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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국가 이전의 인민, 인민을 위한 국가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04
조회
19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재판’, ‘인민위원회’ 등, 해방 후 분단된 한반도 북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국가를 형성하면서 ‘인민’이라는 말을 선점했다. 그런 반면, 남쪽 사람들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를 형성했다. 내외적인 압력에 의한 분단과 그로 인한 참혹한 전쟁이 수행되면서 냉전의 국제질서 속에서 남북 양쪽은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는 강고한 대립적 대타성(對他性)을 마치 국체를 이루는 주축이자 기초인 양 여겼다. 그런 가운데, 남쪽에서는 북쪽이 선점한 ‘인민’이라는 말이 국가적인 금기어가 되었다.

그런 완전한 대립의 대타적인 관계가 분단을 더욱 고착시켰지만,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면서 국제적으로 냉전 질서가 함께 붕괴되자 사태가 일변한다. 한국 전쟁에 대대적으로 참전함으로써 대표적인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 대한민국이 1992년 8월 정식으로 수교를 맺는다. 그러면서 그 전에 이미 미국과 일본이 단교를 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의 ‘차이니즈 대만’과 대한민국 역시 단교를 하게 된다. 그 결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그동안 적대적인 감정을 담아 불리던 ‘중공’이라는 약칭 대신에 중립성이 강한 ‘중국’이라는 약칭을 누구나 쓰기 시작하게 된다. 명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 명에 들어 있는 ‘인민’이라는 말의 용법과 효과를 적어도 외교적인 관계에서 충분히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영어로 ‘People's Republic of China’다. 정치학적인 용어로 ‘인민’은 ‘people’임을 말해 준다. 그러니까 링컨이 1863년에 제시한 민주주의의 3원칙,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 아니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으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국민’은 국가가 형성되고 인민 각자가 그 국가의 일원이기를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동의할 경우에만 성립한다. 그래서 예컨대 국제적으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처한 ‘아시아의 고아’ 대만” 1)의 거주민은 국민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가 쉽진 않지만, 당연히 그들은 인민인 것이다. 서경석 선생이 『디아스포라의 기행』에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조선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자각적으로 북한의 국민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시 조선은 하나’라는 생각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사람들, 재일조선인이 형성된 역사의 기록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자발적인 난민으로서 기꺼이 불리한 지위를 택하고자 하는 사람들, 또는 기재변경을 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등 다양한 입장이 뒤섞여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2),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도 아니고, 일본국의 국민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인민인 것만은 분명하다.

1) 백영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창비, 2013, 181쪽. 1)
2) 서경석, 『디아스포라의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김혜신 옮김, 돌베개, 2008,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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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2년 8월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악수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처럼 ‘인민’은 ‘국민’과 다르고, 또 자발적으로 정치적인 참여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 ‘시민’과도 다르고, 당연히 군주제 하에서의 ‘백성’과도 다르다. 그런가 하면, 개개인의 특수성과 자율성이 삭제된 ‘대중’과도 다르다. 다만, 그동안 ‘people’이 한편으로 ‘민중’으로 번역되어 읽히면서 부당한 주권적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적 ․ 혁명적 지배를 노렸던 점을 감안하면, ‘인민’과 ‘민중’이 일정하게 가장 가까운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주권적인 지배자들 역시 넓게 본 의미의 ‘인민’에 속하는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한 사람의 인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넓은 의미로 볼 경우, ‘인민’이라는 말이 추상화되면서 정치사회적인 함의가 약화되고, 그 활용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발휘되는 인민의 보편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민이 그저 ‘인간’ 또는 ‘인류’라는 일종의 생물학적인 내지는 진화론적인 종(種)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며, 혈통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민족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인민은 첫째, 그 어떤 형태의 사회정치적인 체제라 할지라도 그러한 체제를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보편적인 바탕이다. 둘째, 각종 다양한 사회정치적인 체제와 그 하위 체제를 구성함으로써 주어지는 특징적인 여러 명칭들은 인민이 특정하게 규정됨으로써 나타나는 인민의 특수한 형태들이다. 셋째, 국가와 시민사회 또는 불특정한 각종 사회적 네트워크 등은 현실적으로는 인민의 삶을 제약하지만, 이념적으로 볼 때, 그것들은 인민의 삶을 널리 최대한 긍정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넷째, 그러므로 주권은 오로지 인민의 삶을 위한 것이며, 만약 주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민주권이고, 이 인민주권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주권이다. 다섯째, 그러므로 인민의 삶은 사회역사의 전반적인 네트워크를 관통하는바, 그 내부에 온갖 특이성과 차이들이 들끓는 절대적인 위력으로서의 공통적인 문화로서 축적 ․ 계승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민을 정의하고 보면, 국가와 국가의 주권이 문제로 등장한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바탕으로서의 인민의 현존과 상대적이고 특수한 국가 및 국가 주권의 현존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의 문제가 근본적인 사안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 ②항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은 인민주권의 관점으로 환원해서 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그러한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것으로 된다. 이렇게 바꾸어서 보면, 먼저 국가가 있고 그래서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국가가 구성되기 전의 국민은 당연히 성립되지 않는다), 먼저 인민이 있고 그 인민이 국가를 구성함으로서 제 스스로를 국민으로 자기 규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따라서 당연히 국가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민들 간의 공화(共和)에 의거해서 유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 ①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헌법 조항 역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을 만든 인민들이 서로의 동의와 합의에 의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이다.”라는 것으로 풀어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구성(헌법, constitution)은 다들 알다시피, 대한민국을 구성하고자 한 인민들에 의해 특별하게 예외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구성을 모델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대의의 위기와 민주주의 형태들의 부패는 전 지구적 조건으로서, 모든 국민국가들에서 즉시 볼 수 있는 사례이며, 여러 인접한 국가들이 이루는 지역 공동체들에서 극복될 수 없는 요소이고, 전지구적 · 제국적 차원에서 폭력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전지구적 위기는 세계의 모든 통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 끝없는 전 지구적 전쟁상태는 ……”라는 말 3)을 들을 때 지성인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언명이나 이 언명을 인용하는 것이 이러한 왜곡된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정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이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하는 비관적인 현실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전 지구적’ 운운 하는 경우, 예사로 그 어떤 대안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기가 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민의 존재를 염두에 둘 경우, 적어도 사회정치적인 대안을 모색한다면, 그와 같은 거시적인 보편적 구도를 염두에 두는 것은 필수적이다.

3)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다중,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 조정환 · 정남현 · 서창현 옮김, 세종서적, 2008, 418쪽.

중요한 것은 그런 가운데 인민 각자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또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또는 한 사람의 지역민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반(反)인민적인 일이 국가 또는 국가 주권에 의해, 또는 국가 간 또는 국가 간 주권관계에 의해 자행되는가를 유심히 살펴 실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첩 조작을 위한 외교 문건의 위조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국정원이 마치 무소불위의 초헌법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제적인 괴물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민에 의한 공권력을 대표하는 검찰총장마저 그 개인의 인민적인 권리인 사생활을 ‘조작하여’(아직 정확하게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찍어내기’를 한 것은 이번 사건에 비하면 약과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주권을 지배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정치적인 개인 내지는 소수 집단이 마음만 먹으면 그 자의에 의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의 현존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민으로서의 현존마저 폭력적으로 아예 짓밟아 처참하게 파괴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국가 간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더욱 심중하게 판단하느라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사건이 여실이 폭로되었는데도 최고의 통치자인 현직 대통령이 장기간 묵언으로 일관하다가 겨우 원칙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만을 한 채 정작 해당 기관의 최고 책임자를 전혀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총포로 무장하고서 대대적인 격돌을 해야만 전쟁인 것은 아니다. 개인적이거나 소수 집단이 그들의 자의에 의해, 진정 국가를 구성한 주체에 대해 그 주체로서의 권리를 철저히 유린하는 행위야말로 일종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 말하자면 일종의 내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임시로 국가의 주권을 담당해서 지배하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권한을 권력으로 오인하고, 그럼으로써 국가권력을 사유화해서 진정 본래의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갖는 주권적인 위력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을 ‘반란’이라는 말 외에 어떤 용어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인민주권에 바탕을 둔 국민주권,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헌법, 헌법에 바탕을 둔 법률, 바로 그 법률에 따라 한 치 빈틈도 없이 철저히 처벌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가 있기 전에 인민이 있고, 인민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삶의 현존이야말로 국가의 존립 목적임을 분명히 일깨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