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잠 못 이루는 밤과 꿈을 꾸는 밤, 그 사이(최유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7-29 17:03
조회
819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어디 사세요?”, “자취하세요?” 이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대부분의 대화는 ‘고향이 어디예요’까지 이어지곤 한다. 그러면 그 순간 나는 입을 다문다. 일부러 라기보다는 저절로 닫히고 만다. 남들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고 아름답다고 상찬하는 그 도시가 내게는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을 만큼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바다의 굴만큼이나 다방이 많았다. 다방은 청소년들의 일자리이기도 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하려고 짙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들의 한 손에는 다방 커피를 감싼 보자기가, 다른 한 손에는 오토바이를 모는 이의 허리가 붙들려 있었다. 오토바이를 모는 그도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도시는 이 모든 풍경을 못 본 체했다. 청소년의 흔한 비행일 뿐이라고 여겼다. 누구도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도시에서 버려졌다. 단지 청소년이 해야 할 학업이라는 ‘본분’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침묵을 선택한 도시는 때때로 혐오로 침묵을 깼다. 다방에서 일하는 여자아이에게 “더럽다”느니 “이미 버린 몸”이라느니 하며 여성혐오로만 소비했고, 그 아이들은 ‘여자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의 예시가 되었다. 부모가 다방이나 술집을 운영하는 집의 딸들은 뒷말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에서도 바깥에서도, 편견의 꼬리표는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고향에는 특정 광고의 현수막도 수없이 많이 내걸렸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와 같은 문구의 매매혼 중개였다. 엄마의 지인 가족 중 한 명도 매매혼을 통해 결혼했다. 내 또래인 베트남 여성은 마흔 넘은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듣고 울분에 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엄마에게 화를 냈지만,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그 후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들었고, 매니큐어를 하고 밭일하다 시어머니에게 혼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매일 억지로 학교에 갔지만, 그녀에게는 학교에 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에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는 애초에 주어지지 못하는 선택지였다.



사진 출처 - pixabay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서울에 온 이후 고향에 거의 가지 않았다. 나 또한 방관자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벗어나면,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괜찮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사건들은 터졌고, 그것들은 고향에서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자꾸만 고향과 대면해야 했고, 더는 달아날 곳이 없어 괴로웠다. 살기 위해 방황하는 나를 마주하는 것도 괴로웠고 내가 이 문제를 바꿀 힘이 없다는 사실에도 힘들었다.


 손정우가 재판 도중 매매혼을 했다는 것도 충분히 역겨운데, 그게 저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영향을 주었다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두고 가해자에 이입한 채 터져 나오는 언어들에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밤은 매일 찾아왔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쌓인 채 밤을 맞이하면 현실과 꿈 사이에서 헤맨다. 오늘도 또. 벗어나지도 마주하지도 못하는 이곳, 대한민국은 나의 고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