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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가상의 틈’...한‧러 수교 25년 (이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38
조회
391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지 4반세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25년 전, 아직 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1990년 9월 30일,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양국 외무장관이 유엔본부에서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일찍이 1884년 조·러통상조약으로 처음 서로 맺어졌지만,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이후로도 분단과 냉전 등으로 오랜 기간 적국일 수밖에 없었던 양국 역사를 떠올리면, 당시 수교는 거의 100년 만에 맞는 경사였다.


수교 25주년을 기념해 올해 한국과 러시아 양국에서 많은 행사가 열렸다. 수교일인 지난 9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25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이끈 방러 의원단을 포함해, 러시아 상하원 부의장, 정관계, 재계 인사 등 800여 명이 행사에 참석했고, 박근혜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가 오갔다. 올 여름을 뜨겁게 달군 ‘유라시아친선특급’, 즉 블라디보스톡에서 베를린까지 14,400km를 19박 20일에 걸쳐 관통하는 평화기원열차대장정의 주요 목적 중 하나도 한·러수교 25주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한·러교류협회, 국제무역연구원, 한국노어노문학회, 한·러오페라단 등 다양한 관련 기관이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나 페스티벌, 전시회를 열었다.


그 중에서 필자에게 확 다가온 것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한·러 미디어아트 전시회 <실재와 가상의 틈>이었다. 전시회의 제목인 ‘실재와 가상의 틈’은 현실과 허구, 사실과 이미지 사이의 예술적 긴장에 주목하는 팝아트도 의미 있겠지만, 수교 25주년을 맞는 한·러 관계의 실상에도 정확히 대입될 수 있을 거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SSI_20150727173413_V.jpg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미디어아트 작가들의 독특한 시선과 표현방식을 소개하는
경북 경주 우양미술관의 ‘실재와 가상의 틈, 한국-러시아 미디어아트의 오늘’전에 소개된 작품들.
레오니트 티시코프의 ‘타이완의 사적인 달’. 경주 우양미술관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실 수교 후 25년이 흐르는 동안 한·러 관계는 양적으로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 이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각종 경제 지표들이다. 일례로 한·러간 교역 규모는 1992년 1.9억 달러에서 2014년 258억 달러로 약 135배 증가했다. 한국의 대 러시아 연평균 수출규모는 22.4%, 수입규모는 27.5%씩 성장해, 1990년 수교 당시와 비교할 때 수출은 86배, 수입은 209배 증가했다. 2014년 기준으로 러시아는 한국의 12번째 수출상대국이자 11번째 수입상대국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푸틴의 신동방정책이 만나 그 전진기지가 되는 러시아 극동의 경우, 한국은 러시아 극동의 제1수출국이자 제3수입국으로, 해당 지역 전체 교역액의 약 26%가 한국을 파트너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표들, 기호들 뒤에 숨은 실재는, 실상은 어떠할까? 나아가 4반세기에 걸쳐 교류하며 만들어져 한국에 소통되는 러시아에 대한 기호와 이미지는 그 사실과, 실재와 얼마나 일치할까. 러시아 전문가로서 필자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러시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러시아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를 늘 먼저 설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식민, 분단, 냉전과 탈냉전의 근현대사를 얼핏 떠올리기만 해도 제정러시아로부터 소련,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등 현 정부의 주요 외교정책도 러시아를 제외한 채로는 실현이 어렵다. 경제적 차원의 의미는 이미 밝힌 바와 같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의식 속의 러시아는 여전히 멀고 낯선 외국이고, 매번 새로이 관계의 의미가 해명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파트너다. 러시아에 대한 표상은 사회주의 종주국이자 냉전의 주축이었던 과거의 위압적 모습, 다른 한편으로는 오일 머니로 좀 살만해진, 그러나 몰락한 제국의 이미지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간다. 이 과장된 공포와 부당한 폄하 사이, 그 속 어디에도 진짜 러시아는 없다. 이렇듯 러시아에 대한 정치·경제지리와 심상지리 사이의 간극은 러시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방해하며, 이것이 또 다른 차원의 ‘실재와 가상의 틈’을 만들어낸다. 러시아에 대한 선언적 이해만으로 추진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요란한 팡파레 아래, 실제 러시아 극동지역의 우리 기업이나 사업가들은 악전고투하고 있다. 일례로 현대중공업이 무려 5천만 달러를 들여 2013년 완공한 블라디보스톡의 고압차단기 공장은 한 번도 기계를 돌려보지 못한 채 쭉 멈춰 서 있다. 한국 영농기업인 아그로상생은 농수로 권리를 두고 현지 중국인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 정부와 힘겨운 소송 중이다. 올 여름 필자가 만난 블라디보스톡의 한국기업 지상사 관련자들에게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독려’하는 장밋빛 미래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멍에였다.


수교 25주년을 맞은 한·러 관계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 4반세기에 걸맞은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러시아라는 실재와 가상의 틈, 그 간극이 최소화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실재와 가상, 사실과 이미지의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사실 어떤 것이 실재이고 어떤 것이 이미지인지 명확히 선을 긋는 것조차 힘들다. 또 가상이, 이미지가 실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러 미디어 아트 전시회는 실재와 가상 사이의 그런 유희적 관계, 그것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효과를 타깃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예술이 아니다. 현실에 필요한 건 불가능하더라도 최대한 실재에 다가가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까지도 러시아는 그 어떤 나라보다 그런 노력이 많이 요구되는 대상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다소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영화 <매트릭스> 속 모피어스의, 또는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란 말이 떠오른다. 사막일지라도 러시아의 실재에 가닿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글은 2015년 10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