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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 잊지말아야할 것 (최정학)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28
조회
213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광복 70주년이다. 대형건물마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동네 아파트에서도 한 달여 가까이 국기를 게양하라고 성화이다.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참여하는 국민 합창단이 공연을 하는가 하면, 급기야 정부는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 주겠다고 까지 한다. 메르스 사태로 인한 경기위축을 회복하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하겠지만, 70년을 맞은 광복절을 통해 이미 희미해져버린 민족주의, 애국심 혹은 국가의식을 되살리려 애쓰는 정부의 노력이 가상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올바른 민족의식과 무엇보다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투철한 국가 관념을 가져야 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필자는 민족주의나 특히 국가주의가 그렇게 바람직한 이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냉혹한 국제현실에서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데에는 일부라도 수긍하지 않기 어렵다.


l_2015081001001064300114101.jpg서울시 광복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과거 서울시청으로 사용했던 서울도서관 건물 외관을 한옥으로 단장했다. 서울도서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부 청사로 쓰였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최근의 국제정세를 보면서 100여 년 전의 위태로운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9세기말 세계는 이미 자국의 이해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수탈을 서슴지 않는 제국의 시대로 바뀌었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웃이 그러한 열강들에 의해 갈갈이 찟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부적으로 여전히 친청과 친일, 친러가 대립하여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일본이 이 땅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러시아와의 일전도 불사할 조짐을 보이자 고종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고 이를 유럽의 여러 제국과 미국에게 승인받으려 하였다. 말하자면, 일본의 부당한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었을 터인데, 황제의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이를 정면으로 묵살한 사람은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대신 돌아온 것은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조약’이다. 일본이 청에 이어 러시아마저 패퇴시키자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실력지배를 이제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긴 미국이 이를 은밀하게 승인하는 대가로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얻는다는 이 밀약으로 말미암아, 그 이후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 그리고 마침내 한일합병으로까지 이어졌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총리 아베가 일본의 군대가 해외에서 군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안보관련 법률을 개정하고, 우리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으로 이를 승인하는 21세기 초, 현재의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본이 말하는 군사 활동이 필요한 해외는 어디인가? 미국인가, 유럽인가, 중국인가. 역사적으로 일본은 늘 대륙진출의 야욕을 품어왔고 그 교두보가 되어왔던 곳은 항상 이 땅, 한반도였다. 미국은 어떠한가. 이러한 일본의 욕심을 모를리 없는 미국이 일본의 자위대법 개정을 용인하는 것은 일본과의 경제교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는 것은 물론 일본을 앞세워 중국의 동진정책, 이른바 동북공정을 제지하겠다는 것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이런 사정을 애써 무시한 채, 우리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국과의 혈맹관계만을 강조한다. 대통령부터 앞장서 미국에 달려가고, 집권당의 대표는 미국 땅에서 참전용사의 무덤에 큰 절을 올린다고 한다. 마치 조선의 대중국정책을 보는 듯 한 이런 일방적인 외교는 그래서 불안하고 편협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수년 전, 요즘 젊은 학생들 가운데는 광복절이 무슨 날인지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노교수의 한탄을 들은 기억이 있다. 딴은 그렇기도 할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생생히 기억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태어나기 50여 년 전의 일을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정만으로 가슴에 각인하라는 것은 좀 지나친 요구인 듯도 하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답은 이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은 강제로라도, 주입해서라도, 반복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니면 머리로라도 외우도록,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그 의미를 깨닫기도 할 것이고, 필요할 때 이를 새롭게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 의미이고, 무엇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인가. 광복절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진실은 대체 무엇인가.


태극기가 휘날리는 광화문 광장에는 아직도 세월호 가족의 농성천막이 1년이 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불과 1년 수개월 전에 온 국민이 슬픔과 분노에 빠지고 대통령부터 앞장서서 참사의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다짐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지금, 사고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가 몇 개월을 표류하다가, 조사1과장을 비롯한 핵심보직을 정부의 주장대로 파견 공무원으로 충당하기로 하였음에도 앞으로의 예산을 위원회 요구의 반 토막으로 줄이기로 했다는 지금, 그 아픔과 공포, 분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바쁜 세상, 무엇을 알기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것이 남의 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잊어도 되는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지혜가, 온 국민에게 지혜가 필요한 광복 70주년이다.


이 글은 2015년 8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