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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범죄학 (최정학)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47
조회
166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분노의 범죄학’이라는 것이 있다. 일찍이 수십 년 전,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Merton)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풍요를 보면서 이것이 미국인들에게 물질적 성공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제시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다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합법적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법적인 수단, 즉 범죄를 저지르게 할 유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사회가 제시하는 목표와 개인적으로 불가능한 현실 사이의 갈등을 머튼은 ‘긴장’이라고 불렀거니와, 이러한 긴장이 일상화된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긴장의 범죄학’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분노의 범죄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장밋빛 환상과 열악한 현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은 만성적인 긴장을 넘어 좌절과 우울,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쌓이게 되고, 마침내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과 같은 범죄행위로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 개인이 느끼는 분노는 반드시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것만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존감의 상처, 즉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하는 것과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또 만약 이 사회가 나름대로 공평한 경쟁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실패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요즘은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택시의 불친절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택시요금이 지나치게 낮다거나 운전기사들이 과도하게 오랜 시간 동안 노동을 한다거나 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인 문제들은 결국 이를 감당해야 하는 개인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으로 쌓이게 된다. 피곤하고 힘든데 웃어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웃기는커녕 작은 말 한마디에도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어디 택시뿐인가. 새벽부터 밤까지 오직 시험만을 생각해야 하는 학교에서, 아무리 갖은 방법을 써 보아도 계속해서 탈락하는 입사면접에서, 분명히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차별과 해고의 불안에 늘 시달려야 하는 노동현장에서, 퇴직 후 느껴야 하는 경제적 곤궁과 가족 간의 갈등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한다. 분노는 때로 적당한 정도를 넘어 주위의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며,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에게는 냉정에 가까운 무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의 범죄율은 그러나,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니다. 범죄율은 보통 인구 10만 명당 범죄인수로 측정하는데 한국의 경우 대개 120에서 130정도로 북유럽이나 서유럽에 비하면 다소 높지만, 일반적으로 치안이 불안하다고 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참고로 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은 미국은 이 수치가 700을 넘어선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아시아의 범죄율이 전반적으로 낮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관의 권력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준법의식이 잘 발달한 것이 주요한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천년도 더 넘게 개인보다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유학의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어온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나라에서 정한 법은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이라는 잠재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분노의 범죄학’의 설명이 틀린 것일까. 우리가 잘 아는 다른 통계 하나는 자살률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문제에 대한 또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수년간 10만명당 30명 선을 육박하고 있는데, 이것은 OECD 국가 가운데에서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위의 범죄율과 비교해 보더라도 상대적으로 약 1/4에 해당하니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범죄율 가운데에서 살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별로 높지 않으리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살인 범죄로 인한 그것 보다 훨씬 많으리라는 점도 알 수 있다.) 모든 자살이 분노나 좌절에 의한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적어도 상당수의 자살이 그러한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자살은 전이된 살인이며, 약화된 살인”일 수 있다. 터져나오는 분노를 공공의식의 압력으로 표출할 수 없을 때, 이것은 방향을 바꾸어 자기자신을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와 좌절은 그 대부분이 사회적 조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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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


그래서 우리는 보통 자살의 문제를 개인적인 병리현상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았을까. 우리는 여기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범죄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이 적용될 수 있을까.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을 포함하여 4대악을 척결해야 한다고 한다. 폭력이 좋다는 것도 아니고, 폭력이 자살과 같다는 것도 아니지만, 문제의 원인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때로 폭력으로 밖에는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없게 만드는, 그렇게 깊은 분노가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분노의 범죄학’의 이런 해석이 맞다면 두려울 뿐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그 정도를 낮추는 쪽으로 변화하기를 바라고 노력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