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게토를 넘어서 (권보드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09:59
조회
116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10여 년 전 2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단지 근방에 살았던 적이 있다. 산동네와 재개발, 그런 사연이 얽혀 있는 단지였다. 신축 아파트단지가 항용 그러하듯 그 단지에도 조금 안심하고 하여 흥분 곁들여 거들먹거리는 분위기가 물씬했는데, 한 귀퉁이엔 분위기가 영 달라 뵈는 몇 동이 따로 서 있었다. 출입구도 달랐고 도색도 조금 달랐던가 싶다. 그 몇 동이 임대 아파트라는 건 금세 알았다. 아하, 임대…. 근방에 갈 일은 없었지만, 멀리서 임대 아파트를 바라다보면 어쩐지 나도 조금 안심하고 많이 거들먹거려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그래도 내가 얼마나 살 만한지 비교급으로 체험하는 느낌이었을까. 사람이 다 그리 속속들이 속물적일 리 없건만 그 외딴 몇 동에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는 좀 짜릿하기마저 했다.

얼마 전 <한겨레 21>을 들추다 본 임대 아파트의 슬럼화라는 현상은, 내가 느꼈던 안도와 정확히 표리를 이루는 것일 게다. 한국에 임대 아파트가 본격화된 지 20년이 넘었다. 임대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이가 성년에 달할 세월이다. 기사에 따르면 임대 아파트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약대가 되지 못하고, 안전한 삶을 위한 지지대마저 되지 못하며, 내몰린 이들의 막장처럼 점점 슬럼화 되고 있다고 한다. 가보지 않았으므로, 실상은 알지 못한다. 작은아버지 한 분이 10년 넘게 임대 아파트에 사셨지만 한번도 들른 적이 없다. 늘 가까이 있었는데도 임대 아파트로 상징되는 삶을 방문케 되진 않았다. 그곳에 산다는 상상도 거의 해본 적 없다. 가까우면서도 먼, 흔한 현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1348118127_8000998434_20120924.JPG
철조망은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를 가로지른다.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그 철조망을 바라보며 학교에 간다.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의 날카로운 울타리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21


‘그들끼리.’ 영구 임대 아파트 단지는 복지에의 중요한 한 걸음이었으되 확실히 ‘복지= 시혜’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모델이다. ‘그만큼’. 동냥을 청하면 천 원짜리 한 장쯤 건네고 고아원이며 양로원에 얼마쯤을 기부하지만, 동시에 그 삶이 낮춰 볼 수 있는 한도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나’나 ‘우리’ 안에 들이지 않는 한 불우(不遇)―단어 그대로의 뜻대로라면 만나지 못한. 무엇을? 시대를? 부모를? 이웃을?―는 연민할 만한 존재이나, 경계를 넘어 들어온다면 위험한 존재가 되기 쉽다. 중산층이라 자처하는 대다수는 제 아이 반에 고아원 아이가 있다면 경계할 것이고, 임대 아파트 입주민과 출입구를 나눠 쓰는 것도 꺼릴 것이다. 그 불우가 전염되기라도 할 것처럼. 역으로, 우리는 그만큼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 살고 있다. 사소한 사고나 불운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을 만큼, 그만큼 중산층적 삶의 토대란 허약한 것이다.

영구 임대 아파트를 독립 단지로 배치하는 대신, 같은 아파트, 한 현관 안에 섞어 놓으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저 멀리 다른 출입구로 드나드는 대신, 아침저녁 같은 엘리베이터 속에서 마주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한다. 소심한 아줌마는 겁이 난다. 무례하고 지저분하고 그러면 어쩌지? 술 취하고 소란 피우거나 하진 않을까? 성범죄자 알리미라고 우편이 날아왔을 때 격분하고 ‘주폭’ 운운하는 선동을 비난했던 걸 잊어버릴 지경이다. 지금 내 이웃에도 무례나 불결이나 과음 등이 모두 있겠지만 생각이 거기 미치지 않고, 가난한 삶이 곧 문제적이고 소란스러운 삶일 리 없건만 그것도 헤아리기 싫다. 다만 내 삶이 청결하고 안전했으면 좋겠다. 공부하는―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자세로서― 아줌마가 겁먹은 아줌마를 달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내 안에서 둘이 갈등하는 동안, 아, 그러니 게토란 얼마나 생기기 쉬운가, 복지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다시 생각한다.

더럽고 소란스럽고 위협적인 존재를 분리시켜 버리자는 제안은 늘 솔깃하다. 마치 그들 존재를 유폐시키면 내 삶에서 그런 낌새가 제거되기라도 할 것처럼, 내 삶이 안전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는 나 또한 그런 존재련만. 시혜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분리의 정책을 지지하기란 더더구나 쉬울 것이다. ‘우리’에서 일단 떼어내고, 그런 다음 보살핀다는 기제― 미국에 기부문화가 활성화돼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는 것도 실상 그런 구조다. 분리 후의 관심, 주변화시킨 후의 배려. 그렇듯 분리되고 주변화된 삶은 추락하고 황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라는, 공동의 가능성에서 밀려난 타격이란 그만큼 결정적이다. 사회 곳곳에 게토를 만들려는 정책은, 설사 그것이 복지와 시혜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위험한 것이다. 복지에 대한 사고의 전환, ‘우리’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그런 점에서도 필요할 듯하다. 허나 먼저, 내 안의 겁먹은 아줌마를 잘 달래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