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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사태 제대로 보기: 민주화 운동인가 극우 민족주의의 난동인가? (정재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58
조회
355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국가’, ‘민족’, ‘종교’ 등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한국의 진보 좌파 지식인들의 지식은 실제로는 철저한 서구 중심적 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은 비서구/비중심부 지역들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동에 대해 매우 단선적이고, 일면적인 사변적 분석만을 내놓기 십상이다.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즉 좌파적 성향의 조직들이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거나 저항 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민족주의적이거나 종교에 기반해 있거나 심지어 특정 지배 엘리트를 지지하는 것처럼 외형상 극도로 모순적인 상황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서구/비중심부 지역들에 대한 진단과 분석이 이러할진대, (신)자유주의자들이 좌파들보다 급진적인 의제를 내세워 개혁을 주도하고, 시장주의자들/서구화주의자들이 민주화 운동 혹은 저항 운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등 소위 옛 사회주의 진영 혹은 체제전환국들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한층 더 어려움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당 중심의 서구 정치학 논리에 빠져 선출되지 않은 관료 등에 의한 과두 지배 세력의 지배를 간과하고, 시장 체제를 근본적으로 대체할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의 잣대로 설명하려는 비과학적인 경향이 만연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도 그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보도와 해설을 못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거의 모든 요인들이 집약된 매우 복잡한 설명을 요구한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좌/우, 동부/서부(수도 포함), 친서구/친러시아, 민주주의/독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친러시아주의의 문제가 중층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이론과 개념에 근거해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특성이 있다.

먼저, 독자적 민족 국가를 제대로 형성해 본 역사가 거의 없었던 우크라이나는 말 그대로 만들어진 국가이다(그러나 우크라이나 민족과 러시아 민족 간에 차이가 없었다는 일각의 과도한 교조주의적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마치 옛 유고 연방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처럼 지금의 동부 지방은 러시아에, 그리고 서부 지방은 폴란드, 오스트리아 제국 등에 오랫동안 복속되어 온 탓에 양 지역의 문화적 차이는 한국의 동/서 지역 간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극도로 이질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후 소련 시대를 거치면서 한층 더 큰 규모로 이주해 온 러시아인들은 거의 동부 산업 지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는 한층 더 동부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의 정체성이 서부와 다르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종교 역시 양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의 차이를 더 크게 하는 요인이었고, 동부 지방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어보다 러시아어를 더 잘 구사하게 되는 등 언어적 요소는 양 지역 간의 차이를 확연하게 만들어 준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 건 바로 소련이라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문제와 그 붕괴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대안은 곧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체제라고 생각했던 시기, 사회주의는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파괴를 의미했고, 소련은 곧 러시아를 의미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소련에 반대하는 것이란 자유주의와 동시에 민족주의적 과제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탈소련/러시아란 곧 유럽화를 의미했고, 동시에 유럽자본주의의 주변부로의 종속이 차라리 낫다는 논리 속에서 시장경제로의 복귀는 곧 유럽으로의 통합을 위한 적극적 개방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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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로 사망자가 속출한 가운데 지난 1월 24일(현지시간) 수도 키예프 중심부에서
정교회 사제들이 시위대와 경찰 저지선 사이에 서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좌파'적 당이라기보다는 ‘친러시아적인 당’ 혹은 ‘러시아화된 우크라이나인들의 당’, 혹은 아예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당’으로 간주되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도모하던 당시에 '좌'란 지배자 러시아를 의미했으며, 저항 세력은 말 그대로 ‘러시아적인 것’과 ‘현실 사회주의적인 것’에 반대되는 거의 모든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좌'는 양 민족을 막론하고 그 어떤 진보적 의미도 갖지 못 한 채, 그저 ‘새로운 시장체제를 제대로 선도할 수 없는 무능하고 억압적인 옛 지배층’을 의미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체제 전환 이후 동이든 서든, 구 공산당 세력이든 저항세력이든 간에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 매우 빠르게 구 노멘클라투라 관료집단들의 지배를 용인 혹은 스스로 그 일원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과거 ‘좌’라는 이름으로 지배했던 기간 동안에 이론과는 달리, 실제로는 자유주의 단계에서 쟁취한 성과조차 파괴되었던 이 땅에서 이제 오히려 진보적인 의제들은 (신)자유주의자들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절묘하게도 '자유민주주의 정치 질서와 시장경제'를 지원한다는 서구의 이익과 맞아떨어졌거나 혹은 그 명목 하에 체제를 붕괴시켰고, 약화된 공산당에 이어 러시아의 앞잡이로서 러시아와 구 엘리트들(현재는 동부 지역 산업 올리가르히)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권 세력에 맞서는 세력은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서구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적인 세력이자 서구식 시장경제 개혁을 추구하며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지키는 세력으로 칭송되었다. 이러한 세력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중의 힘을 이용하여 소위 색깔혁명을 일으켜 집권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들의 정책은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었고, 계속된 경제 위기 속에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아 현 친 러시아 세력들에게 정권을 내 주고 만다.

그러다 보니 소위 저항세력에는 반러시아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서 아나키스트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친서구적 신자유주의 세력까지 함께 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저항 세력에는 서구의 지원을 받는 시민사회단체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일반 시민들,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들, 인권활동가, 반인종주의/반파시스트 사회운동가들, 양심적 언론인, 작가들과 같은 매우 모순적인 집단들이 함께 하고 있다. 게다가 서구와 이해를 같이 하는 올리가르히들도 이들을 후원한다. 중요한 건 반대편인 친 러시아 세력 쪽에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쪽 진영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조직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우크라이나의 현재 상황과 같은 체제전환기 국가들이나 비중심부 지역 국가들에서의 상황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보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민중의 시위가 단순하게 서구의 조종을 받는 것으로 판단해서도 안 되지만, 현재 정권이 권위주의 정권이기 때문에 현재의 민중의 투쟁을 쉽게 민주화 투쟁으로 규정하고 지지해서도 안 되는 매우 복잡한 상황들은 낡은 잣대로 세상을 해석해 온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