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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몰염치한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함(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3-13 11:43
조회
111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1.


초등학교 이학년 때이다. 골목 끝에서 나는 나보다 너더댓 살은 많은, 우리가 세 살던 주인집 언니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다. 이를 말리던 아이 중에 하나가 집에 달려가 엄마를 불러왔다. 주인집 아줌마도 같이 달려왔다. 싸운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언니는 한주먹도 안 되는 조그만 애가 지지 않고 달려드는 게 몹시 분했고 나는 그런 언니한테 지지 않으려고 씩씩댔다. 달려온 엄마와 아줌마를 본 순간 우리는 아이들답게 “우왕”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와 아줌마는 각자 자식을 붙잡고 야단을 쳤다. 엄마는 나한테 조그만 게 언니한테 덤비고 그런다고, 아줌마는 언니가 돼서 동생이랑 잘 놀지는 못하고 싸운다고. 우리는 입을 내민 채 집으로 돌아가 우물가에서 울어서 꼬질꼬질해진 얼굴을 씻으면서도 눈을 흘겼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 그 집에서 우리는 일 년쯤 더 살다 이사 갔다. 엄마가 학교 다니는 나를 두고 동생들과 시골에 갈 일이라도 생기면 주인집 아줌마는 나를 데려다 밥을 먹이고 재워줬다. 잠은 미예 언니랑 잤다. 나랑 싸운 언니다.


2.


해마다 정기세미나를 기획하였는데 어느 해인가 포스터에 들어갈 내용에 ‘사회’를 ‘좌장’으로 바꾼 적이 있다. 물론 ‘사회’를 보는 분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획한 정기세미나의 내용이 지난해와 특별히 달라진 게 없기에 당황스러웠다. 사회자라는 말보다는 좌장이라고 하는 것이 격조 있어 보여 그러는 걸까. 그해 세미나는 내용적으로 지난해에 미치지 못하였다. ‘좌장’은 그저 말의 허세였다.


그런 말의 허세와 허영은 우리 사회의 ‘리더’며 ‘어른’이라는 표현에서도 차고 넘쳐난다. 자격은 없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리더란다. 국회의원 3선이니 5선이니 하면서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사회의 리더며 어른들이 넘쳐나는 요즘, 내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루하고 몰염치하다. 제 욕심을 채우는 일에 골몰하면서도 자기가 어른이란다, 사회의 리더란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된다. 그저 내가 리더고 어른이니 내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희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옷을 갈아입고 화를 낸다. 보통 사람은 내 자식이 잘못했다고 내 자식을 야단치면서도 어른 노릇을 잃지 않는데, 제 욕심 채우는 일에 골몰하는 사이비 리더는 너희가 잘못하는 거라고 큰소리치고 화를 낸다. 어찌 그리도 체면 자칠 줄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건지. 바야흐로 세상은 염치없는 이들이 득세를 하고 부끄러움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


3.


오래전에 읽은 시가 자꾸만 생각나 시집을 찾아봤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신동엽, 산문시 <1>)



이토록 지독하게 몰염치한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무력감은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한” 그런 세상을 간절히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