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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사회,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일고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30
조회
367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이자 민족지학자인 알랭 테스타(Alain Testart, 1945∼2013)가 쓴 『불평등의 기원』(이상목 옮김, 학연문화사, 2006)이라는 책을 읽고서, 원시 사회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생겨나는 경제적인 바탕은 비축과 정주(定住)지만, 그 사회관계에서의 바탕은 권력욕에 입각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처음에 유동의 수렵채집에 의한 경제생활이 이루어지다가 정주의 수렵채집의 경제생활로 변화하면서 불평등이 현저하게 발달하게 된다. 정주의 대표적인 경제방식인 농업목축이 발달된 사회에서 불평등이 현저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인 테스타는 한 사회 시스템에서 비축의 유무를 사회 분석의 기초로 삼는다. 비축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불평등이 발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맨 먼저 비축이 발달한다는 것은 비축을 잘 할 수 있는 기술 도구의 발달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보다 비축을 위한 도구를 더 잘 많이 갖추고 있다는 것은 미래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다른 사람에 비해 곡물창고를 완비한 사람은 생산된 곡물을 상대적으로 더 오래도록 저장하여 비축할 수 있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남은 잉여의 곡물을 버리고 떠나거나 다른 집단이 곡물 외의 다른 재화를 갖고 있을 경우 교환하여 처리한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썩기 쉽고 쥐와 같은 다른 동물들에 의해 침식되기 쉬워 오래 가지 못하는 식료보다는 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든 장식품들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이를 통한 위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사회의식(社會意識)이 발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흥미로운 분배 방식이 생겨난다. 사냥꾼이 캠프로 운반해 온 잡은 짐승인 식량의 전부 또는 일부를 타인들에게 분배해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잡은 동물이 남는다고 해서 이를 비축하는 기술이나 장치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동 수렵채집민의 식량 분배를 통해 사회적인 위신을 확보하는 것과는 달리, 정주의 수렵채집 내지는 농업목축의 사회에서 식량 초과분을 내구재로 전환해 개인적으로 영유(領有)한다. 둘은 성질이 전혀 다르다. 전자의 경우,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난다. 비축 시스템의 발달은 분배의 관심을 감소시키면서 제어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결핍에 대비한 비축민의 목표는 집단 내부의 다른 구성원과의 연대보다는 저장물의 증대에 초점이 맞춰진다. 대규모 비축이 시작되면서 과거의 공동체적인 식량 분배 규칙은 점차 사라지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에 관련된 규범과 그에 따른 의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맨 같은 유동민에게 축재나 비축 같은 독점 행위는 항상 비도덕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비축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면 사회경제적인 의식과 함께 도덕적인 의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친인척 관계나 우정에 기초한 타인과의 공동성보다는 개인적인 생존에 집착하게 된다. 자연에 대한 신뢰 대신에 불신이 생겨나고, 아울러 타인들을 불신하게 된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현행적인 노동보다 비축된 저장물에 함께 저장되어 있는 잠정적인 죽은 노동을 중시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주와 비축에 의해 토지 개발에 대한 배타적인 특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비축 시스템은 사회 전반적으로 인구를 증가시키고, 이러한 인구압(人口壓)은 집단 간의 빈부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킨다. 집단 간의 분쟁과 투쟁이 일어나면서 이를 해결하는 인물이 지도자로서 부상하면서 정치적인 계급사회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착취가 생겨나는데, 그 논리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생산물이 직접 소비되지 않고 비축될 경우, 특히 비축 기술의 발달에 의해 비축물의 보존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더 생산과 소비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생겨나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시간적이면서 사회적인 간격이 생겨난다. 생산물이 비축 장치를 영유하고 있는 비축자에게로 어떤 방식으로건 옮겨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생산자와 생산물의 소유자가 분리되면서 계급사회 특유의 형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비축은 대규모의 부를 언제나 자유로이 점유해서 처분할 수 있도록 하며, 하루의 노동이 아니라 비축한 전 기간의 노동을 일거에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비축 기술에 의거해서 잉여가 부를 형성하게 되고, 이를 통해 생산자들의 소비욕구와 생산기술의 요구를 넘어선 착취를 통해 오히려 비생산자 계급이 생산 시스템을 지배하면서 정치적인 강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유동 수렵채집민은 사회조직의 유연성과 집단분열의 용이함 그리고 유동성으로 인해 관용의 한계를 넘어선 착취를 허용하지 않는다. 피착취자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집단은 해체된다. 그리고 집단의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진다. 그와 달리, 정주생활의 조건인 고정적인 구조물과 비축이란 요인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한다.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떠날 수 없게 되면 착취는 더욱 심화된다. 착취를 더욱 강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주는 정치적 강제가 발달하는 첫 걸음인 것이다.


이상이 테스타가 책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본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에는 “비축”이 핵심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발달된 자본주의, 더욱이 최고도로 발달된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축 시스템과 이를 가능케 하는 비축의 핵심 장치는 무엇인가? 비축의 핵심 장치는 화폐이고, 그 비축 시스템은 은행 제도다. 하다못해 이전의 동전이나 지폐는 녹이 슬거나 찢어지거나 또는 화재나 홍수 등에 의해 크게 훼손될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컴퓨터 시스템에 의거한 비가시적인 수 내지는 전자(電子)의 흐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


금융 자본의 발달에서 바탕은 누군가가 앞으로 돈을 벌어 비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의거한 신용이고, 이처럼 미래 시간을 바탕으로 한 신용을 화폐로 바꾸는 데서 금융 자본의 시스템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용을 가늠하는 척도가 문제고, 그 척도를 거머쥐고 있는 계급이 문제다. 그 계급이 사회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평소 정말 궁금하게 여기는 사안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가계 부채가 1200조 원에 이른다고 말하고, 국가의 공공부채도 900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모두 합치면 2000조 원이 넘는다. 여기에다 사기업들이 지고 있는 부채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렇게 많은 채무에 대한 채권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채권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가 그 많은 돈을 비축할 수 있도록 한 사회 시스템은 과연 무엇이며,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정치적인 불평등에 의거한 권력 관계가 낳는 부작용이 얼마나 어떻게 대다수의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리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학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채권자는 결국 국가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나는 믿지 않는다. 혹자는 부채 덕분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사히 굴러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르긴 해도, 전 세계의 거대 금융 자본가들이 채권자의 일원으로 작동할 것이고, 수없이 많은 주식 투자자들과 예금자들이 채권자의 일원으로 작동할 것이다.


20150916web03.jpg사진 출처 - EBS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채권자가 있으리라 여기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 시스템이리라 짐작된다. 그 거대 규모의 부채는 특별히 자산가를 채권자로 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일체의 부채와 채권이 은행을 통해 들락거리면서 관리되고 처리된다. ‘지급 준비율’이라는 기묘한 장치가 그 주범이지 싶다. EBS MEDIA 기획 팀에서 출간한 『자본주의』(EBS <자본주의>제작팀 ‧ 정지은 ‧ 고희정 지음, 가나출판사, 2013)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지급준비율이 3.5%일 때, 예금된 5천억 원은 6조 60억 원까지 대출을 가능케 한다(46쪽 참조). 이에 따르면, 우리 모두의 그 거대한 부채의 채권자는 일종의 ‘유령’이다. 그러니까, 5천억의 자산가는 자기도 모르게 6조 60억 원에 이르는 유령의 금융자본을 위한 매개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은행에서 이런 자산가를 얼마나 귀하게 모시고자 하겠는가.


결국, 금융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이라는 ‘유령’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고 있고, 그에 따라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 생겨나 확산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기묘한 유령과 싸워야 한다. 그러니 그 싸움이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그래서 비록 조심스럽게나마 ‘유령 사회’라는 말을 제시해 본다. 유령 사회는 죽은 것이 산 자를 지배하는 사회다. 유령 사회를 인간 사회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즉 죽은 노동의 중심이 아니라 산 노동이 중심인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산 자들의 생명과 현존 및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가 끊임없이 이미 늘 무덤 속에서 썩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5년 9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