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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의 추억 (이광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06
조회
270

이광조/ CBS PD



1986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그 때 대학 2학년이었다. 성북구 보문동의 하숙집으로 어느 날 밤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나를 잡으러 온 건 아니었고 당시 전국적인 학생운동 조직의 위원장이 된 학교 선배의 거처를 캐기 위해 날 찾아온 거였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새파랗게 질렸고 나도 겉으론 태연한 척 했지만 무척 겁먹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찾아온 사람들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왔다고 했고 그 다음 날 성북서 강력반 형사들이 찾아왔다. 서로 자기들이 잡으면 잘 해주겠다며 협조를 부탁했다. 뭐 말이 좋아 협조지 그들의 눈빛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널 잡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듯했다. 두 팀이 다녀간 뒤 그가 찾아왔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는 안기부에서 왔다고 했다. 앞서 찾아왔던 두 팀 보다는 옷차림도 말쑥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그는 내게 선배와의 관계며 학교생활 등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중에 안기부에 취직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스카웃 제의였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대학등록금 일체와 아파트 한 채, 승용차 한 대, 그리고 만에 하나 세상이 바뀌면 신분 세탁을 확실히 해준다는 거였다. 신분세탁이라, 긴장 속에서도 속으로 웃음이 났다. 자기들도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나보지. 그가 또 오겠다며 돌아간 그날 밤, 나는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리어카를 한 대 빌려 짐을 싣고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 신이문역 근처에 있는 친구 자취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말이 좋아 스카웃 제안이지 그는 내게 학원 프락치 역할을 제안한 거였다. 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파트와 승용차를 줬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게 해서 안기부에 들어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워낙 학생들이 기피하던 직장이라 갖가지 특전을 달아서 학생들에게 구애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졸업을 앞둔 선배 중에 누가 안기부에 간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면 그 선배는 학교에서 얼굴을 제대로 못 들고 다녔다.

그 즈음에 학교 후배 하나가 안기부 조사실에 끌려갔다 나왔다. 이삼일 있다 나온 것 같은데, 난 그 때 그 후배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야생마처럼 혈기가 왕성했던 후배가 흡사 겁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후배가 나중에 들려준 이야기는 사방이 온통 붉은 조사실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왜 안 그랬겠는가. 그들이 아무리 점잖게 대하더라도 안기부 조사실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공포였을 거다. 그곳에 끌려가면 사람대접을 받느냐 짐승취급을 받느냐는 오직 그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들이 완력을 써서라도 뭔가를 캐내야겠다고 판단한다면 몸과 마음이 성한 상태로 나오긴 힘들 것이다. 그 때 그가 내게 취업을 제안하는 대신 날 잡아가 족칠 생각을 했으면 난 어떻게 됐을까.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그 다음 해인 1987년 1월 서울대 박종철 학생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80년대와 90년대, 안기부의 이미지는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에 묘사된 취조실의 이미지와 겹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취조실이 안기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붉은 방’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고 고문과 공포로 결국 사람을 굴복시키고 망가뜨리는 곳, 정당성 없는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음습하게 운영하던 정권안보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악명 높던 안기부의 이미지도 많이 변했다. 이름도 국정원으로 바뀌었고 꽤 인기 있는 직장이 됐다고 들었다. 드라마 속에 멋진 국정원 직원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국정원에 다시 옛 안기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민간인 사찰, 국정원장의 정치적 행보 등 각종 논란이 끊이지 않더니 대선을 앞두고는 급기야 국민을 상대로 한 심리전 의혹까지 불거졌다. 국가안보를 지키는 게 아니라 특정 정치권력을 위해 절반에 가까운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심리전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활동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의 존재근거 자체를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대선 결과에 관계없이 반드시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별개로 이런 의혹이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퇴행이다. 더구나 전직 국정원 직원들의 양심선언까지 나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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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노컷뉴스


국정원이 과거의 음습한 이미지를 씻어내고 이 정도의 위상을 누릴 수 있는 건 ‘중앙정보부-안기부’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민주화를 이뤄낸 국민 덕이다. 국정원에서 일하는 게 부끄럽지 않고 신분 세탁이 필요하지 않도록 만들어준 국민들을 배신하고 다시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건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 안기부의 모토는 국민의 불신에 대한 자기 정당화로 들렸던 게 사실이다. 지금 국정원의 모토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이다. 세상이 좋아지면 신분세탁이 필요한 음습한 조직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거듭 나야 했던 이유를 되새기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