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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을 돈으로 사려는가?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45
조회
169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오늘 신문을 통해 정부는 2014년도 성인지 예산을 올해보다 약 70%정도 늘어난 액수로 제출했다는 것을 보았다. 성인지 예산이란 양성평등을 정책 및 예산에 투영한 개념으로, 정책과 예산이 남녀의 차이에 기반하여 평등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고려하는 정책과 사업에 드는 예산을 말한다. 즉, 정책이나 예산이 성별에 미칠 영향을 평가하고 그 결과 어느 한 성이 다른 성에 비해 차별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면 이의 개 을 위한 사업예산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예산에 비례해서 사업과 참여기관도 늘어났다고 한다. 반가운 얘기다.

조금 구체적으로 사업내용들을 보면 ‘여성의 경제적 역량강화’, ‘돌봄 지원과 일/가정 양립기반 구축’, ‘폭력근절과 인권보장’, ‘복지와 건강권’이고 이 중 많은 예산이 책정된 분야는 ‘돌봄지원’으로 가정양육수당과 공공형 어린이집, 영유아 보육료 지원예산분야라고 한다. 그 외 여성정치참여를 지원하기 위한 연수예산으로 1억6800만원도 있다. 물론 근절해야 할 4대악에 포함되는 성폭력예산이 증액된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과연 어떤 방지대책인지가 관건이지만. 뭐 여튼 성별격차가 10%이상 나는 분야를 중점으로 예산 기획을 했다고 한다.

한편, 다른 기사에서는 중증장애인연금 공약이 파기되었다고 한다. 모든 중증장애인에게 월2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던 공약은 소득수준에 따라 하위 70%의 중증장애인에게만 지급하기로 했다. 얼마 전 기초연금 공약파기의 기억이 되풀이 된다.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복지예산이 당초 약속에 비해 줄어드는 반면 여성관련 예산은 예년에 비해 훨씬 증가했다는 것을 여성인 나로서 반가워하고, 여성대통령이 되니까 여성들이 대접받는다고 좋아만 하기엔 석연치 않은 현 정부의 ‘성인지 감수성’이 포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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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연합뉴스


 

여성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위계적 권력관계에 응축되어 있고, 이로부터 여성들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결정자로 살아가기엔 많은 걸림돌들이 파생된다는 것이다. 권력은 반드시 권력을 부리는 자와 따르는 자로 양분되게 마련이고, 성불평등은 성에 기반 하여 어느 한 성이 어느 한 성에 대한 권력행사를 통해 의사결정과 실행을 통제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 즉 성별위계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 여성의 문제를 예산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여성을 ‘남성’에서 ‘남성적인 국가’로 예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산의 분배가 여성들을 사회정책 결정의 참여자로 보는 정책보다는 국가유지의 수단 혹은 도구적 관점의 사업에 훨씬 많이 배분된 것 때문이다. 양육과 건강권을 중심으로 한 예산이 엄청나게 증액되었음에 비해 여성의 주류화 전략으로서의 여성정치참여지원금은 딸랑 1억 6000여 만 원이 전부이다. 나는 이 예산을 보면서 ‘돈 줄게 건강한 애들 많이 낳아줘!’ 라고 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 공보육과 공교육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보육의 공공성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이는 ‘성인지’ 예산이 아닌 교육이나 일반 복지 예산으로 편성되었어야 한다. 성인지 예산에 보육 예산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양육’을 여성의 몫으로 보는 ‘반 성인지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성역할 고착화의 조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현 정부의 ‘성인지’ 예산은 ‘성차별’예산이다.

한편, 여성의 ‘돌봄영역’은 ‘아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의 돌봄은 전체 가족을 그 대상으로 하며, 따라서 가족 중 누군가 병이라도 나거나 사고를 당하면 그 ‘사건’은 곧 ‘여성의 일’ 이자 ‘여성문제’가 된다. 이런 점에서 노인과 장애인은 여성들의 돌봄에서 핵심적인 대상들인 것이다. 가족 중 장애인이 있다면 그것은 장애인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족의 문제이고 이는 곧 여성의 문제가 된다. 노인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노인을 돌볼 수 없을 때 그 책임은 고스란히 여성들이 짊어지게 마련이고 그래왔다. 때문에 노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 및 예산은 여성과 직결되는 사업이자 예산이 되는 것이다. 기존의 성 역할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성인지적’ 예산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과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의 책임-예산을 축소하고 성차별 및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이상한 예산을 ‘성인지’적이라고 하는 것은 여성들의 차별적 현실에 대한 반영도 아니고 성인지적인 미래를 반영한 정책도 아니다.

여성문제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는 이러한 양립 불가능한- 한 쪽에선 돌봄에서의 해방과 한쪽에선 강화라는- 정책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양육에서의 해방과 사회참여-경제 및 정치-사이에 놓여진 수많은 기제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많다고 여성이 해방되는가? 양육비가 덜 든다고 여성의 예속이 해소되는가? 문제는 시간과 돈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여성들이 무엇을 통해 참여의 주체로 나서게 되는가?’의 과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집중되어야 할 정책과 예산은 이 분야가 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비중 있는 고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그렇지....’다.

양육비에 대한 예산을 양성평등예산으로 둔갑하고 여성의 부담이 되는 노인과 장애인의 복지예산은 삭감하면서 친여성적인 정책들을 전개하는 듯이 포장하는 것 같아 나는 이번 ‘성인지 예산’이 달갑지 않을 뿐 아니라 한심하다. 무지에서 출발하는 책임감을 누가 말릴 것인가? 혹시나 ‘여성’대통령으로서의 부담감을 갖고 있다면 나는 부탁하고 싶다. 제발, 그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