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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정치 속에 은폐되어 있는 사회 병폐들' (정재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05
조회
145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심지어 기득권을 상징하는 새누리당까지도 소위 ‘좌파’적 수사를 남발할 정도로 넘쳐났던 각종 진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 논의와 논쟁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대선 후보 인물 중심의 보도에 의해 묻히거나 사라져 버렸다. 소위 ‘안철수 현상’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여러 정치·경제 논쟁들 역시 그의 사퇴로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이렇게 논의들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위 ‘정권 교체론’으로 고착화된 데에는 이번 정권 하에서 기초적인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크게 후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의 급진적 좌파들을 제외한다면, 1987년 소위 ‘민주화’ 이후, 많은 사람들은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되었다고 판단하고, 소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점차 서구식 ‘보수 대 진보’로 정치 구도가 바뀔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지난 1997년에는 불완전하게나마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야당으로의 진정한 정권 교체가 일어난 바 있었으며, 10 여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보수 정권으로의 교체가 일어나 마치 민주주의 정치 질서가 확립되어 가는 것으로 착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서구식 모델에 익숙한 식자들의 관념적 논의에 불과하다. 정치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동시에 실천해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서구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 여전히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서구에서와 같은 합리적 보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서구에서조차 보수 세력이란 각종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이지만, 단지 여러 가지 제도로 그러한 탐욕을 조금 제어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같은 비중심부 국가들에서 ‘보수’와 ‘진보’의 선거를 통한 정책 대결에 대해 대중의 검증과정에 의해 권력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는 선거 정치는 많은 부분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당 권력의 교체와 상관없이 유지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기득권 세력들의 권력이다. 즉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 권력은 물론, 그 동안 간과해 왔던 각종 관료 권력, 언론 권력, 사법 권력, 그리고 이들과 학연과 지연 등으로 얽혀있는 수많은 사회 내 기득권 세력, 심지어는 범죄 집단 등 수많은 이 땅의 지배 카르텔은 그 어떤 진보적인 정당으로의 정권 교체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이 땅의 실질적 권력체다. 그러나 비판적인 지식인들조차 이러한 현상에 무관심하다 보니, 정당 중심적 정치 변동 논의에 집중하면서 사회 변동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지배 카르텔은 보수적 정권 하에서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그 결과 지난 5년간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커녕 피로 얻어 낸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크게 후퇴하였다. 이 정권 하에서 도저히 몇 문장으로 정리해서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후퇴와 퇴행, 그리고 파괴가 일어났다. 그리고 누구나 다 소위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외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민영화 계획, 노동과 복지에 대한 공격, 재벌 봐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그나마 비정규직이나 투기자본, 사회 양극화, 재벌 문제 등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시민 사회 내에서 관심도 높아지고 있고, 따라서 해결을 위한 논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이에 비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악화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공격 훨씬 이전부터 구조화되었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몇몇 문제들은 철저하게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제들은 이번 정권을 거치며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종교권력, 언론권력, 사법권력, 사학권력 등 수많은 ‘권력’들이 사회 곳곳의 기득권 세력들과 긴밀하게 맞물려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를 압박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은폐되어 있는 몇 가지 문제를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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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때 한 시민이 투표를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먼저, 몇몇 고대 출신들이 일부 고위 공직에 전면으로 배치되면서, 이들에 대한 비판이 집중되면서 정작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 서열 체제, 그리고 이러한 서열에 의한 지배 구조가 철저하게 은폐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모종의 사회안전망 역할까지 하고 있는 학벌 중심 위계질서가 타파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교육 개혁, 사교육 철폐, 학교 폭력 타파, 그리고 나아가 복지 국가 건설도 불가능하다.

또 다른 문제는 지배 엘리트들의 놀라운 수준의 군대 면제율로 인해 하루라도 빨리 타파되어야 할 남성 중심적 군사 문화적 잔재들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군대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나라에 바쳤건만, 그러한 의무를 지지 않은 일부 지배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은 엉뚱하게도 군대를 갔다 와야만 제대로 된 남성, 나아가 발언권 있는 시민의 자격이 있다는 퇴행적인 생각들이 더욱 강화되면서 그러한 의무를 질 수 없는 장애인이나 이주민,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불만으로 변질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이주민·다문화 정책, 그리고 여성정책으로 인해 빈곤과 불평등한 상황에 놓인 대중의 불만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다. 저임금 노동력 이용과 성차별적 고용 정책의 유지는 자본은 물론, 정당 정치 위에 군림하는, 그리고 학벌 등으로 얽혀 있는 보수 지배 세력의 이익을 반영하는 국가의 전략이자 기획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의 결과로 치열해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과 이탈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세계에서도 가장 심각한 수준의 차별과 불평등 지수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이주민들과 여성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은 마치 사회의 전 분야를 다루고 있고, 각각의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민감한 부분들에는 매우 소극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문제들은 서로 얽혀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의 철저한 해결 없이는 그 어떤 거창한 경제민주화 논의도 복지국가건설 논의도 허상일 뿐이다.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의제들, 서구 사회에 기반한 서구식 거대 담론 외에도 한국에서의 특수한 의제에 대해 논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