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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민주주의, 다 되지 않았습니까? 인권이, 뭔 필요가 있습니까?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1 11:45
조회
148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이곳에 와서 들은, 지역사회 리더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말들이다.

가정폭력 후유증으로 인한 암 투병 중에도 자신의 생계와 가해자 남편의 알코올치료소 병원비까지 벌어야 하는 피해자, 그럼에도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두 발 뻗고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는 여성, 그 여성은 알콜치료보호소에서 잠시 퇴원한 남편에 의해 수술상처부위를 다시 짓밟히고 깨진 병으로 ‘내 손에 죽어라’라는 폭력을 다시 당해야 했다. 다시 알코올치료소로 보내진 남편은 퇴원을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중이라 한다. 남편을 피해 도망갈 처지가 아닌 이 여성은 그저 남편이 치료소에 있기만 바라고 있다.

의처증에 폭력으로 어쩔 수 없이 모아놓은 재산을 남편명의로 돌려주고 나서야 이혼을 통해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난 여성, 그 여성은 몇 년이 지난 지금, 남편이 불납한 증여세를 할증료까지 합쳐 지급하라는 독촉장을 받았다. 그리고 이 여성은 현재 증여세를 납부할 만한 경제적 여건이 안 된다.

새벽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자 대형병원을 찾은 환자, 그는 당장 치료비를 지불하거나, 사후라도 치료비를 보증할 보호자를 내세우지 못하면 응급실 입원은커녕 응급처치도 받을 수 없다는 병원 측의 입장으로 부러진 팔을 들고 여기저기 헤매야 했다.

도시빈민 밀집지역에서 재정지원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빈민의 자녀들을 거두어 아동지원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 이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활동비로 아동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일주일에 수 십 시간의 초과근무를 하지만 그에 합당한 수당을 받지 못하는 국가 및 지방사무 위탁기관의 종사자들도 있다.

혁신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들의 교수방법에 대한 학부모들의 개입은 학교담장을 넘어 교사와 학부모간의 쟁투라는 현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권센터’에 찾아와 해결을 모색한다. 위의 사례들은 이곳에서 ‘인권침해’를 주제로 만난 사람과 사례들이다. 이 사례들은 내용과 성격이 다르지만, ‘인권’이란 관점에서 해결을 위한 도움을 받고자 여길 찾은 사례들이다. 그런데도 인권을 논하고 해결을 위한 실천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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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부산일보


완성된 인권과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인권침해와 비민주성은 군사독재 시절의 고문과 같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국가폭력과 막걸리반공법처럼 언론을 비롯한 시민적 자유권의 제한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먹고, 일하고, 자는 것 외의 일체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그 통제에 저항했을 때 발생되는 국가의 물리적 압력과 폭력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은 바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완성단계로 보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국가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비롯해서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최소화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에 폭력가해자 남편을 둔 여성은 자신의 현실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있으되 그 자유를 실현하기에 힘들다면 그것은 자유인가? 아닌가? 그녀는 세상을 너무 몰랐다. 알코올중독이라는 말을 1년 전에야 방송에서 알았고, 자신의 현실이 가정폭력이라는 것도 그 후에 알았고, 남편을 알콜치료소로 보내거나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은 최근에 알았다. 이 여성은 남편이 처벌받고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표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몰라서 못했던 것인데 이는 말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 기인한다. 아는 만큼 표현하고 요구할 수 있다. 가정이라는 섬에서 고립된 폭력에 시달려왔음에도 그것이 부당한 줄 몰랐던 이 여성에게 표현의 자유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남편과 이혼하고 떠나고 싶어도 이사 갈 비용도 집을 마련할 형편도 안 되는 현실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법에 보장한다고 실생활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보장되지 않기에 더더욱 법과 제도를 힘주어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강제하기 위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지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업무위탁기관의 종사자들과 공공업무의 직접 담당자인 공무원들 간의 처우에 있어서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 그리고 그런 부당함에도 침묵해야 하는 상황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기보다는 종속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렇듯 조금만 옆을 돌아보아도 우리는 불편함과 비판적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권침해와 불평등에 불편하고 ‘어떤 민주주의를?’ 이라는 비판적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완성되었다는 일부의 인식 속에서, 나는 불편함과 질문이 거세된 삶의 양식을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않는 단선적인 삶의 행보가 느껴진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연일 떠들고 있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민생과 복지, 불공평 해소책들이 왜 언급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음을 생각해본다. 불편이 없고 그로 인한 질문이 없다는 것은 현 체제와 구조로 인한 피해나 차별을 당해보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나아가 체제로부터 이익을 얻거나 옹호하는 입장일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아무래도 이런 이들의 삶의 환경과 내가 만난 피해자들의 삶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서있는 듯하다. 이것도 양극화다. 서울 강남과 강북이 양극화의 지역구조화이듯, 인권과 민주주의의 완성을 말하는 이들과,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이들의 삶은 경제 및 위계의 양극화가 민주주의와 인권담론의 경험과 인식체계로까지 확장된 듯싶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처럼 “뇌 구조 자체가 다른” 것으로 구조화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층적이다. 국가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체제, 사상, 문화, 담론과 개인, 개인과 개인, 자연과 개인의 형태 등 다양한 층위로서 삶에 영향을 미치고 지배하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인권과 민주주의는 이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성찰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단순히 시민적자유권이 보장된다는 문구가 있다고 해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 누구나 ‘00답게’ 혹은 ‘00스럽게’ 살아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에서부터 인권이 시작된다. 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돈이 없어 당장 부러진 팔을 고치지 못한 환자, 제대로 몰라서 그저 당하는 여성, 잘릴까봐 침묵하는 노동자들에게 ‘인간답게’는 희망보다는 도달치 못할 절망의 기제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시도도하기 전에 절망하거나 절망의 구조로 내던져지는 일은 없어야 진정한 선택권이 보장되는 것이 아닐까? 인권의 시작은 선택의 문을 여는 것에서부터 가능하다. 그 선택을 막는 것은 단순한 국가권력뿐만이 아닌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메커니즘, 그것을 적극 수용하는 우리들의 생각과 실천이라는 것을 모두가 아는 것. 그것이 인권의 시작이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로 가는 것이다. 성찰과 통찰의 문화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