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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추상적 보편자인 자본의 운명(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1 09:40
조회
254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보편자 논의의 시발점


 요즈음 (사)철학아카데미에서 <대결로 본 서양철학사>라는 강의를 하고 있다. 1월 27일 금요일 저녁에는 ‘중세의 보편 논쟁’에 관한 강의를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논쟁은 11세기 초에 안셀무스(Anselmus of Canterbury, 1033~1109)의 실재론에 이어 아벨라르두스(Petrus Abelardus, 1079~1142)의 명목론이 제출됨으로써 격화된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가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인간의 정신과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이데아는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해 보편자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이러한 플라톤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 안셀무스의 실재론이다. 그런데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낱말들밖에 없고, 흔히 말하는 사물의 실체나 본질을 보편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자란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 셈이어서 명목론이라 부른다.


 이 보편 논쟁이 심각한 의미를 가진 것은 기독교의 전통에 있어서 신을 절대적인 보편자로 여겼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이 절대적인 보편자라는 것은 신은 결코 현실의 개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전제 하에서,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 이른바 신의 ‘편재성’ 내지는 ‘무소부재’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시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강의를 통해 이 같은 신의 절대적 보편성을 설명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근대의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피노자는 ‘신=자연=실체’를 제시하면서 모든 개별자들 하나하나는 신의 부분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신이 보편자임을 염두에 두고서 이를 재해석하면, 보편자인 신은 개별자들로 분화되어 나타나면서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체의 것들을 무한히 망라해서 포섭하는 데서 성립한다. 개별자들이 없이는 결코 보편자가 성립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경외해마지 않은 인물이 바로 헤겔(G.W.F. Hegel, 1770~1831)이다. 헤겔은 그 유명한 자신의 변증법을 통해 결코 유한자와 대립되지 않는 무한자를 제시하면서 이를 진정한 무한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무한자를 존재론적으로 실현한 것이 절대정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헤겔은 이를 ‘구체적 보편자’라고 하면서, 현실에서의 그 실질적으로 구현된 형태로서 국가를 지목한다.


 헤겔이 말하는 ‘구체적 보편자’는 개별자들의 공통점만을 추상적으로 끌어내어 성립하는 보편자도 아니고, 개별자들과 독립해서 따로 실재하는 보편자도 아니다. 거칠게 간추려 말하면, 그가 말하는 ‘구체적 보편자’는 첫째, 개별자들을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둘째, 개별자들이 갖는 부정적인 한계를 부정함으로써 개별자들을 넘어서고, 셋째, 개별자들이 갖는 긍정적인 위력들을 자신의 위력으로 삼는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은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 제시하는 ‘신=자연=실체’를 구체적 보편자의 모델로 본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의 변증법은 한편으로 스피노자의 현실의 개별자들이 무한한 보편자인 신과 갖는 관계를 생성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보편적인 하나의 몸이다. 이 ‘교회=몸’에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외 몸의 지체들은 신도들이다. 그리고 그 활동성의 원리는 ‘코이노니아’, 즉 친교이다. 이 ‘코이노니아’는 오늘날 많이 언급되는 소통의 어원이지 싶다. ‘교회=몸’에서 드러나는 구조는 그야말로 실제의 인간의 몸에서 확보될 수 있는 유기체성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한편으로 성부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적용하게 되면, 신과 인간들이 한 몸을 이루는 셈이다. 게다가 만약 ‘코이노니아’의 근원을 성령으로 보면서 아울러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적용하게 되면, ‘교회=몸’은 곧 스피노자가 본 ‘신=자연=실체’와 거의 유사한 존재론적인 구조를 띠게 된다. 이는 유대교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론이다. 그러고 보면, 유대인이었던 스피노자가 자신의 신론 때문에 유대교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것은 스피노자가 기독교적인 교회론에 입각한 신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수령은 머리이고 당은 가슴이고 인민은 온 몸의 지체라고 해서 수령이 인민의 고통과 행복의 방향을 모를 수 없다고 하는 이른바 주체사상의 수령론이 기독교적인 ‘교회=몸’ 이론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스피노자-헤겔의 노선을 따른 이른바 구체적 보편자에 관한 존재론을 활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종교와 정치는 근본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근대 서구의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북한의 주체사상의 수령론과 그에 따른 정치 체제가 워낙 종교적인 방식으로 교리화 되기 때문에 비난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종교와 정치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특히 ‘교회=몸’을 강력하게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가톨릭의 체제는 비난하지 않으면서 북한의 정치 체제를 비난한다는 것은 다소 불균형한 태도이다. 더욱이 교황이 통치하는 바티칸과 같은 종교국가의 정치 체제를 아울러 생각하면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정치 체제를 그 이유만으로 비난한다는 것은 더욱 불균형한 태도이다.


 북한의 주체사상 특히 수령론에 입각한 정치 체제를 비판하는 핵심은 인민들이 없이는 도대체 국가라고 하는 보편자가 성립할 수 없는데, 그 보편자의 지위와 위력을 특정 개별자인 수령에게 부여함으로써 인민들의 고유한 정치사회적인 인권과 자율적인 주권을 찬탈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지어 무오하다는 교황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비록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편자를 대신하는 특정 개별자라고 하지만, 혹은 특별한 신적인 신비에 의해 머리인 그리스도를 현실에서 대변하는 자라고 하지만, 교황이 특정 개별자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바티칸이라고 하는 특수한 종교국가에서는 현실 정치적으로 수령의 역할을 하고, 종교적으로는 수없이 많은 전 세계의 가톨릭 신도들에 대해 정신 정치적으로 수령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실제 서구의 역사에 있어서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정치적인 힘겨루기를 얼마나 강력하게 수행했는가. 지금의 교황이 그런 역사적인 교황의 형태를 온존시키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신교가 생겨나면서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정치 체제를 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엄청난 개혁을 이룬 것이지만, 그 원리에 있어서는 가톨릭과 동일하다. 예수라고 하는 특정 개별자를 절대적인 보편자로서의 신적인 위치에 올려놓고서 이른 ‘교회=몸’이라고 하는 보편자를 존재론적인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2. 구체적 보편자와 추상적 보편자의 구분 


 어쩌면 이 모두를 일단 구체적 보편자의 다양한 형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보편자에서 머리가 있는지 없는지가 대단히 중요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정확하게 그것도 일종의 절대적인 형태로 머리를 갖추고 있는 구체적 보편자는 구체적 보편자가 아니라 추상적 보편자이다.


 스피노자나 헤겔이 그러한 머리를 제시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맞아 그러한 머리를 잘라버린, 이른바 ‘아케팔로스’(akephalos)를 단행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아케팔로스’는 아니다. 스피노자가 신적인 필연성을 주장한다거나 헤겔이 절대지를 바탕으로 한 절대정신을 주장한 것 등은 그들이 정말 머리를 절단함으로써 ‘머리 없는 몸’으로서의 구체적 보편자를 주장했다기보다는 ‘머리를 몸속에 집어넣은 몸’으로서의 구체적 보편자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이한 몸의 형태를 띤 구체적 보편자를 스피노자와는 달리 세속적으로 표현해 낸 인물은 철학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이다. 루소는 인민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룬다고 보았고, 그 하나로 통일된 몸을 ‘정치적 몸’으로 보고, 그 몸에서 ‘일반 의지’가 발휘된다고 보았다. 이 일반 의지에 개별 인민들이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루소의 ‘정치적 몸’과 ‘일반 의지’에 관한 이론은 스피노자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구체적 보편자의 사상적 노선에서 핵심 매개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 철학으로 들어와 흥미로운 두 철학자가 있다. 한 사람은 질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이고, 또 한 사람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이다. 들뢰즈는 '기관들 없는 몸'(corps sans organes)을 주장하고, 지젝은 ‘몸들 없는 기관들’(organs without bodies)를 주장한다.


 기관들이란 통일된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을 전제로 한다. 각 기관마다 통일된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을 유지 확대 강화하기 위한 역할이 배당되어 있다는 것이 기관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들 없는 몸’의 핵심적인 특징은 이른바 ‘머리’가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구체적 보편자에서 ‘아케팔로스’, 즉 ‘머리 잘라버리기’를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구체적 보편자에서 아예 머리를 잘라버림으로써 몸의 유기체성을 아울러 파기했다. 머리가 있는 한, 몸의 기관들이 자신에게 고유하게 할당된 그 나름의 특정한 기능들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고, 머리의 현존을 통해 유기체성이 유지되는 한, 몸의 기관들이 자신의 존재 방식과 그에 따른 기능들을 횡단적인 방식으로 바꾸어 갈아 낄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몸은 국가이고 기관들은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들뢰즈는 수령이나 교황과 같은 혹은 그리스도와 같은 머리를 잘라 내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스피노자에서 루소를 거쳐 헤겔에 이르는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몸 내부적인 머리마저 잘라버림으로써 인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횡단적인 방식으로 각기 기능들을 다각화하고 또 서로 교환함으로써 그 나름의 특이성(단독성 혹은 유일성, singularité)을 갖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런데도 몸인 국가는 그 몸에서 인민들이 특이하게 발휘하는 온갖 주름들과 횡단선들로 넘쳐나는,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된 몸을 이루는 것으로 본 셈이다. 그러나 이때 들뢰즈가 말하는 국가인 몸은 그야말로 명목적이 보편자에 불과하다. 들뢰즈는 아벨라르두스의 명목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지젝은 ‘몸들 없는 기관들’을 내세운다. 이는 지젝이 들뢰즈를 정치사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이론적인 기획에 따른 것이다. 방금 제시한 들뢰즈에 대한 국가론적인 해석을 원용해서 말하면, 지젝이 말하는 '몸들 없는 기관들'은 국가가 없이도 개개 인민들의 완전한 자발성에 의해 사회체로서의 유기적인 조직이 성립한다고 본 셈이다. 비록 국가는 없지만, 기관들이 작동한다는 것은 인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유기적 조직인 사회에서 그 나름의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고(혹은 수행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국가 소멸론을 담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발상이다. 말하자면, 국가 없는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사회를 겨냥한 셈이다.  


 이러한 지젝의 입장을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지젝이 몸을 없애면서 머리를 남겨놓은 기형을 안출한 것으로 된다. 몸의 비유에 있어서, 적어도 머리가 없이는 기관들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은 이에 대해 얼마든지 응수할 수 있을 것이다. 식물이나 하등동물처럼 뇌가 없는 유기적 조직이 얼마든지 있고 또 거기에서 기관들이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머리를 베어버린 탓에 유기적 조직이 소멸되고 아울러 기관들이 소멸된 상태에서의 국가란 그야말로 국가도 아닌 국가에 불과하기에 철저히 무정부주의적인 상태를 거쳐 결국에는 어디에선가 수령이나 교황과 같은 머리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띤 것이라고 응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젝의 들뢰즈에 대한 공격은 들뢰즈 역시 그가 비판해 마지않는 헤겔처럼 ‘머리를 몸속에 집어넣은 몸’을 주장한 것으로 된다.    


 지젝이 들뢰즈를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라고 비난하고, 또 "파시즘은 오로지 흩어진 요소들이 '다함께 공명할 때'에만 출현한다."라고 말하면서 들뢰즈가 '비합리적인 생기론적인 파시즘'을 은닉하고 있다는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주장에 선뜻 편을 든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래저래 대단히 복잡하다. 들뢰즈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체계를 대단히 싫어한다. 그러면서 그런 헤겔에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친 스피노자는 높게 평가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스피노자 식의 ‘구체적 보편자’에게는 머리가 없는데, 헤겔이 그 ‘구체적 보편자’에 머리를 만들어 붙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스피노자가 신적인 필연성을 제시한 것은 구체적 보편자의 몸속에 일종의 머리를 숨겨 넣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이 스피노자의 신적인 필연성이 루소가 말한 ‘정치적 몸’의 ‘일반 의지’를 거쳐 헤겔에 와서 절대지를 인륜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국가로 변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헤겔을 부정한다면 스피노자도 함께 부정해야 한다. 스피노자를 부정하기는커녕 높이 떠받들듯이 상찬한 것은 그 자신이 제시하는 ‘기관들 없는 몸’ 역시 암암리에 그 속에 머리를 감추고 있는 몸임을 그의 의사와는 달리 인정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또 다른 기묘한 사안이 있다. 들뢰즈가 ‘기관들 없는 몸’은 완전한 감각 자체의 몸이다. 이는 헤겔이 변증법의 출발점으로 삼은 ‘감각적 확실성’을 실체적으로 바꾸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는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우고자 한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물질 개념을 사회역사적으로 확대시킨 레닌을 존중해 마지않는 지젝이 또한 들뢰즈를 비판해마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3. 구체적 보편자인 국가와 추상적 보편자인 자본


 플라톤이 말하는 보편자로서의 이데아는 현실의 개별적인 사물들이 그러그러한 사물이게끔 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보편자인 책상의 이데아가 내가 쓰고 있는 개별자인 책상에 대해 위력을 발휘하고 내가 쓰고 있는 개별자인 책상은 보편자인 책상의 이데아를 최대한 닮고자 함으로써 바로 책상으로서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모습(Image of God)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개별적인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일 수 있기 위해서는 최대한 절대적 보편자인 신을 닮으려 하고 또 보편자인 신의 은총에 의해 그러한 닮으려고 하는 개별적인 인간이 인도받아야만 한다.


 근대 국가에 있어서 국가는 보편적인 법과 제도를 갖추고서 자신에게 속한 개개 인민들을 이른바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포섭해서 규정-지배한다. 그럴 수 있는 국가의 위력이 인민들 개개인의 천부적인 인권과 자율적인 주권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본질이다. 결국 국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개개 인민들이 현실적으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회계약론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 국가에서는 원칙상 이전의 군주와 같은 현실적인 머리 내지는 수령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민으로부터 평등한 인민으로 전환되었다고 하는 것이 근대 정치로의 전환에 있어서 핵심 사안이다.


 근대 정치에 대한 이러한 진단이 그 자체로 옳다면, 근대 국가는 플라톤이 말하는 최고의 이데아, 즉 최고의 보편자인 선의 이데아나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적 보편자로서의 신 혹은 절대적 보편자로서의 신과 동일시되는 그리스도나 그러한 그리스도를 현실에서 대리하는 교황과 같은 존재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루소-헤겔의 존재론적인 노선에 따라 말하면, ‘돌출된 머리’를 완전히 제거해버리고서 오로지 인민들로만 구성된 정치사회적인 몸인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돌출된 머리’를 완전히 제거해버린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가? 이른바 전 인민의 계약에 의거해서 대의적인 방식으로 임시적인 형태로나마 머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현실에서 보면, 개개 인민들이 직접 스스로를 제어하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를 형성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 국가가 법과 제도를 통해 위력을 발휘함에 있어서 그 근본적인 원천이 되는 개개 인민들의 위력이 직접 발휘될 수 있는 길은 현실적으로 보아 그 폭이 상당히 좁다.


 물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투표를 통해 대표 인물들을 정하는 데에 1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평소에 각종 시민사회를 형성해서 활동하고, 그 시민사회를 통해 공공성의 영역을 확장 심화해서 참여하고, 정당 활동에 참여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는 데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인민들에게 열려 있는 여러 정치적인 행위의 기회들은 비록 임시적인 형태로나마 현존하는 머리(수령)가 갖는 일방적인 지배력을 가능한 한 제한하고 그럼으로써 구체적 보편자인 국가가 그야말로 ‘머리 없는 몸’으로서 개별자인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위력을 조금이라도 더 원활하게 진작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결코 통제 불가능한 또 하나의 거대 보편자인 자본의 위력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머리 없는 몸’으로서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 왜곡되기 십상이다. 자본은 분명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과 그 노동의 산물들에 의해 결과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자본은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가 『거대한 전환』에서 말한 것처럼, 시장이라고 하는 이른바 자기 조정 기구를 통해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토지, 노동, 화폐를 상품화하고, 그럼으로써 자연, 인간, 사회관계를 상품화한다. 그렇게 상품화해서 결국에는 모든 가치들을, 그래서 심지어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자인 인민의 삶의 위력마저도 하나의 상품으로서 객관적이면서 탈색된 화폐량으로 표시되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보편자로서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성은 진정한 의미의 구체성이 결코 아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절대적 보편자인 신이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인민들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만, 그 본래의 성격은 추상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은 엄격하게 말하면 추상적인 보편자이다.


 개별자들의 위력을 바탕으로 하되 그 위력을 오로지 개별자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총괄적으로 끌어 모아 표현하는 보편자는 구체적 보편자이다. 그 반면에, 개별자들의 위력을 바탕으로 하되 그 위력을 총괄적으로 찬탈하여 오히려 개별자들을 일방적으로 규정·억압·지배하는 보편자는 구체적 보편자가 아니라 추상적 보편자이다. 물론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안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본이라는 이 추상적인 보편자는 반드시 배타적인 소유자를 필요로 하고, 그러한 소유자에게 원칙상 무한한 소유권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자본이라는 거대한 추상적 보편자의 경우, 근대 정치에서의 국가라고 하는 구체적 보편자와는 달리 원리상 얼마든지 최고의 머리(수령)를 지닐 수 있고 또 반드시 지녀야 하는 몸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체를 이루는 몸의 모든 부분들은 오로지 머리의 지배와 명령에 의거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기능할 수 있는 보편자, 즉 추상적 보편자이다. 자본이야말로 그 근본 성격에 있어서 파시즘적이다. 자본은 아예 개별자들의 주권적인 위력을 찬탈하여 역이용하기만 하려 할 뿐 그 자체의 가치 보존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그럴 때라야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보편자는 근본적으로 항상 파시즘적이다.    


 국가라고 하는 구체적 보편자와 자본이라고 하는 추상적 보편자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 원리적인 성격으로 보면, 둘은 상충하기 마련이다.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는 자본이 개별 인민으로부터 찬탈해 간 위력을 다시 개별 인민들에게 되돌려 주고자 하는 본성을 갖는다. 그 반면, 추상적 보편자로서의 자본은 국가를 이용하고자 한다. 개별 인민들이 자신들의 위력을 총괄적으로 끌어 모아 표현하는 보편자인 국가를 승인한다. 자본이 그렇게 개별 인민들이 승인한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가 갖는 위력을 찬탈하면 굳이 개별 인민들로부터 저항이나 오해를 받지 않고서도, 그러니까 최대한 합법적으로 자본은 개별 인민들의 위력을 찬탈하여 규정·억압·지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자본은 원리상 상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구도에서 보면, 둘은 언제든지 통일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건, 문제는 양자의 관계에서 어느 쪽이 더 주도권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자본은 최대한 국가를 하위 보편자로 만들어 수단으로써 활용하고자 하고, 국가 역시 최대한 자본을 하위 보편자로 만들어 수단으로써 활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원리상의 적대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자본의 보편적인 위력과 국가의 보편적인 위력이 어떻게 서로 조화 혹은 충돌하면서 어떤 결과들을 낳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어쩌면 세계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고갱이가 될 것이다. 자본이 국가를 하위 보편자로 만들어 수단으로써 활용하고자 하는 일이 대성공을 거두고 그럼으로써 경제활동이 정치활동을 완전한 수단으로 삼을 경우, 그리고 그러한 일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생겨난 파시즘 국가들의 형성과 그로 인한 파멸적인 결과들을 보아 잘 알 수 있다.


 자본의 위력이 한 국가의 위력 안에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이 오로지 잉여가치인 이윤을 매개로 자기 확대 재생산을 기한다고 하는 원리로 보아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자본은 국가 간의 관계를 포섭하기까지 하면서 최대한 국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자 한다. 자본은 근본적으로 자유무역을 지향한다. 대단히 상식적이지만, 보호무역은 그만큼 국가가 자본을 규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세계화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자본의 초국적화이다. 그에 따라 초국적의 금융 산업과 제조 기업들이 등장하는 것을 필연적인 과정이다. 하나의 초국적의 제조 기업이 국가의 법과 제도를 항상 규제로만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의 임무는 자국의 인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위력을 그 자체의 가치로서 최대한 확대 심화시켜 되돌려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자본을 수단이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국가가 초국적의 자본을 길들여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국가 간의 관계가 문제가 되고, 제국주의적인 거대 국가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국가가 초국적의 자본을 길들여 활용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국가들의 인민들이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자본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럴 때, 초국적의 자본 입장에서 보면, 제국주의적인 거대 국가가 존립하는 것이 ‘평등한’ 자립적 국가들만으로 국제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유리하다. ‘평등한’ 자립적 국가들은 그 나름의 경계를 만들어 그 경계 내에서만 자본이 활동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인 거대 국가와 초국적의 자본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한 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말하자면 거대한 구체적 보편자인 제국주의 국가와 거대한 추상적 보편자인 초국적의 자본이 한데 결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 셈인데, 이럴 때 과연 어떤 형태의 보편자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네그리와 하트가 말한 ‘제국’으로서의 추상적 보편자 중의 추상적 보편자라고 해야 할까? 왜 하필이면 여기에 근대화를 통해 이미 소멸되었다고 하는 기독교적인 추상적인 절대적 보편자가 현대 국제정치에서 쉽게 거론되는가? 추상적인, 그것도 절대적이면서 추상적인 신은 당연히 초국적이고, 또한 철저히 ‘제국주의적’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파시즘적이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초국적의 거대한 추상적 보편자인 자본의 위기이다. 추상적 보편자는 규모가 거대해지면 질수록 그리고 위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종말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 자체 개별자들의 위력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인데, 규모와 위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개별자들로부터 위력을 찬탈하는 폭과 깊이가 강화·심화되면서 제 스스로의 기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면서 제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편자란 근본적으로 이름에 불과하다는 아벨라르두스의 명목론이 한껏 귓전을 울리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