규정’은 살인, 절멸, 노예화, 강제이주, 국제법의 근본원칙에 위반되는 구금이나 심각한 신체자유의 박탈, 고문, 강간, 성노예화, 강제된 매춘과 임신, 단종, 기타 신체에 심대한 고통을 주기 위해 고의로 범해지는 비인도적 행위 등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이러한 범죄가 “국가 또는 조직적 정책에 수반하여 또는 그 연장선에서” 범해졌을 경우 공소시효가 배제됨을 명문화 하였다. 이러한 국제법 규정들은 전쟁범죄ㆍ반인도적범죄ㆍ집단살해범죄들에 대해서는 시간의 경과로 면죄부를 부여하지 않고 범행 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에 상관없이 반드시 형사처벌을 하는 것이 정의의 원칙이나 인류의 보편적인 법감정에 비추어 보아 타당한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본고에서 문제 삼고 있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폭력범죄에 대해서는 아직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입법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컨대 국가공권력에 의한 불법체포ㆍ감금, 상해, 폭행(고문ㆍ성고문), 공갈ㆍ협박을 통한 자백 강요, 사건 조작, 증거 위조, 물리력을 동원한 과도한 집회ㆍ시위 진압, 공안기관의 사찰ㆍ감시, 민간시설에의 불법수용을 부당하게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경우 등 국제법상의 반인도적 범죄에 포함시킬 수는 없지만 시민의 자유ㆍ인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국가폭력범죄는 국가권력 자체 또는 국가권력의 용인하에 저질러지고, 국가기관에 의해 그 진실이 조작ㆍ은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를 실효적으로 예방ㆍ처벌하기 위해서는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는 입법조치를 마땅히 취해야 한다. 판사ㆍ검사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법왜곡 행위(수사ㆍ기소권 및 재판권을 남용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법왜곡죄를 신설해야 하고 이 범죄에 대해서도 당연히 공소시효는 배제되어야 한다. 과거 군사독재ㆍ권위주의 정부하에서 무수히 많은 시민들을 억울하게 옥살이 시켜 인생을 파탄에 이르게 한 판사ㆍ검사ㆍ공안기관원들이 단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는 현실은 많은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하지 않았던가. 우리사회의 민주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척되었다고 믿었던 2013년에도 국정원ㆍ검찰에 의한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에 대한 간첩조작 사건이 버젓이 벌어졌다.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자단체를 범죄집단과 동일시 하고 여러 방면에서 공안기관에 의한 대대적인 간첩색출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매우 불길한 기시감을 들게 한다.


 

여당이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폭력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쉽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년 총선에서 민주ㆍ인권 정치세력이 다시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여 이 문제에 대한 입법을 완성해 주기를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