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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유예된 사회 (이광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00
조회
182

이광조/ CBS PD



‘유서를 대신 써주며 동료의 죽음을 부추긴 파렴치한.’ 1991년 5월 8일, 재야단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김기설 사회부장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고 죽음을 택했다. 한 달 전 시위도중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경찰에 맞아 사망한 데 대한 항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총무부장이었던 김기설 씨의 동료 강기훈 씨가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신 써주며 죽음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돼 법의 심판을 받았다.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 강기훈 씨는 3년을 꼬박 감옥에서 보내고 출소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강기훈 씨가 겪었을 절망과 고통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패륜범’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강기훈 씨의 이후 인생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사건 당시부터 조작 논란이 일었던 이 ‘유서대필 사건’에 대한 재심 선고가 내일(2월 13일) 이뤄진다. 사건이 발생한지 23년,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재심권고 결정을 내린지 7년만의 일이다. 그 사이 20대의 청년은 50대가 되었고 그의 몸은 병마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23년 전 그를 ‘패륜범’으로 몰아가는 데는 김기설 씨의 유서 필적이 강기훈 씨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국과수의 필적감정결과가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필적감정결과는 바로 그 국과수에 의해 뒤집혔다.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기대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다.

판결 결과는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무죄 선고가 나오더라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강기훈 씨가 그동안 겪었을 고통의 시간을 도대체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강기훈 씨를 패륜범으로 몰아 인생을 파괴했던 검찰은 여전히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고 당시 강기훈 씨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들은 출세가도를 달려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지 않은가(담당 검사였던 곽상도 씨는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지냈다). 재심 결과 검찰과 재판부의 잘못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반성을 기대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교통사고를 내더라도 사람이 다치면 책임을 지게 돼 있는데,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국가폭력에 앞장섰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못하는 현실은 내게 지극히 비정상으로 보인다.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자들에게는 최소한 변호사 자격이라도 박탈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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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당시 고 김기설 씨가 남긴 유서와 강기훈 씨의 자술서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최근 화제가 됐던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됐던 “부림사건” 담당 검사들이 보여주는 태도를 보면 한 때 우리사회에서 진행됐던 ‘과거사 정리’ 작업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그 분들에게 한 마디라도 욕설을 하거나 부당한 처우가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책임지겠다.” ”한 달간 피의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면 경찰이나 검찰청에 신고가 들어왔을 텐데 당시에 전혀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부림 사건이나 유서대필 사건처럼 국가권력의 기만과 폭력이 과거 한 때의 일이라면 답답함과 분노가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우리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 청산해야 할 ‘과거사’가 무더기로 쌓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내부 고발자를 소영웅주의에 우쭐한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국정원 대선개입사건 수사와 재판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아니 진실을 밝혀낼 수나 있을까? 쌍용자동차 노동자 대량해고 사건은 또 어떤가? 최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153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 무효 소송 항소심에서 법원이 1심 판결을 뒤집고 해고무효 판결을 내렸지만 그동안 해고노동자와 가족 등 2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인한 후유증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땅에서 정의는 끊임없이 유예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