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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꽃은 누가 쏘아올렸을까(김아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3-17 16:16
조회
890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의 조명이 꺼졌다. 동이 트려면 두어 시간 남은 새벽이었다. 설핏 든 잠을 깨운 것은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성이었다.


 “박**님, 시월. **일, 잔액은 삼천. 이백. 팔십. 원. 입니다.”


 자리에 앉기 전 보아둔 덕에, 뒷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알고 있었다. 집에서 준비해온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단단히 동여 묶은, 오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물건을 포장하는 손이 무척 잽싸고 일이 능숙해 보였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모바일 뱅킹을 다루는 일이 익숙지 않아 폰뱅킹을 하는 것 같았다. 적당한 소음, 흔들리는 어둠과 피곤 속에 거의 모두가 곯아떨어졌을 무렵, 그 기계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고 나는 그 이후 다시는 쿠팡 셔틀버스를 타지 않았다.


 몇 해 전 그 무렵 나는 어떤 분야의 창작을 하고 싶었는데, 집회 및 시위, 잡다한 사무, 여행 같은 것 말고 삶의 경험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큰 걸림돌이었다. 선생님은 고군분투와 갈등 같은 상황을 만들어보거나, 독특한 소재가 없으면 묘사를 잘 해볼 것,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해 볼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집회나 시위, 잡다한 사무, 여행 같은 내 경험치 안에서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쿠팡 물류센터 알바는 그래서 시도해본 여러 가지 일 중에 한가지였다.


 쿠팡 물류센터에 ‘문자로’ 지원을 하고, ‘문자로’ 합격(?)통지를 받고, 출근 셔틀버스 탑승지 안내를 받았다. 나는 야간조에 지원했는데, 오후 6시부터 일을 시작하려면 4시에 출발하는 셔틀버스에 올라야 했다. 대부분의 물류센터가 경기도 외곽에 있기 때문이었다. 출근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오후 3시쯤 집을 나섰다. 버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 하며 곁눈으로 줄 선 사람들을 살폈다. 나이키 트레이닝복 세트를 갖춰입은 젊은 커플부터 왠지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아저씨, 느즈막히 나타나 줄 선 사람들 일부와 인사를 나누는 아주머니,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거기에 다 있었다.


 내가 하게 된 일은 개인별로 지급된 PDA를 보며 화면에 뜨는 선반의 위치를 찾아 물건을 카트에 싣고 포장대 앞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어렵지 않아 초보자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팔다리의 근력을 쓰는 일에 특히 무능한 자에게 진짜 장벽은 따로 있었다. 비인간적으로 광활한 물류센터의 규모나, 물건이 담긴 박스의 무게 같은 것은 실재하는 장벽이었다. 일이 끝나는 새벽 4시까지 쉴새없이 움직여야 했고 일을 시작하고 세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종아리와 발바닥, 어깨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사람의 키가 닿지 않는 높이의 선반에서 물건을 픽업하는 지게차들이 온전히 걸음에 의존해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사람과 지게차가 부딪히지 않도록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울려대는 혼돈 속에서 그날의 목표는 오직 새벽 4시까지 버티는 것 뿐이었다.


 한 시간의 식사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작업장이 있는 층에서 식당까지 오가는 데 식사시간의 대부분이 소요됐다. 물류센터는 층고가 높아 한 개 층이 일반적인 건물 2~3층 높이에 달했다. 3층에 있는 식당에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스무 명을 채 감당하지 못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란 로또 당첨과 다름없었고, 계단을 꾸역꾸역 오르고 나면 이번에는 허벅지 근육이 오열하고 있었다. 십 분이 안 되는 시간 안에 밥을 우겨넣고 급히 내려와야 자판기 커피라도 한 잔 마실 여유가 생겼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대화를 나누려던 애초의 계획은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출퇴근용 셔틀버스를 타지 않으면 도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광활한 노역장 같았다.


 그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주말을 이용해 세 번 정도 그곳에 갔고, 창작의 소재로 쓰려면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다양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잠시 친해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게차를 운전하는 한 청년은 한눈에 보기에 흑인이었는데 주로 신라의 후손들이 많이 사는 지역 사투리가 유창해 나의 편견을 돌아보게도 만들었고, 피팅모델을 겸하며 옷가게를 하다 가게를 접고 잠깐씩 나온다는 젊은 여성은 중간중간 몰래 쉬는 팁을 알려주기도 했다. 택배일을 하다 왔다는 한 무리의 남성들은 택배사별 노동환경이나 처우의 차이 같은 것들에 대해 썰을 풀어놓기도, 이 일을 하며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읊기도 했다.

 뒷자리 아주머니의 박한 은행잔고를 기계음으로 들은 것은 쿠팡 물류센터에 세 번째 출근했던 일요일 새벽이었다.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좀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동이 튼 지 오래였다. 겨우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밤낮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식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여덟 시간을 일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 그러니까 서울과 경기를 오가는 시간이라든가 셔틀버스가 기다리는 곳까지 오가는 데 드는 시간을 고려하면 온전히 하루를 통으로 바친 셈인데도, 돌아오는 노동의 대가는 정확하게 여덟 시간 어치의 법정 최저임금뿐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수월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녀노소가 그곳으로 모여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임금이 다음날 또는 당일에 바로 입금되기 때문이었다. 친구나 애인과 재미 삼아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장 돈이 급한 사람들, 차별과 편견 혹은 경쟁이라는 장벽이 엄연히 존재하는 노동시장에서 잠시 밀려났거나 진입을 거부한 사람들의 절박한 형편들이 거기에 존재했다.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기로 한 것은, 누군가의 삶을 알량한 창작의 소재로 삼아보겠다는 구상을 몹시 부끄러워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고된 일을 하면서도 어느 시점의 잔고가 삼천 이백 팔십 원인 분의 삶을 훔쳐다 쓸 생각은 처음부터 감히 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사진 출처 - 고용노동부


 유난히 자주 거론되는 그곳의 산재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사방에서 울려대던 지게차 경고음을 떠올렸다. 법의 지도를 아슬하게 피해갈 정도의 임금만 받으며, 에어팟 케이스나 고양이 화장실, 차량용 방향제 같은 물건의 새벽배송을 책임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사람들과 지게차들이 그려졌다. 숫자로만 호명되던 이들 속에 행여나 나와 눈을 맞추고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하면 몇 분 정도는 일에 집중을 하기 어려웠다.


 쿠팡이 뉴욕증시에 상장되고 시가총액이 단숨에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의 뒤를 이었다던 날, ‘축포를 쏘아올렸다’는 대동소이한 기사들을 눈으로 훑으며 다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국 유니콘 기업의 전망을 두고 설렘과 우려가 떠들썩하게 오가는 와중에 다만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업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적자와 출혈을 감수하고 파이를 키워 끝내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타는 쿠팡에서, 회계상 적자 말고 진짜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잃어간 사람들도 떠올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의 무겁고 소란한 정적 안에서도 귓가를 때렸던 그때의 고단한 삶은 지금 어디쯤 놓여있을까 몹시 궁금하다. 광활한 물류센터 안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지게차들 사이로, 작지만 환한 축포 한 번이 터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