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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래된 노래는 나의 힘 (이은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53
조회
203

이은규/ 인권연대 '숨' 일꾼



주말 아침이었다. 커튼을 여니 모처럼 겨울 하늘이 맑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져 오는 햇빛, 눈이 부셨다. 오랜만에 멀쩡한 아침 기분을 만끽하며 절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이라도 신명나게 달려 볼란다...” 부엌에서 아내의 소리가 들린다. “그런 노래 부르지 마. 종북이라며 욕할지도 몰라.”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노래까지도 눈치 보아야 하는 2013년 겨울. “그러거나 말거나.”아내의 농담을 받아 더 큰 소리로 흥얼거렸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이라도 신명나게 달려 볼란다...”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불렀다. 그랬다,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 순간 나는 이십대였으며 1990년대를 숨 쉬고 있었다.

한 달 정도 된 것 같다. 금요일, 토요일마다 공사다망한(연애?) 큰 아들을 제외하고 열아홉 살 큰 딸부터 다섯 살 막내딸까지 우리 가족은 함께 텔레비전 앞에 모여앉아 있다. 각자의 취향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함께 감상하며 수다를 떤다. 물론 감상 포인트는 저마다 다르다. 아이들은 쓰레기와 나정이, 그리고 칠봉이의 사랑이야기에 과도하게 몰입하고 삼천포와 윤진이, 해태와 빙그레 그리고 성동일, 이일화 부부의 에피소드에 웃고 쓰러지고 한다.

1994년을 거쳐 1995년이 배경인 까닭으로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은가 보다. 드라마에서 인용되는 신문기사와 뉴스들에 대한 내용을 묻고는 한다. 삐삐 같은 이제는 보기 힘든 물건들과 시사적인 것도 있지만 주로 스포츠와 연예에 관련된 궁금증이다. 이를테면 이상민이 누구냐?, 서태지와 아이들하고 EXO하고 비교하면 누가 더 인기가 클 것인가, 삼풍백화점 사건이 무엇이냐 등등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런 저런 문의들을 하고는 한다. 문의가 폭주할라치면 드라마 끝나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라 권고한다. 그럴 때 마다 생각한다. ‘허 참 별일도 다 있네. 드라마를 보며 아이들하고 수다를 다 떨고...’ 무튼 이 드라마를 나도 좋아한다. 다 큰 아이들이 불타는 금요일 밤 밖에 나가지 않고 나와 놀아주니 좋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가족 모습이 좋고 무엇보다 추억할 수 있어 좋다.

‘그래 추억할 수 있어 좋다.’ ‘응답하라 1994’를 보면 까맣게 잊고 있던 당시 일상의 기억들이 부실 부실 눈 비비며 일어나고 있다. 1994년 여름은 매우 더웠고 첫아이 민주가 탄생했으며 목 넘김이 부드러운 하이트 캔 맥주를 원 샷 한 해이다. 그리고 그해 출범한 고(故) 김근태 선배가 이끌었던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충북지부 조직국장으로 일하던 때이기도 하다. 빠르게 순간 이동하던 기억들이 숨을 고른다. ‘따뜻했던 사람, 민주주의자 김근태...’ 송송 눈발이 내리듯 많은 기억들이 가만 가만 내려앉는다.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떴고 그들의 꿈은 현실이 되거나 여전한 꿈으로 지체되고 있다. 그들이 꾸었던 꿈의 동기는 사랑이었으리라. 형제에 대한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있지만 너무 가까워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있는 자들은 눈먼 길 위에서 서로 분노의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응답하라 1994’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노래들은 추억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015B, 김민종, 이문세, 김광석의 노래는 오십을 앞둔 심장을 이십년 전으로 거슬러 요동치게 한다. 특별히 김광석은 아련하고 그 여운이 길다. 명치 아래쪽이 스르르 하니 모래성 내려앉듯 하고는 한다. 미소 짓는 슬픔이라니...“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고(故) 김광석 노래 그날들)

‘응답하라 1994’에는 이 노래도 나온다.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 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삼천포와 해태 그리고 나정이가 삼천포 주민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이 장면을 보며 곁에 있는 아내를 흘끗 바라보았다. 왕년에 총여학생회장을 했던 아내는 나정이보다 더 앳되고 이~뻣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슬그머니 웃었다. 아내는 텔레비전에 응답하느라 이런 나를 보지 못한다.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해지는 시간을 ‘응답하라 1994’가 선물하고 있다. 오래된 노래들의 위로와 격려가 참 좋은 시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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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티브이데일리


아날로그한 추억을 가만 가만 쓰다듬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울린다. “어휴 요새 박근혜 때문에 자꾸 분노하게 되네. 지가 뭐라고 내 심사를 이렇게 뒤흔들어.” 지난여름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은 독실한 천주교신자인 영규 형님 이다. 나는 당뇨에, 혈압에, 건강이 좋지 않은 형이 걱정되어 말씀 드렸다. “분노하지 마세요. 분노할 힘이 있다면 사랑하는데 힘쓰자고요. 분노할 대상은 적고 사랑할 대상은 전부니까요.” “그래 그래야겠지...”

통화를 마친 후 무의식적으로 한 말을 되새김질 하며 짐짓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그래 사랑하는데 힘쓰자. 사랑할 대상은 전부다.’ 내 오래된 노래는 오래된 미래를 희망한다. 그래서 힘이 있고 단순하다. 현재 우리의 삶이 노래가 되어 미래의 희망이기를 바란다. 햇빛 환하게 밝은 지금, 나도 모르게 또 흥얼거린다.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모두가 힘들잖아요. 기쁨의 그날 위해 함께 할 친구들이 있잖아요.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나의 친구랍니다...” 얼~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