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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거짓말 (이광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30
조회
529

이광조/ CBS PD



정말 뭐가 있는 줄 알았다. 대선도 끝난 마당에 정말 뭔가가 있지 않다면 새누리당 의원들이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NLL 포기발언’을 했다는데, 정상회담 대화록만 보면 국민들도 다 알게 될 거라는데. 정말 뭔가가 있지 않다면, 허풍이라면, 새누리당 안에서 누군가는 이런 무모한 주장을 뜯어말리지 않았을까. 여기에 국정원장까지 나서서 국익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걸고 회의록을 공개하기로 결단했다고 하니, 최소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실언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정파를 초월해 국익을 지켜야할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현행법까지 어기고 내린 결단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예상은 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공개되는 순간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호탕한 성격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종종 논란이 되기도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지만 실언이라고 할 만한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1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레드컴플렉스? 약하다.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선거에 이기려고 북에다 휴전선에서 총 좀 쏴달라고 부탁했던 정당의 후예들 아닌가. 북을 두려워하고 경각심을 갖고 있었다면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나. 그 어두운 과거를 반성하고 단절했다는 흔적이 없다. 하도 답답해서 구글에서 ‘의처증’이라는 단어를 넣고 검색을 해봤다. 내 좁은 식견으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일종의 병리현상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어서다. 위키피디아에는 의처증 또는 의부증에 대해 이런 설명이 나와 있다.

“부정망상(不貞妄想, delusion of infidelity) 또는 오셀로 증후군(Othello syndrome). 상대방의 정조를 의심하는 망상성 장애의 하나. 명확한 증거와 근거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믿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환자 본인이 배우자의 부정적인 행동에 대한 증거를 찾고 싶어 한다.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망상에 따른 행동이상을 동반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는 주장을 ‘부정망상’에 비유하는 건 비약인가? 비약이 맞을 거다. 정당과 정부기관의 행위를 개인의 병리현상에 비유하는 게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답답해서 찾아본 부정망상에 관한 얘기를 굳이 옮기는 건 반성해볼 대목이 있을 것 같아서다. ‘부정적인 행동에 대한 증거를 찾고 싶어 한다’,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망상에 따른 행동이상을 동반한다.’ 그래, 어쩌면 이 사람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또는 지난 대선에서 자신들에게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남북한의 대결보다는 대화와 협력, 화해와 평화를 앞세우는 사람들을 믿고 싶지 않고 그들의 부정적인 행동(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종북’)에 대한 증거를 찾고 싶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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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오후 국정원이 국회에서 여야 정보위원들에게 지난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문서로 배포했다. 사진은 회의록 발췌문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새누리당과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한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다. 국정원의 회의록 발췌본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듯이 자의적인 편집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상전 모시듯 하며 저자세를 취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 그리고 NLL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과 갈등을 서해평화협력지대를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을 ‘NLL 포기’로 규정하는 것. 전자의 경우 이른바 ‘악마의 편집’ 논란이 제기될 만큼 왜곡이 심한 걸로 드러났다. 대화에서 나타나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그리고 표현의 문제와 관련해서 본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을 나무라기는 더 어렵다. 만약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그의 참모들이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고 가정해보라.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김일성 주석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경청해보니 내용 하나 하나가 내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 투쟁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 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회담이 이와 같은 분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는 것도 나의 의견입니다." - 전두환 대통령

“김일성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종전의 인식과는 달리, 현실감이 있고 통찰력을 갖춘 것은 물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아첨꾼들의 약점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남북관계에 대한 생각과 정책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군사적 갈등을 대화와 협력을 통해 풀려고 하는 노력에 대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려면 남북대화니 평화통일이니 하는 얘기는 안 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차라리 ‘주석궁에 탱크 몰고 들어가는 게 통일’이라고 주장하는 게 정직한 자세가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의 DMZ평화공원 구상이 DMZ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듯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이 NLL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북한이 DMZ평화공원 구상을 찬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종북’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90년대 중반 방송사에 입사해 저녁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할 때의 일이다. 남북관계를 다루는 인터뷰에서 ‘주석’이니 ‘국방위원장’ 같은 공식 직함만 나와도 항의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그나마 직함만이 문제가 된 경우는 좀 나았다. 존댓말이 입에 벤 출연자가 나와 ‘김일성 주석’ 뒤에 ‘께서’라는 조사를 붙이기라도 하면 난리가 났다. 왜 그런 빨갱이를 출연시키냐, 너네도 빨갱이 아니냐. 이런 유치한 시절은 지나간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