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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길었던 1989년 여름의 하루 – 어느 전교조 1세대의 회고 (정보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46
조회
311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야야 저기 저, 생물 선생 아이가?”
“아 미쳐... 어어 우리 봤는갑다, 일루 온다!”
“모르겠다, 일단 택시 타고 보자.”

그날은 여름방학 보충수업 마지막 날이었다. 여름방학 중 학교에 나오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나는 아침에 학교가 아니라 마산역으로 걸어갔다. 도착할 즈음 내 눈에 보이는 건 이리 저리 흩어져서 학생들을 찾는 분주한 선생들 모습이었다. 아차. 선생들이 알았구나. 심장이 쿵쾅쿵쾅. 마침 만난 친구와 버스 정류장 앞으로 급히 갔다. 내리는 여학생들마다 붙들고 “성지여고 학생? 선생들 깔렸으니까 남성동 성당으로 바로 가라.”고 낮게 소리쳤다. 그러던 중 우리를 발견한 생물 선생이 버스 정류장 쪽으로 급하게 걸어오는 것을 본 것이다. 생물 선생은 교련 과목과 학생 주임을 맡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서 좀 걷다 뛰다 하다 결국 택시 잡아타고 남성동 성당으로 갔다.

전교조 선생님들의 해직 결정이 그 날 마산 남성동 성당에서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들은 일단 마산역에 모여서 단체로 그 성당을 찾아가 항의하기로 했다. 1987년을 마산에서 보낸 고3이라면 뭔가 부당한 것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건지 이미 체험했다. 고1 때 평소보다 일찍 하교하는 버스 안으로 선전 유인물을 던지는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눈, 코를 찌르는 최루탄 가스의 잔해들을 맡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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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28일 역사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대회가
정권의 전방위 탄압과 경찰의 철통봉쇄망을 뚫고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고3이던 1989년 봄. 나는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등교해 그 전날 쓴 대자보를 교문 옆 담벼락과 교내 게시판에 붙였고, 빈 교실 책상 서랍들 속에 전교조에서 만든 유인물을 하나씩 넣곤 했다. 지금은 정확히 왜, 어떻게, 어떤 계기로 전교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민중가요를 방학 때마다 가르쳐준 대학생 언니가 있었고, 평교사협의회에 가입했다고 유치원에서 잘린 언니도 있었다. 그리고 친한 한 학년 위 고교 선배 언니들이 대학생이 되어서 보낸 편지들에 적힌 글들을 읽고 뭔가 세상이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내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전교조에 가입한 선생들을 대하는 나이 든 간부선생들과 교장 수녀의 폭력적인 언행이었다. 학생들이 버젓이 바라보는 교정에서 교장 수녀는 젊은 여선생의 뺨을 날렸고, 그 학교에 20년 근속을 자랑하던 수학 선생은 복도에서 전교조 가입 선생들에게 폭력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런 인간들을 선생이라고 여기고 학교를 다녔다는 데 심한 회의와 분노를 느꼈다. 결국 마지막까지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은 국사 선생과 윤리 선생은 해직을 앞두게 되었고, 이 모든 처사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던 우리들은 해직 결정을 성당에서 한다는 정보를 듣고 항의집회를 하기로 모의하였다.

주동자들은 고3 반장들과 학생회장과, 간부가 아니었던 나와 역시 간부가 아니었던 같은 반 친구 1명. 학생회장도 같은 반이었으니 이 반에서만 주동자가 4명이었다. 물론 그날 학교에 나와서 자습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반장들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단 모의 사실을 선생님한테 고자질은 하지 말라며. 정말 순진한 집회 모의였다.

택시를 타고 성당에 도착한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성당 앞마당에 줄을 맞춰 앉아 있는 거였다. 먼저 도착한 선생들이 운집하는 학생들을 줄 세워 앉히고 있었다. 아마도 마산 MBC 방송 카메라가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폭력적인 해산을 종용하기엔 늦었다는 판단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주동자들끼리 집회를 모의하면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는데, 같은 반 친구가 구호를 적은 피켓을 몇 장 만들어오는 거였다. 뒤쪽에 서 있던 나랑 친구는 그 피켓을 가방에서 꺼내 옆의 학생들에게도 주고 우리도 들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이거 누가 한기고? 누가 만들었어?” 하는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누군가 피켓을 낚아채갔다. 학생 주임의 씩씩거리는 콧소리와 쌍심지에 불을 킨 것 같은 눈동자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알았다. 피켓이나 대자보 같이 글로 적힌 문구가 방송화면으로 나가면 선전 효과가 아주 크다는 것을. 그래서 반드시 시위를 할 때는 피켓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쉽게도 그 날 집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해산했다. 학교가 소속된 천주교재단에서 그날 하기로 한 해직 결정을 연기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그 이상 계획한 집단행동도 없고 (지금 같으면 피켓 들고 행진이라도 하자고 했겠지만 ) 아침부터 돌아다닌 피로감에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집에서 피켓을 만들어온 친구와 나는 학교에 들렀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중,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학생 주임과 부딪혔다. 주임은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나와 친구를 향해 엄청난 협박성 발언들을 날렸다. 특히 그 친구가 피켓 만들어온 것을 아버지에게 알리겠다며 협박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안기부 직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집회를 모의할 때도 대자보를 쓸 때도 친구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아버지가 알면 큰일 난다고 여러 번 걱정했었다. 선생이라는 작자가 어떻게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저런 식으로 협박하고 위협하고 욕을 할 수가 있나. 설마 진짜 아버지에게 이르겠냐며, 아닐 거라고, 길에 서서 우는 친구를 위로하면서 치밀어오는 분노로 손이 부들거렸다. 아마 내 인생 최고로 긴 여름날일 것이다.

더 황당한 사건은 2학기 개학 후에 벌어졌다. 그 날 이후 일주일 만에 간 학교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 해직 결정은 개학 전에 내려졌던 것 같다. 집회 주동자로 찍힌 우리들은 텅 빈 교실에 띄엄띄엄 앉아서 봄부터 무슨 일을 했고 그날 집회는 어떻게 하게 됐는지 시간 순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적으라는, 이른바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경찰이 조사하듯 진술서를 작성시켰다. 그 전에 우리들은 모여서 당시는 전교조에서 탈퇴했던 젊은 사회선생님 이름은 절대 써서는 안 된다 등 몇 가지 입을 맞췄다. 진술서를 쓰고 나자 교장실에 불려갔다. 회의실 탁자를 둘러싸고 서 있던 우리에게 던진 교장 수녀의 첫 마디는 쌍욕이었다. 아, 절대 잊을 수 없으리. 이런 말도 했다. “성지가 정말 너희들 것인 줄 알았냐, 웃기고 있네.” (운동장에 ‘성지의 주인은 우리’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그 후 담임이 불러 ‘나는 뭔가 나쁜 짓을 했는데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류의 글귀가 적힌 종이를 주면서 부모님 도장을 받아오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께 말씀 드리지도 않았고 몰래 도장을 찍어갔다. 며칠 뒤, 담임은 이 정도로는 안 될 것 같다며, 부모님 한분을 학교에 모시고 오라고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얘기를 듣고 난 엄마의 첫 마디. “학교에서 벌어진 일인데 왜 부모더러 학교에 오라 가라 하냐? 난 못 가겠다.” 이미 개학 후 일주일 정도를 공부도 못하고 선생들에게 시달리던 나는 정신적으로 지친데다 계속 이러다간 대학도 못 가겠다는 위기감에 몸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결국 엄마 대신 같은 여고를 나온, 유치원에서 잘려서 집에서 쉬고 있던 셋째 언니가 와서 담임을 면담하고 갔다. 교무실에서 면담을 끝내고 교실에 찾아온 언니는 밝게 웃으며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공부하면 된다. 걱정 마라.’ 하고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갔다. 그렇게 고3의 가을이 흘러갔고 대입시험을 보고 겨울이 됐다.

공교롭게도 내가 가는 대학의 신입 오리엔테이션 일정과 고등학교 졸업식 일정이 겹쳤다. 몇몇 신입생들은 하루만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고 졸업식에 갔다. 나는 부모님에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것이라며 거짓말을 했고 결국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엄마가 대신 가서 졸업장과 졸업 앨범을 받아오고 친구와 사진도 찍었다. 졸업식도 가기 싫을 만큼 학교의 그 선생들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교장 수녀의 그 욕을 들었어도 가톨릭이 무조건 싫다거나 하는 편견은 없다. 다만 모든 종교인들이 상상 속의 천사들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해직 교사 중 한분이 1학년 담임이었는데 떠나는 날 통곡하던 그 반 아이들 울음소리. 자신들의 담임이 왜 갑자기 해직된 건지 그들은 알았을까. 아마 나처럼 그 반 아이들도 전교조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 기억이 살면서 어떤 자리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전교조와 함께한 고3의 기억은, 오래된 조직이 갖는 보수성, 장기근속 선생들이 보여주는 기득권자들의 모습, 나이 많은 것을 무조건적인 권위로 내세우는 한국적 정서... 이 모든 것들에 환멸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만약 사회가 이런 식으로 약자들을 못 살게 구는 거라면 비판하고 맞서 싸우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교 신입생이 된 나는 전교조 1세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