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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푸르른 기록 - ‘나영’이라고 불리우던 소녀를 잘 떠나보내는 방법은 뭘까?(이회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2-31 10:36
조회
845

이회림/ 00경찰서


 안녕하세요. 11월에 ‘잊혀진 권리’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던 이회림입니다.
 가해자가 출소한 후, 예상대로 언론은 과도하게 가해자를 조명하느라 카메라를 들이대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다수의 유투버들이 가해자의 집 앞으로 가서 고성을 지르고 그들의 채널로 생중계까지 할 줄은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잊혀질 권리”를 말하기 위해 말이든 글로든 그 사건을 소환했던 저나 그 유투버들이나 결과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문득 들더군요. 아예 그런 칼럼도 쓰지 말고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맞았을까 하면서 자꾸만 되돌아보면서요.


 올해 2월 나영이의 언니가 저희 집에 놀러 왔을 때 함께 기획했던 책이 있었는데 저의 예전 일기를 토대로 만든 에세이였습니다. 2020년 12월, 가해자가 출소하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 더 이상 과도하게 그 사건과 가해자를 소환하는 현상이 줄어 들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날에 임박해서 책을 공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날이 오고 나니 미디어에 나오는 가해자의 얼굴과 여러 유투버 등을 보면서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까지만 실질적으로 나영이를 치료했다는 주치의께서 그동안 계속해서 도움을 준 것처럼 보도가 되고 있어서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2013년 여름, 나영이의 아버지께서 주치의가 2012년까지만 나영이를 챙기고 ‘더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 는 이유로 진료를 중단했다며 저에게 다른 정신과 의사를 연결해 달라고 부탁하신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치의라는 분은 치료보다는 정치에 더 집중하시느라 바빴을지도 모르고 그 당시 정말로 더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릴 만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어찌 되었든 지금이라도 발 벗고 나서 모금 운동을 하면서 나영이 가족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시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책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이 책은 ‘나영’이라고 불리우던 소녀를 환한 빛 속으로 잘 떠나보내는 방법에 대해 나영이 언니와 함께 고민한 시간의 결과물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잘 맞는 방법인지,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은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서 책을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책의 첫 부분에서 가져온 ‘첫 만남’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입니다. 이 책의 취지에 공감하시는 분들은 불편하고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해당사이트로 찾아가셔서 전문을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https://www.bookk.co.kr/book/view/98734/preview)



<우리들 푸르른 기록>


‘첫 만남’


 2009년 1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해바라기 아동센터에서 전해 듣고 연락드립니다. 00서 00 형사님이시죠?”

 2009년 1월, 아버님의 전화를 처음 받은 날은 제가 서울 시내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일하고 있을 때 였어요. 저의 지인 중 평생 무료로 진료를 봐 주고 싶어하던 한 여성 의사분이 계셨는데 제가 그 분을 해바라기 아동센터를 통해 아버님에게 결하게 되었지요. 추운 겨울 날, 병원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서 첫 만남을 가졌어요. 진료를 받기 전에 먼저 카페에 모여 인사를 나누기로 했던 거죠.


 “인사드려, 너 도와주러 오신 경찰언니야.”


 나영이의 첫인상은 웃음기가 없고 피곤해 보였어요.


 “안녕? 반갑다. 오느라 힘들었지? 언니가 선물 하나 준비 해 왔어. 사실 내가 밤샘 근무할 때마다 한 통씩 먹어치우는 건데 왠지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네 것도 사왔어.”


 절대로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섣불리 위로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동네 초등학생 대하듯이 편하게 말을 걸었어요.


 “어~?!”


 나영이의 작은 눈이 확~ 커지면서 얼굴이 환해졌어요. 얼굴에 조명이 하나 더 켜진 듯이 순식간에 밝아졌고 무거웠던 주변 공기가 명랑해졌어요. 처음 인사를 나눌 때는 내키지 않는 듯 건성으로 하느라 눈도 잘 마주치지 않더니, 무당벌레 초콜렛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금새 변했지요.


 ‘무당벌레! 다 니 덕분이다!!’


 저는 마음속으로 안도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영이가 타고 온 차 안에 돌고래 모양의 쿠션이 놓여 있길래 무당벌레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을 슬며시 했지만서도... 이렇게까지…


 고마운 무당벌레 초콜렛 덕분에 다소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병원 진료실에 함께 들어갔어요. 그런데 나영이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그 밝은 표정은 풀썩 날아가 버리고 없더군요.


 아무래도 병원이라는 곳은 꼭 필요한 공간이기는 하나 결코 편안한 장소가 될 수는 없었겠지요. 그건 저의 존재도 마찬가지. 나영이의 입장에서 오늘의 만남을 미리 상상을 해보니, 저 또한 그동안 만나 온 수많은 회색빛 공무원 어른들 중의 하나일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기에 저와 간단한 대화뿐만 아니라 인사를 나누는 것 조차 귀찮을 수도 있었구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런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고 싶어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챙겨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나영이의 취향을 전혀 모르니 아무거나 사갈 수는 없어서 그 당시 제가 즐겨 먹던 초콜렛을 들고 갔지요.


 초콜렛은 형사과 야근을 할 때마다 피곤함을 이기기 위해 녹차와 곁들여 먹던 저만의 든든한 야식이었죠. 특히 하나씩 정성스럽게 포장된 무당벌레는 초롱초롱 똘망똘망한 눈빛에 미소까지 띄고 있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거든요. 무당벌레 초콜렛의 효과는 진료실에 들어 간 순간 스르르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요? 아주 잠깐일지언정 나영이의 무표정한 얼굴을 톡! 건드리고 후다닥 귀여움을 선사하고 날아가 버린 무당벌레에게 경의를 표해요.


 고맙데이~


우리들 푸르른 기록 : ‘나영’ 이라 불리우는 소녀를 빛 속으로 떠나보내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