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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언행의 공감대-비혼모 교육현장을 통해 배움(신하영옥 주부, 전 여성단체 활동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1 09:37
조회
125

신하영옥/ 주부, 전 여성단체 활동가



비혼모들에 대한 교육의 기회가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 였는데, 워낙 처음의 경험에서 진땀을 뺏는지라, 고사하다가 그간의 활동과 고민에 대한 끈을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두 번째이니 좀 더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 아니 처음 때보다 더 많은 섬세함과 인내를 필요로 하였다. 그동안 경험한 교육은 대체로 성인들이자 듣고 싶어서 참가한 ‘준비된’ 교육생들이였다. 그리고 여성문제를 알고 싶거나 현실에서 문제를 겪음으로서 고민 중에 있는, 문제의식을 갖고 참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대체로 고등학교 이상의 가방끈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여성주의와 사회문제에 대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비전을 꿈꾸는 것에 대해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혼모들에 대한 그것은 그동안의 내 경험을 깡그리 뒤집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자괴감을 느끼도록 하는 과정이자 나의 훈련의 과정이었다.

먼저, 첫 번째 수업의 주제는 ‘여성주의’ 였는데 나는 사전에 잠재적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수업하였으면 좋겠는지 설문을 하였고, 연령대와 관심분야, 인원 수 등을 사전 조사하여 나름 그에 맞게 교육프로그램을 들고 갔다. 그러나... 첫 뚜껑을 열자마자 ‘쎄~한’ 분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며 진땀깨나 흘리다 마칠 수밖에 없었다. 여성문제를 알고 싶고, 여성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욕구, 즐겁고 재미있게 해 달라는 그들의 욕망에 대한 나의 판단은 어긋나도 한 참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왜? 그들은 일단 이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기관에서 들으라니 듣고는 있지만 수업이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들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은 듯했다. 다음으로 그들이 장장 4시간이라는 교육을 듣고 있기에는 임산부라는 몸이 받쳐주기엔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셋째로 그들이 즐겁게 한다는 것은 그들의 용어로 그들의 놀이 방식으로 참여식의 수업을 전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림그리기, 게임, 영화보기 등... 그러나 나의 참여방식은 워크숍에서 쓰는 작업형식- 토론하고 발표하고 코멘트하기 -이었고 내용은 활동가들이나 여성주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즉 적당히 지적욕구가 있는 이들이나 이해할 만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혼모지만 잘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었던 것이다. 여튼 그 다음부터 용어와 방식을 대폭 수정하긴 했지만 5회를 하는 내내 미안하고, 나의 계급적, 문화적 한계를 절실히 통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 두 번째 요청엔 겁이 났던 거다. 그리고 이번엔 주제가 ‘성적자기결정권’이었다.

두 번째 역시 쉽지 않았다. 아주 적은 인원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약점이 되어 한 두 명이 분위기를 흐리면 전체가 흐트러지게 되었고 이번에는 아주 강적을 만났는데 참가자들 중 누구도 그 친구의 ‘포스’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 친구의 기분에 수업분위기가 좌우되는 상황을 처음엔 최대한 큰소리와 재미있는 말들로 집중을 유도하려했으나 결국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여 폭발하고 말았다. ‘나가!’... 돌아온 말은? ‘내가 왜 나가요?’ + ‘선생님 왜 화를 내요?’ + ‘내 말도 못해요?’... 아 이런 것이 말로만 듣던 일선학교 교사들의 비애로구나... 라는 생각과 더불어 어찌어찌 썰을 풀어 잠재우긴 했지만... 그 이후 내내 어떻게 해야 할 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제압할 수 있을지 뭐 이런 생각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자괴감에 빠져야 했다. 대체 난 이들과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그동안 난 뭘 했을까? 내가 떠들어 온 여성주체들의 연대는 뭐냐? 여성주의의 확장을 말해 온 나는 대체 현실을 얼마나 알았는가? 라는... 그래서 나의 자괴감과 열등감을 해소 할 겸 그 기관의 활동가분들에게 사건들을 일러바치고 내 고민을 말하곤 하였다. 그 때마다 그 분들은 그 친구들이 자라온 가족환경, 입은 상처, 탈학교 경력 등에 자신들이 겪은 그들과의 생활에 대한 느낌을 더불어 털어놓곤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그들의 삶의 궤적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가족 내에서, 학교에서, 탈학교 후 길거리에서, 어른에서 또래까지 신체적 폭력에서 성적 폭력까지. 그들이 경험하는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말보다 주먹’으로 상대를 제압했을 때만 가능했다. 자신에 대한 존중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의 경험과 마음 안에 나는 ‘여성주의와 성적인 자기결정권’이 씨앗처럼 이미 자리 잡고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아니 적어도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의 경험과 상처, 그에 대한 극복과 수용과정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없이 나의 언어와 나의 경험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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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비혼여성축제
사진 출처 - 주간경향


그들과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은 결국 마지막 수업이었다. 마지막이 주는 안도감, 편안함이 아마도 주된 이유가 될 거라 믿지만 그래도 그간의 여러 과정과 시간이 만들어낸 약간의 공감과 이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까이 갈수록 나는 교육하는 자 라는 위선을 떨쳐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나이 때로 되돌아가서 탈선(?)하고 싶었던 또는 탈선해봤던 경험들을 가지고 그들과 그냥 수다를 떨었다. 때로는 욕설 섞은 농담도 하고, 종주먹을 들어 협박과 위협도 하는 폭력적 상황을 연출도 하고, 나의 여성폭력 경험도 나누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들과 내가 다른 시대이나 비슷한 경험과 비슷한 언어와 망가지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공감인 듯하다. 그리고 하나 더 느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서로 책임지고 수업의 분위기를 이어가도록 역할들을 맡겨 주는 것이다. 한 친구는 다른 친구가 책임지고 또 다른 친구는 또 다른 친구가... 이렇게 하자 내가 나서지 않아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서로를 챙기면 즐겁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여간 역할과 책임을 주는 것이 주체적,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되는 듯하다. 아마 다음에 다시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시민사회운동이 시민들에게 다가가가지 못하는 이유, 여성운동이 여성폭력피해여성들을 주체화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본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내 것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려던 욕망, 그들의 욕망을 나의 욕망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오류,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그들의 경험을 무색하게 하는 주장과 전달, 상처받은 이들은 무조건 지지하고 공감, 수용, 위로해야 한다는 담론과 그로인한 그들의 비주체화와 피해자와, 대상화의 오류, 일차적 욕망의 함의를 읽어내지 못하는 근시안적 분석 등등... 내가 그들과 하나 될 수 없었던 문제점은 너무나 많다. 딸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재 딸의 경험과 처한 맥락을 읽어내지 않고 나의 경험과 현재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규명하고 위로를 주려고 한다. 안타까워 우는 자식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도 내가 다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이미 나와 딸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플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고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딸, 당사자이다. 다만 나는 그와 함께 슬픔과 아픔의 원인이 어디서 왔는지 그의 처지에서 말할 줄 알고 그의 언어로 위로할 줄 알면 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나의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사회문제로 환원하는 역할을 스스로에게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문제/여성문제는 문제의 당사자들이 주체로 나서야 정확한 의미와 내용, 힘을 가진다. 그 당사자들을 만나서 지원하는 것이 활동하는 이들의 몫이라고 할 때 과연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이번 교육들을 통해 아주 조금 배운 듯하다. 전면적으로! 기대도 나의 맥락도 다 내려놓은 채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만 내가 이미 가진 것이 있을 때 그것을 편안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어렵다.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비혼모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만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딸이자 엄마, 여자친구, 또래친구, 짱 등 다양한 그들의 정체성을 통해 볼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지을 때 그 사람은 그것만으로 나와 소통하게 되고 그 소통은 당연히 한계와 일면성을 가지며 전부를 알지 못하게 하게 마련이다. 전면적인 소통, 다면적인, 삶의 총체적인 소통을 통해 다양한 시민, 여성들이 사회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는 새로운 사회, 혹은 새로운 정치형성의 주된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면 이러한 개인들의 ‘발견’ 혹은 ‘드러남’은 정치를 확장하고 재구성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들이 고맙고 보고 싶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접어둔 채 엄마로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해맑게 웃던 그 ‘포스’있던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