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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와 혐오정치(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2-28 15:52
조회
120
이윤 / 경찰관

 

초등학교 시절 우수상을 받아오면 어머니는 우리 삼 형제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200원쯤 하던 짜장면을 사 주셨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시며 3개만 시키셨고, 나는 이 맛있는 짜장면을 왜 싫다고 하시는지 궁금해하면서 쫄깃하고 달콤한 면발을 목젖 너머로 삼켰다. 한 친구 아버지는 우수상 받아오면 자전거를 사준다고 했다는데 그게 참 부러웠다.


만일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자전거를 사주셨으면 나는 그 후에도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인지부조화 이론에 의하면 자전거 보상으로 공부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짜장면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이라기에는 너무 하찮아서 노력-보상 간 불일치가 발생한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공부가 재미있었다거나 미래를 위한 준비 등 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태도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후 별다른 보상이 없어도 계속 열심히 공부했다. 어머니는 가정 형편 때문에 짜장면으로 보상하셨지만, 인지부조화 이론 관점에서는 정확한 보상이었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은 심리학자인 레온 페스팅거가 1957년 발표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신념, 의견, 태도, 행동 간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불균형 상태(인지부조화)를 불편해하므로 이를 해소하여 조화상태를 이루려 한다는 이론이다. 불균형 해소를 위해 주로 변경하는 것은 변화나 조작이 간단하고 쉬운 의견이나 태도이다. 친구들과 나가 뛰어놀고 싶은 것도 참고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공부한 노력에 비하면 짜장면은 너무 소소한 보상이라 노력-보상 간 불균형이 생긴다. 이미 해버린 노력과 시험 결과와 먹어버린 짜장면은 변경할 수 없는 상수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태도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나 자신도 잘 몰랐기에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공부가 재미있어’ 또는 ‘공부 별로 어렵지 않네’라는 태도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포도를 따 먹지 못한 여우가 ‘저 포도는 익지 않아서 신맛이 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도 인지부조화 해소를 위한 자기합리화의 일례다. 3천 회 이상 엄격한 심리학 실험을 거쳐 검증된 인지부조화 이론은 많은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인지부조화가 있을 때 보통은 태도를 쉽게 바꾸지만, 정치적‧종교적 신념은 바꾸기 어렵다. 살아오면서 정치적‧종교적 신념에 대해 남들에게 여러 번 말했거나 그에 맞는 행동을 많이 하여 이미 상수가 되어서 변할 수 없다. 누군가에겐 그 신념이 자신의 정체성 또는 존재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신념과 불일치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에 대해 부인하고, 분노하고, 신념과 일치하는 쪽으로 왜곡 해석하려 한다. 신념에 배치되는 사실‧증거‧가설은 애써 외면하고, 일치하는 것만 찾아다닌다.


A정당에 투표한 사람이 있는데, 선거 결과 B정당이 승리하여 다수당이 되었다고 가정하자. 지지 정당이 정권 잡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온 정치적 신념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A정당이 패배한 선거 결과 자체가 자신의 신념 및 투표행위와 배치되므로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이 사람은 B정당이 틀렸다거나 부정하게 승리했다는 태도를 형성하고, 그 증거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정당 간 정강이나 정책이 서로 다르기는 해도 틀리기는 쉽지 않으니 다른 데서 B정당의 흠을 찾으려 한다. 전통적으로 뇌물과 성추문은 한 인간을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장하는 데 청산가리만큼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A정당은 약발 좋은 추문을 여기저기 흘리거나 만들고, 이 사람은 B정당 사람들의 뇌물과 성추문 그리고 기타 여러 자질구레한 잘못을 찾으려 애쓴다. 지저분한 사람들 모인 곳이 B정당이라는 증거를 보며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B정당이 틀렸다는 신념을 확인시켜 주는 온갖 지저분한 증거에 젖다 보면, B정당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혐오감이 증가한다. 자극적인 뉴스 헤드라인과 유튜브 알고리즘은 이 과정을 더 쉽고 빠르고 강하게 해 준다. 게다가 정치인의 언행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조롱하고 멸시하는 컨텐츠에 많이 노출될수록 시청자의 마음속에는 정치적 신념과 상관없이 인간적 혐오감이 증폭된다. 증폭된 혐오감은 정치 테러로 발전할 수 있다. 내가 지금 힘들고 괴로운 이유가 모두 그 사람 탓이니 악마화된 그 사람을 없애야 나와 사회, 나라가 편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인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발생한 이유도 이런 과정으로 자라난 혐오감이 원인일 것이다.


물론 사생활이 난잡하고, 거짓말 잘하고, 부정축재하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 맡기는 격이니 공익 목적으로 널리 알려야 하지만, 이런 네거티브 전략이 주가 되어 혐오감만 부추긴다면 정치는 사라지고 수치와 경악만 남게 된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다. 유권자들은 인지부조화가 혐오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도 틀릴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내 신념과 반대되는 의견도 경청하고, 정보를 검토할 때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해야 한다. 개인이 깊이 생각하고 알아보기에는 너무나 먹고살기 바쁜 세상이 되어버려서 정보를 빨리 처리하는 게 편하겠지만, 그럴수록 스스로 한 번 더 생각하는 노력을 해야 혐오정치를 멀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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