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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화 몇 번이나 해보셨나요? (정보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35
조회
169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첫 신고전화는 고등학교 때였다. 등굣길 버스 안에서 목격한 교통사고를 119에 신고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나는 112에 한번, 동네 파출소에는 여러 차례 신고전화를 걸었다. 대학부터 결혼 전까지 서울에서 여덟 번 이사했고 결혼 후에도 다섯 차례 이사를 했다. 덕분에 여러 동네 파출소에 신고를 하게 되었다.

그 중 나를 정말 당황하게 만든 사건은 홍대 담벼락 아래에서 살 때였다. 앞집 다세대주택 이층에서 매일 저녁 같은 시간이면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아이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사는 막다른 골목으로 부인이 맨발로 도망쳐 나왔다. 나는 황급히 파출소에 전화했고 상세한 위치 설명도 덧붙였다. 초조하게 경찰을 기다렸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록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고 앞집 상황은 종료된 듯 했다.

황당한 건 그 다음부터였다. 졸고 있던 참에 희미하게 내 이름이 들리는 게 아닌가. 화들짝 정신 차리고 들으니 진짜였다. 경찰 2명이 골목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 진짜. 신고한 사람 이름을 물어볼 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저렇게 동네방네 내 이름을 불러대다니, 신고한 사람의 신원은 지켜주는 거 아닌가.’ 속으로 별 생각을 다하며 경찰에게 나라고 했더니, 본인이 맞는지 주민증을 가져오라는 거다. ‘아,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 다음엔 신고한 집이 어디냐, 벌써 상황 종료된 거 같다고 했더니 내 전화번호를 적어 가는 거다. ‘도대체! 왜! 내 주민증과 전화번호가 필요하냐고?’ 갓 대학을 졸업한 신참 사회인인 나는 항변하지 못했다. 왜 그런 꼴을 당한 건지, 원래 신고하면 이런 것인지만 궁금해 했다. 그때 잠시 앞으로 신고전화를 하면 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은 했다.

그 후 나의 신고정신 발현을 보면 그 경험이 내게 트라우마로 작동한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공익을 위해 내가 나서서 신고하는 것이라 여겼고 다른 사람들은 귀찮고 방법도 몰라 하지 않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해 다산콜이 생겼다. 다산콜은 동네 파출소 전화번호나 구청 민원과 전화번호를 알아둬야 하는 수고를 덜어줬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신속하다는 면에서 광케이블이 깔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세 차례 120을 눌렀다. 인도가 끝나는 지점에 설치된 낮은 턱 부분을 가로막은 차량 신고, 문 앞 스피커로 음악을 지나치게 크게 틀어놓은 가게 신고, 자신의 가게 전용 주차금지 입간판으로 마을버스 정류장 앞 도로를 점거한 홍대 앞 클럽 신고. 여전히 나는 광속으로 신고를 하지만 뭔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꼭 신고전화로 해결해야만 했을까? 그 당사자들에게 왜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까? 직접 부딪히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떠올리기도 전에 나는 120을 누르고 있었다. 그만큼 낯선 사람들과 불편한 상황을 대화로 풀어나갈 용기와 능력이 내겐 없었던 것이다. ‘혹시 입바른 소리 했다가 한 대 맞으면 어떡하나, 말싸움으로 번지면 피곤한데......’ 이 정도에서 나는 편하게 120을 누르는 걸로 나 스스로와 타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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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언제부터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게 어렵고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경계의 몸짓을 갖게 된 걸까. 무슨 일이든 대리자를 통해서 해결하거나 말을 전하는 게 편하게 생각되고, 그것도 아니면 목소리도 없는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만큼 우리는 관계성을 잃어가고 있고 회복할 의지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애쓰면 원시적이라거나 너무 터프하다고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다.

공권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당연히 있다. 클랙슨을 울린다고 술 취한 사람에게 폭행을 당한다면 대화로 해결되긴 어렵다. 내가 한 신고전화의 경우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신고전화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대화로 풀 수 있는 상황들이 분명히 있었다. 언젠가부터 대화나 설득으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머릿속에 없다 보니 시도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 현대사의 크고 작은 경험이 사람들에게 체화된 흔적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논리적 비약이 좀 심한가?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과 말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생각해보자. 경비실 아저씨가? 아니면 보험회사 직원이? 그것도 아니면 정부가? 지금은 귀찮고 힘들어도 내 삶의 터전을, 이웃을 만들어가는 데 내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 때인 것 같다. 잘되면 작게는 공동 육아에서 크게는 협동조합이나 마을 공동체가 될 수도 있겠다. 적어도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을 누구나 염두에 두는 세상이 되려면 내 가족, 같은 회사 직원, 같은 아파트 주민 등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먼저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직접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관계라면 대리자에게 부디 그 역할을 맡기지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