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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전환기 국가 사회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현실사회주의 체제 연구의 중요성 (정재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38
조회
158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사회주의 사회를 상정한 원전들에서의 예측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체제였지만, 자본주의 체제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몇 가지 요인만으로 양 체제의 차이가 없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단순 일반화의 오류이며 따라서 수많은 다양한 상부 구조에 대한 연구를 무의미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이렇게 두 체제가 동질적이라는 주장과 정반대로, 구 소련식 현실사회주의는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자보다 더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체제의 붕괴와 전환이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 그 유산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쉽게 기각하고 연구하는 경향도 이러한 오류의 범주에 든다.

체제에 대한 혼란은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한 현대 러시아에서의 구체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구에서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체제 전환 과정에서 소위 ‘보수파/개혁파’, ‘좌파/우파’의 잘못된 구분법과 더불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라는 개념 규정 등에 있어 많은 혼동에서도 기인한다. 이론상으로는 더 직접 민주주의적 체제였어야 할 사회주의 체제가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억압적 권위주의적 체제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좌파적인 수사들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에게 혼동을 주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임은 분명하다.

체제 전환 이후에도 원래의 의미와는 달리 오랜 지배 정당의 역할에 더 익숙한 공산당 등 현실 사회주의 좌파 후신 세력들은 사회주의권 바깥에서 발달한 좌파적 의제들에는 물론 자유주의적 의제들에도 못 미치는 의식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세계화 과정에서 중심부 국가와 자본이 러시아를 비롯한 중심부 외 지역에서 가하고 있는 불공평하고 부정적인 행위에 대한 분석은 날카롭지만, 자국의 안팎에서 자국에 의해 행해지는 유사하거나 더 잔혹한 행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무관심 혹은 아예 무지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에서는 우파보다는 좌파적인 운동 영역이었던 환경, 여성, 반핵, 인권 등의 문제가 러시아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의 활동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러시아식 구좌파는 물론 이에서 벗어난 신좌파 양자 공히 위에서 언급한 시민 사회 문제에 대한 올바른 관점에서의 접근과 시민 사회 단체들과의 올바른 연대는 아직 요원하다. 그런가 하면 좌파적 정당과 시민 사회 운동의 사상적 동질성은 많지 않지만, 반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연대도 이루어진다. 정치 외의 문제에는 신경을 쓰기 힘들만큼 권위주의적 정권의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는 데 집중해야하는 러시아 정치의 후진적 현실도 올바른 관점에 입각한 연대를 방해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지만, 이 보다는 그에 선행하는 위에서 언급한 더 근본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

즉 서구에서 수 백 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일들이 압축적,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더하여 자본주의의 경험도 없고, 자유주의적 가치가 제대로 실험되지도 못한 채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시장 경제로 회귀하면서 여전히 자유 자본주의적 가치조차 제대로 완수되지 못 한 단계에 있는 러시아의 특수한 현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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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부터 1996년까지 체첸의 독립을 놓고서 러시아와 체첸 공화국이 치른 첫번째 전쟁.
러시아군에 점령된 수도 그로즈니의 모습
사진 출처 - 네이버


체제 문제는 마치 별도의 연구 분야인 것처럼 보이는 민족 문제에 대해서도 그 연구의 핵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회주의 소련의 대 소수민족 정책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 식민지 정책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억압적 지배 구조의 유사성만으로 파시즘이나 제국주의 체제를 현실 사회주의를 같은 질의 체제로 보는 주장들이 있다. 물론,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반강제로 편입된 비 러시아 소수민족에 대한 소련 중앙의 정책은 이상과 달리 식민지에 대한 그것과 유사한 점도 현저했다. 그러나 소련의 정책은 식민 본국을 위한 잔혹한 수탈과 억압, 동화 과정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그러한 서구 식민지-피식민지 관계와 다른 유산이 소련 붕괴 과정과 심지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와 다른 민족 문제의 양상을 보여주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립을 획득한 구 소련 소수민족 국가들의 입장에만 의존하거나 단순 일반화된 민족 자결주의 혹은 민족 국가 건설론에 입각한 구소련의 과거 민족 억압에 대한 논의는 경계해야 한다. 비슷한 문제는 종교 등 문화에 대한 영역에서도 존재한다. 특히 소수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구 소련 내 이슬람에 대한 연구에서 주의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구 소련 민족/국가들 중에서도 이슬람 화된 시기와 정도, 수용 양상이 매우 판이함에도 불구하고, 수용 과정에 대한 역사적 팩트는 비교적 정확하게 서술하는 반면, 수용한 민족과 지역의 여러 특수성을 세밀하게 분석하지 못 하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70년간의 소련 시기를 거치며 매우 세속화되고 변질된 이슬람, 종교로서가 아니라 관습으로 굳어져 종교적 요소가 약해진 면도 존재하는 구 소련 지역 이슬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적 분석도 눈에 띈다. 또한, 외부 세력에 대한 저항과 계급적 이익 표현으로 이용되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중동의 이슬람과 유사한 것으로 일반화되거나 이슬람주의자들은 모조리 근본주의자로 오해되기도 한다.

러시아는 그 자신 주변부 제국이면서도 동시에 내부에 주변부를 두고 있는 특이한 위치에서 연유하는 문제들이 많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주변부 제국주의 러시아와 현대 러시아 사이의 70년간의 전혀 다른 체제의 역사적 존재는 연속성과 단절의 경계와 내용 문제에 있어서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접근법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 국가들의 고유한 문제들은 물론, 시장 체제로의 전환 이후 확산되고 있는 세계 보편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현실사회주의 체제를 규명하는 연구는 진보적 연구자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