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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한미FTA, 막지 못한다면 함께 공유할 사상 형성과 실천의 기회로 삼아야(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8:26
조회
136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현재 우리는 한미FTA 비준을 통해 국가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모든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나름으로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불안해하면서 알게 모르게 고민하고 있다. 사회 전체적인 위기는 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잠재성을 지니고서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수동적인 미온적 태도 탓에 구렁텅이에 빠져 퇴락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벼랑에 선 결연한 태도로써 그동안의 엉거주춤한 입장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 정신적 무장과 실천을 수행해 나갈 것인가.

현존하는 모든 것들은 양 방향의 벡터적인 힘을 발휘한다. 한쪽은 수렴·응축의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확산· 분절의 방향이다. 이 두 방향은 동시에 작동하면서 현존하는 모든 것들의 성격을 규정한다. 수렴·응축의 방향은 자성(自性)을 향한 방향이고, 확산·분절의 방향은 대타성(對他性)을 향한 방향이다. 그런데 이 두 방향의 힘들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작용과 반작용처럼 서로 맞물려 작동한다. 자성은 스스로의 존재가 지닌 강도와 밀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대타성은 자기 아닌 것들과의 뭇 관계들을 관통·포섭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이 두 방향의 힘은 서로를 규정한다.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열림의 폭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수렴·응축에 의한 자성의 위력은 더욱 커진다. 그 반대로 수렴·응축에 의한 자성의 위력이 크면 클수록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열림의 폭이 커진다. 현존하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의 자성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대타성을 향한 열림의 폭을 넓혀야 한다. 즉 대타성을 향한 장을 다변화해야 한다. 그 반대로 대타성을 향한 열림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자성의 위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자성은 대타성을 통해 열림의 성격을 갖고, 대타성은 자성을 통해 능동의 성격을 갖는다.

한 국가도 현존한다. 말하자면, 국가도 벡터적인 방식으로 현존한다. 그러니까 국가도 수렴·응축을 통한 자성의 위력을 갖추면서 확산·분절을 통한 대타성의 위력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말하자면 확산·분절을 통한 대타성의 위력을 갖추면서 수렴·응축을 통한 자성의 위력을 동시에 갖추지 않으면 한 국가의 운명은 그만큼 위태로운 지경으로 치닫는 셈이다. 지금 한미FTA 비준과 대통령 서명이 임박한 한국의 상황은 이 같은 위태로운 지경으로 치닫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말기 이른바 서세동점에 의해 서양 세력들이 침범해 들어올 때, 조선의 위정자들은 기존의 확산·분절의 장인 청나라만을 믿고서 그 장을 바탕으로 하면 얼마든지 그동안 형성해 온 수렴·응축의 국가적인 자성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른바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기존의 자성과 대타성의 영역을 고집함으로써 새롭게 열리는 대타성과 자성의 가능성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렴·응축의 방향으로 나아가되 새롭게 열리는 대타성의 영역으로 향한 확산·분절의 위력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제대로 된 자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 제국주의에 넘김으로써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자성마저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사후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결과론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다만, 그러한 역사가 언제든지 현재 속의 미래를 통해 그 구조와 형식을 반복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서 말하면, 조선(혹은 대한제국)이 나라를 빼앗기고 만 것은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다양한 열림을 조율해 나가고자 하는 정신과 그럴만한 역량을 구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닫혀버린 지 오랜 탓에 이미 그 스스로의 자성마저 갖출 수 없었던 청나라라고 하는 허울뿐인 대타성의 장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엇비슷하다. 그동안 한국은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한정된 장을 주로 미국을 통해 확보해 왔다. 경제도 그러했지만 특히 군사·외교·정치 방면에 있어서 미국이라는 지극히 한정된(한정되었다고 해서 작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지 않다고 해서 미국이 지닌 일방적인 규정력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타성의 장을 바탕으로 해서 국가적 자성의 삶을 꾸려왔다. 그런 까닭에 한국이 일구어온 ‘국가적인 자성(自性)’ 역시 미국이라는 장에 의거해 규정되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기생적인 자성(自性)’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외교·정치를 제외한 경제 분야에 있어서 그동안 한국은 확산·분절에 의한 대타성의 장을 폭넓게 다변화하면서 구축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제 미국과의 교역량보다 중국과의 교역량이 더 많아진 것을 그 분명한 증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교역 관계를 보자면,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한국이라는 국가적인 현존 벡터가 가능한 많은 관계들을 관통·포섭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이루어지는바 수렴·응축에 의한 한국의 자성은 상당 정도 독자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경제에서 ‘독자적인 자성(自性)’의 폭을 넓혀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군사·외교·정치에 있어서의 ‘기생적인 자성’과 경제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자성’이 모순·충돌을 일으키면서 우리 한국인의 삶을 기묘한 방식으로 비틀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만 주어진다면 군사·외교·정치적인 기생적인 자성쯤은 충분히 감내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하는 주권적인 굴복을 체화해 온 측면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럴 때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마저도 근본적으로 기생적인 방식을 취할 수도 있음을, 혹은 기껏해야 상대적인 독자적 자성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튼, 이제 미국은 경제에서의 한국의 독자적인 자성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인 독자적인 자성이 군사·외교·정치적인 기생적인 자성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칫 반세기 이상 너무나도 유용하게 지배·활용해 온 한국이 미국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는 징후를 보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징후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관계의 종속성을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 대 국가로서의 관계를 추진해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 바탕은 그동안 크게 신장한 한국의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임을 눈치 챈 미국은 무디스라고 하는 미국의 국가신용평가 기관을 내세워 한국의 국가 신용도를 낮추겠다고 위협하자 주식 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환율이 치솟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거기에는 정치와 경제의 얽힘에 대한 통념을 악용하고자 한 전략이 숨어 있다. 한국이 그나마 경제에서 독자적인 자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대미종속적인 군사·외교·정치에서의 기생적인 자성이 바탕으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 후자가 흔들리면 전자도 당연히 흔들린다는 터무니없는 통념을 악용함으로써 무디스가 제시한 위협이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는 것인 양 통용되고 만 것이다. 국가 내부에서조차 다국적 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국내 굴지의 재벌 대기업들이 위기론을 조장한다. 노무현은 이에 굴복하고 만다. 그 결과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 한미FTA다.

다른 모든 현존 벡터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한 국가라고 하는 현존 벡터는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방향이 다양해야 한다. 그 다양한 열림을 통하지 않으면, 그 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자성을 향한 수렴·응축의 위력은 대단히 폭이 좁고 그만큼 투명해져 타자에 의해 파악되기가 쉽고 그 결과 언제든지 대타적인 관계에 있어서 더 이상 확산·분절의 운동을 해 나갈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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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자유무역협정)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한미 FTA 국회 비준 무효화' 촉구 촛불집회가
지난 11월 26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한미FTA는 그동안 한국이 형성해 온 경제 영역에서의 대타성의 장의 다변적인 열림과 그에 따른 (비록 군사 ·외교·정치적인 기생적인 자성에 의해 상대적이긴 하나) 그 나름대로 확보한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 그 두 가지를 크게 약화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이다.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꾸리고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미국 자체의 일극체제에 의거한 전방위적인 자성, 즉 통상적인 국가의 독자성을 넘어서서 일방적 대타성인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띤 초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자성이 약화된 것에 대한 위기의식에 의거한 것이다. 요컨대 미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운동에서 초독자적인 자성의 상태로부터 독자적인 자성의 상태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에 의거한 것이다. EU의 형성과 중국의 강력한 부상이 그 핵심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국의 강력한 부상이 핵심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아시아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다 알다시피 중국의 대타성을 향한 강력한 확산·분절의 위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미군 기지를 평택으로 옮기고, 제주도의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들어 항공모함의 기착지로 활용하겠다고 하는 미국의 군사전략은 그동안 유지해 온 미국의 초독자적인 자성을 끝내 유지하겠다는 각오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유독 미국만은 초독자적인 자성을 지녀야 하는가? 70억 지구촌 인구 중에서 2억5천에 불과한 국민을 지닌 나라가 유독 초독자적인 자성을 지니고서 다른 모든 나라들의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다양한 길목을 규정하고 막아야 하는가? 그 정당성과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전혀 그런 역사적인 사실들이 없지만, 미국이 이른바 민주와 자유를 전 세계에 확산시킨다는 명목으로 내세워 그러한 정당성과 권리의 기반으로 삼으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 국가의 초독자적인 자성에 의해, 즉 제국주의적인 자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다른 나라들의 대타성과 그에 따른 자성의 형성에서 민주와 자유는 결코 진정성을 지닐 수 없다. 그저 기생적인 자성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민주와 자유를 제대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한반도가 해방되었지만, 미국과 소련이라는 제3자에 의한 것이었기에, 결국에는 분단과 혹독한 내전을 겪고 지금까지도 민주와 자유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역진 방지 장치가 조약처럼 명기되어 있는 한미FTA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어 많은 세월이 흐르면 어떤 일들이 전개될 것인가? 정확한 예측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다만, 그동안 형성해 온 한국 경제의 독자적인 자성이 크게 훼손될 경우, 경제적인 영역에서나마 나름의 독자적인 자성을 통해 그나마 민족공동체로서의 위신과 자존심을 유지해 온 한국 민중들의 의식/무의식이 ‘반미’ 쪽으로 자연스럽게 흐를 것이다. 아울러 미국이라는 초독자적 자성을 지닌 나라를 만들어 이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하는 거대 자본에 대한 혐오, 즉 ‘반자본’ 쪽으로 한국 민중의 의식/무의식이 자연스럽게 흐를 것이다. 물론 이를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그 강도가 훨씬 더 높아질 것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로서는 ‘반미’를 통한 민족공동체의 독자적 자성(自性)에 대한 요구가 분출되고, 아울러 ‘반자본’을 통한 민중공동체의 독자적 자성(自性)에 대한 요구가 암암리에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진단코자 한다. 이 두 요구는 따로 분리될 수 없을 터인즉, ‘반미·반자본’ 일찍부터 국내의 선진적인 운동세력들이 외쳐온 ‘반제반자’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아 그 구체적인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 한반도에서 민족민중공동체의 독자적 자성을 향한 각성이 일고, 그 수렴·응축의 위력을 통해 동시에 바람직한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다양성이 열릴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면, 이는 오히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의 기회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돌이켜 보면, 이전의 ‘반제반자’의 운동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독자적인 자성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에, 의식주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전반적인 현실을 반영해 내지 못한 상태에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온 엘리트적인 일종의 외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기생적인 파쇼 군사독재정권이 나서서 이른바 경제개발을 통해 의식주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근본적인 모순을 적발해 내고자 하는 다른 한 편에서의 민중 대변인들의 요구는 수도 없이 심각한 희생 제물을 바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제 나름의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을 형성한 경험과 더불어 강력한 독재투쟁을 통해 민주화를 이룬 경험이 있는 민중들로서는 ‘반미·반자본’이 현실적인 생활 속에 의식/무의식적으로 스며들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가 되었다. 이미 ‘월가점령시위’의 세계적인 확산에 의해 99%에 의한 1%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상식이 되고 있다는 것도 우리 민중들의 의식에 각인되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국가와 정부가 자본의 첨병 역할을 한다는 것도 이제 점점 더 민중적인 상식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직접 투쟁에 나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힘겨운 삶이 세계 전체의 왜곡된 구조에 원인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각자 나름으로 몸소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전반적인 정세를 누구보다도 미국의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을 노동자 계급보다 자본가 계급이 더 확실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여전히 상당히 강력한 초독자적인 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세계 최대의 국가총생산량을 자랑하면서 전반적으로 당당한 ‘거대 독자적 자성’을 확보하고 있는 중국마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최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훨씬 더 극복하기 힘든 현실적인 모순에 처해 있다. 앞으로 그 모순의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최대한 독자적인 자성을 갖춘 민족민중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는 가운데, 이를 제대로 형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들은 더욱 열악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한 강력하고 지속적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최대한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면서 몸 전체로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사상이다. 민족민중공동체의 전반적인 독자적 자성을 구축하기 위한 구심점으로서의 사상이 필요한 것이다. (철학과 사상은 다르다. 철학이 엘리트적인 상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수렴·응축되는 것이라면, 사상은 민중적인 하층의 기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면서 확산·분절되는 것이다. 철학과 사상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철학은 사상의 원리를 형성하는 논리적인 바탕이고, 사상은 민중적 삶의 전반적인 현실에서부터 존재 근거를 확보하는 것으로서 철학의 실질을 이루는 것이다.)

우선 급한 대로 간략하게 그 윤곽만을 제시한다면, 민족민중공동체를 위한 사상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 최대한 열린 대타적인 민족민중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결코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 다양한 대타적인 열림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민족민중공동체는 형성되어서도 안 되고, 설사 형성된다고 할지라도 민족민중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매력적인 삶을 보장할 수 없기에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열림의 일차적인 대상이 분단된 민족구성원들의 거주지인 북한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둘째, 동시에 대자적인 민족민중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대자적인 성찰과 그에 따른 각 부문에서의 공동체의 잠정적인 위력의 개발은 전반적인 독자적 자성을 지닌 민족민중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다. 대자적인 성찰의 기반은 민족 개념과 민중 개념의 상호규정적인 관계에서 확보할 수 있다. 민중적이지 않은 민족은 참다운 민족이 아니다. 민중적이라는 말은 여러모로 결코 터무니없는 삶의 격차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적이지 않은 민중은 역사성을 띨 수가 없기에 참다운 위력을 지닌 민중일 수가 없다. 민족적이라고 하는 말에는 수많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다함께 고루 잘 살아야 한다는 당위가 들어 있다. 이 당위야말로 민중적이라는 말과 직결된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모든 역량들에 의거한 삶의 내용들을 가능한 한 다함께 고루 누리자는 것이야말로 민족민중적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반적으로 대자적인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다양한 삶의 내용으로 열려있는 민족민중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어느 특정 종파의 종교적 이념이나 어느 특정 윤리적 이념, 혹은 어느 특정한 문화 예술의 이념만을 내세우는 민족민중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 특히 의식주 중심의 경제에 집중된 민족민중공동체는 지양해야 마땅하다. 경제는 민족민중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사다리이자 발판일 뿐, 그 자체로 결코 삶의 내용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사다리이자 발판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형성해 온 독자적 자성의 긴요한 영역이기에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타고난 창조적인 기지를 총동원해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경제활동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목적의식을 유지하는 데 한시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사회역사적으로 축적된 민족적인 다양한 삶의 가치와 더불어 인류 전체가 형성해 온 다양한 삶의 가치를 가능한 넓고 깊게 최대한 다 같이 고루 향유할 수 있는 민족민중공동체를 목적으로 삼아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