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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광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1 11:44
조회
130

이광조/ CBS PD



90년대 초반이지 싶다. 제목이 풍기는 야릇한 유혹에 넘어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기대했던(?)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 영화를 통해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라는 발음도 어려운 폴란드 출신의 영화감독을 알게 되었고 곧 그의 팬이 되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주연 배우인 이렌느 야곱의 청순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 영화의 메시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실감하면서부터 영화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남과 북이 분단된 우리의 현실에서는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더욱 강렬했다. 마침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90년대 중반은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으로 허덕일 때였다. 한 날 한 시에 남과 북에서 태어난 닮은꼴의 두 여성. 두 명의 베로니카처럼 이름이 같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출생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두 여성이 걷게 될 운명은 얼마나 다를까. 그 즈음에 영화를 다시 한 번 봤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벌써 15년이나 더 지난 얘기다.

감명 깊게 본 영화지만 갑자기 이 영화가 생각난 건 최근 미국과 스웨덴에서 만났던 여성들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미국과 스웨덴 네 나라 직장인들의 급여수준과 근무조건, 생활수준을 비교하는 특집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지난달에 스톡홀름과 뉴욕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지금 내가 얘기하려는 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만나는 대형할인매장의 계산원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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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사진 출처 - 씨네21


 

대형할인매장의 계산원 하면 모두가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는 중년 여성일 것이다. 우리사회에서는 대표적인 저임금 직종이다. 스톡홀름과 뉴욕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도시에서 30대 후반과 40대 중반의 여성을 만났다. 공교롭게도 두 여성 모두 홀로 딸 하나를 키우는 싱글 맘이었다. 하지만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아이폰과 갤럭시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의 삶의 조건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우선 스웨덴에서 만난 아냐 씨. 39세인 그녀는 스웨덴의 유명 대형할인매장인 이카에서 일한다. 그녀가 받는 시급은 117 크로나. 원화로 환산하면 1만9천 원 정도다. 그녀는 일주일에 35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1만 7천 크로나, 원화로 2백8십만원 정도를 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수준에 비춰보면 많은 액수지만 스톡홀름의 물가를 생각하면 아주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딸과 함께 생활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교육비가 들지 않고 아파도 의료비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졸업 후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때까지 대학진학은 유보한 채 일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계획이다. 그녀에게는 매년 5주의 유급휴가가 주어진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는 지난여름에 태국, 포르투갈, 스코틀랜드, 독일로 여행을 다녀왔다.

뉴욕에서 만난 앤. 그녀는 인터뷰 성사과정부터 아냐 씨와 달랐다. 직장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가 성사됐기에 앤 이라는 이름은 편의적으로 붙였다. 46세인 그녀는 맨하탄의 유명 대형할인매장에서 6년 동안 계산원으로 일했다. 그녀가 받는 시급은 7.25달러. 원화로 1만원 조금 넘는 돈이다. 시급 7.25 달러는 뉴욕 주가 정한 2012년 최저임금이다. 그녀는 하루에 6시간 또는 7시간씩, 주 35 시간 정도 일한다. 하루 8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면 직장에서 보험혜택 등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고용주들이 변칙적으로 일을 시키기 때문이다. 근무 시간도 들쑥날쑥 하고 어쩌다 몸이 좀 안 좋아도 눈치가 보여 ‘Sick Day(병가)’를 요청하지 못할 때가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은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벌이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어 추가로 일을 하고 싶지만 불규칙한 근무시간 때문에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노조를 만든다는 건 생각도 못해봤다.

키에슬롭스키는 유럽의 변방인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현실을 베로니카 라는 인물을 통해 투영했지만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베로니카의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다들 느끼고 짐작하는 대로다. 몇 달 전 한 재벌2세 정치인이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국민들을 행복한 돼지로 보는 거냐’ 며 일갈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백번 옳다. 단순히 돈 좀 더 버는 걸로는 부족하다. 일을 하면 큰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어야 하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아플 때 돈 걱정 안하고 치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가난 때문에 자식이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가난을 대물림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게 돼지가 아닌 사람의 복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