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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대선 개입, 진실을 밝혀라 (최정학)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36
조회
137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겨우 국정조사에 합의했다. 하지만, 핵심적인 2명의 증인은 빠진 상태이다. 이제 청문회도 진행된다고 하니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과연 진실이 밝혀질지 상당히 의심스럽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그 과정에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다는 의혹 제기가 있었다.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급박한 상황에서 경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했고, 그 수사마저 왜곡되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상황이 이쯤 되면 국정조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라도 당연히 해야 할 것 같은데, 여당은 마치 선심쓰듯 조사일정에 합의하고 야당은 장외투쟁이라는 강공책을 쓰면서도 중요한 증인채택에는 결국 합의하지 못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중대한 국기문란 행위라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었다. 엄격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정보기관이 정치에, 그것도 선거에 직접 개입했기 때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대에나 있었던,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라는 말도 여러차례 들은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을 부정하는, 민주화 시대에 있을 수 없는 행위’들이 너무나 많이 있고, 국민들은 이런 주장에 식상해 버린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이 으레 서로를 향해 내뱉는 독설이겠거니 여기기 때문이다. 마치 재벌 총수들이 100억, 1000억을 횡령하고 비자금을 조성해도 으레껏 그러려니 여기는 둔감한 반응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한 야당의원의 발언을 트집 잡아 시작된 이른바 ‘NLL 논란’은 여당의 대성공으로 끝이 났다. 논쟁에 종지부를 찍자고 제안한 회의록의 공개는 느닷없이 ‘사초 증발’ 사태로 이어졌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 대통령마저 역사를 지우는 일이라며 이를 한 수 거들고 나섰다. 그 효과는, 역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였듯이, 국정원 이슈의 희석이다. 이 와중에 청와대는 참모진의 개편을 단행했는데, 1993년 지역감정을 자극한 ‘초원복집’ 사건으로 유명한 김기춘 전 법무장관을 비서실장으로, 역시 공안검사 출신인 홍경식 서울 고검장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마찬가지로 공안출신인 정홍원 총리와 함께 공안검사들이 내각을 장악하는 것과 함께, 이것은 국정원 사건에 대한 검찰의 대응을 청와대가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민정수석으로 하여금 검찰을 더 잘 장악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는가라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사실 검찰이 국정원 사건을 열심히 수사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개혁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면서 동시에 경찰에 대한 일종의 앙갚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알다시피, 경찰과 검찰은 최근 몇 년간 갈등과 견제 상태에 있었고, 검찰은 작년 부패와 성추문 등 개혁을 피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는데, 대선 당시 국정원 사건에 대한 경찰의 축소수사 의혹은 검찰에게 좋은 반전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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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제6차 범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민주주의'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1980년대 후반, 일단 외형은 군사정권의 틀을 벗은 국가권력이 북한의 존재 혹은 남한 일각의 통일운동을 이용하여 국내의 여러 정치적 이슈들을 잠재우는 상황을 ‘공안정국’이라고 불렀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이와 같은 공안정국은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국가안보와 공공불안을 자극하는 이와 같은 권력의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사회현실과 넘치는 정보 속에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아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을 무디게 하는 데에는 안보와 공안만큼 좋은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 적대관계에 있어 온 강력한 독재국가가 바로 코앞에 군대를 배치해 놓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아감벤은 "정치적 지배자들이 민주주의를 인정하기 시작한 지 한 세기도 되지 않았는데, 민주주의는 이미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논쟁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위법행위까지도 감행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민주주의란 이렇게 아무런 내용이 없이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있는 것인가. 이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랑스러운 ‘민주화’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정치적 지배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 맞는가. 혹시라도 소수 세력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전제정이나 귀족정을 보다 선호하는 정치세력은 없는가. 그러나, 이러한 모든 질문에 앞서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는 분명해졌으면 좋겠다. 적어도 국가의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하는 일은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엄중히 물어야 하고 제도적인 재발방지책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국가안보에 아무리 중요한 정보원이거나 청와대라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