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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짐에 대한 변명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34
조회
192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광명으로 출퇴근한 지 일 년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던가? 때로 좌절하고 때로 긍정하며, 시간과 편견, 왜곡과 오해들, 이런 것들과의 씨름, 버티기 한판의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확확 돌아가거나 바뀌는 것은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화들은 있다. 버티면서 차지한 공간이 점차로 넓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그러나 이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무엇보다 내가 힘들다. 그래서 자꾸 뭔가 되어가고 있는 쪽으로 마인드컨트롤 중이다.

몇 가지 변화를 살펴보면, 위원회 구성이 바뀌어 조금 더 영향력 있는 논의와 결정이 가능해졌고, 인권조례의 내용이 수정되어 지자체의 의무와 인권센터의 역할이 강화 되었다. 인권센터 직원들은 고용이 일 년 연장되었다. 인권세미나 팀은 인권의식과 연대의식이 높아져 실천의 영역으로 진입해야 할 것 같다. 최근엔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중이고 조사 및 구제에 관한 시스템을 구성해 가는 중이다. 좋은 지역 분들을 만나면서 가능성을 덧셈했고, 이번 주는 처음으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교육을 진행한다. 하반기엔 다시 인권학당을 열 계획이다. 그리고 다시 발품을 팔아 센터와 관련한 여러 분들을 만나러 다닐 것이다. ‘인권기본계획‘안’이 현재 집행부에서 완성 중에 있어, 본격적인 하반기 사업 전엔 인권기본계획안에 의한 중장기 사업들이 셋팅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 고립무원의 섬에 갇힌 듯, 혹은 공무원이라는 거대한 집단에 포위된듯했던 고립감도 요즘은 극복되고 있다. 시간의 힘이다. 좀 더 지나면 더 많이 익숙해지고, 그만큼 인권센터의 영역도 확장되리라 기대한다.

며칠 전, 단체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이제는 다른 곳에서 활동(?)중인 동료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도달한 곳은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운동단체의 활동도 쉽지는 않았다. 순간순간 처리해야 하는 일감들, 이견과 논쟁들, 내부의 권위주의, 소통의 불편, 비전의 부재 등 갈등과 불만, 과중한 업무 들이 그랬다. 그러나 그 친구 왈 ‘나와 보니, 그 안의 부조리가 얼마나 조리 있었는지, 비합리성이 얼마나 합리적이었던지 알겠다.’는 것이다. 그곳은 그나마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쨌거나 현실의 부조리와 비합리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현실을 반영하기보다는 현실극복적인 성격이 강했던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고 고통의 전부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곳을 벗어나자마나 세상과 현실은 맨 얼굴, 속살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것도 상상이상의 모습으로. 세상이 이렇게 치사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아마도 이것이 현실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이들의 일반적 모습이 아닐까 하며, 여기서도 버텨야 한다고, 서로 격려했다. 버텨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리고 힘들 때는 조금이라도, 정말 실낱같은 변화의 조짐이라도 침소봉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자고 위로했다. 그러나 결코 이러한 현실에 길들여지는 것을 경계하자고 다짐했다. 서로 거울이 되어 줄 수 있음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같은 날 저녁에 학교동기모임이 있었다. 어느덧 50을 불과 몇 년 앞둔 나이에 직면한 중년의 남성들, 배도 적당히 나오고, 머리도 벗겨지고, 대충 아이들이 대학진학 즈음에 있고, 건강이 관심사인 이 중년 동기들의 수다주제는 회사생활의 어려움과 일상의 일탈에 대한 소망과 추억이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회사기밀의 보호를 위한 개인정보의 침해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개인정보에 대한 무제한적 개입과 통제, 회사정보 보호를 위한 개인적영역의 삭제. 예를 들면 이렇다. ‘개별 하드 없이 중앙컴퓨터에 연결하는 방식’, ‘일과가 끝나기 전 하루 세 번의 사용흔적 삭제’, ‘개인사용 컴퓨터에 대한 회사의 수시 검열’ 등 이쪽으론 문외한이라 그들이 사용한 전문용어를 풀어쓰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문제제기는 그렇다 치고, 왜 그러한 회사의 방침을 당연한 듯, 질문조차 하지 않는 그들이. 본인들이 회사의 부품으로 밖에 취급되지 않는 것이 내 눈엔 보이는데,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건지, 그저 귀찮다는 정도의 반응에 머문다. 그것이 더 안타깝다. 개구리를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바로 뛰쳐나오지만, 서서히 덥혀지는 물속에서는 뛰쳐나오지 않고 결국 그 안에서 죽는다. 길들여진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매 순간 물의 온도를 확인하지 않고는 살아있음이란 그저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다름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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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나는 때로 두렵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여하튼 관련자들과 협조체계를 구축하여야 한다는 것이 혹시나 길들여지는 과정은 아닌지 말이다. 어느 순간 위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스스로 ‘을’의 신분과 태도를 내장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처음 시작할 때의 패기와 열정, 정의와 분노가 소멸하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이 혹시나 처세술은 아닌지 두렵다. 그리고 더 두려운 것은 변화와 그 일에 대한 욕망대신 적당히 안주하고픈 욕망이 들어서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때로 누군가를 만나 나를 검열당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하며 매 순간 물의 온도를 간보는 작업을 멈추지 않으려는 것이다.

희망을 보지 못하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삶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이 사회를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부당함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타인과 자신모두-하지는 않는다 해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은 그 민감함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섬세하다고 포용력이 좁다고 할 수 없다. 민감하고 섬세한 인권과 정의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되, 그에 반하는 현실과 그 현실을 견뎌내는 자신을 너무 미워하고 못 참을 필요까지는 없다. 안 보고 싶다고 안 보고 살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봐야하고 견뎌야 하고 넘어야 하는 것이라면 포용하여 개선 혹은 수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민감함과 둔감함의 동시성이 가능할까 싶지만, 그것이 이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세상에서 변화를 꿈꾸면서도 자기유실(流失)을 막을 유일한 전략일수도 있다. 그것이 버티는 외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고인 듯 보이지만 흐르고, 매일 그대로인 듯한 풍경도 변한다. 사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한다. 존재하면 변한다. 아니, 존재가 변화다. 여기서 변화는 당연히 진보하는 것이다.

오늘도 난 희망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찾아오는 누군가들로부터. 찾아오는 이들이 곧 존재의 확장이기때문에. 그래서 다시 정의감과 패기의 ‘각’을 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