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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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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좋아해”(최유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4-09 15:53
조회
837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널 좋아해.” 이 한 마디가 뭐라고. 어쩜 그리도 전하기 어려운지. 종이 위에 그 애틋한 마음을 담으려 애를 써봅니다. 첫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새종이로 몇 번을 바꿨을까요? 불현듯 의문이 듭니다. 좋아한다는 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가능하기는 한지 말입니다. “너는 내가 왜 좋은데?”라고 상대방이 물어온다면 그것조차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유야 너라서, 너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이 세상에 너는 하나니까. 상대방의 반응은 둘 중 하나입니다. 기뻐하거나 탐탁지 않아 하거나. 좋아하게 된 계기야 저마다 다를 겁니다. 사람 사이에 추억이 많고 이야기가 많을수록 종이 위에 글자가 넘쳐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별의 순간은 어떨까요? 이별도 저마다 다를 겁니다. 긴 이야기로 끝맺음을 맺거나 아주 짧은 말로 이별의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죠.


 다시 종이에 집중합니다. 어떤 달콤한 말을 적어볼까 고민이 깊어집니다.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는 사랑의 깊이가 깊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닥친 문제인데요. 사실 좋아하지는 않는데 사랑하는 것처럼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땐 신기하게도 거짓말이 술술 적힙니다. 한 편의 완벽한 소설이 되지요. 그러나 소설이라면 공모전에 제출이라도 할 수 있죠. 요즘 제가 쓰고 있는 이 사랑 고백은 공모전에는 낼 수 없습니다. 이쯤 되면 대필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이야기는 종종 들어봤습니다. 군대에서 국문과 출신들이 사랑의 시를 그렇게 많이 대필해줬다죠. 그 많은 대필이 모두 성공했을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글도 대필이라면 대필일 수 있을까요? 제 안의 새로운 자아가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거짓말 술술 하는 그 자아도 어차피 저니까 대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습니다. 바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입니다. 흔히 자소설이라고 하죠.



사진 출처- KBS


 통장에 적힌 숫자에 등 떠밀려 단기아르바이트라도 알아보자 하고 알바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셀카 사진 2장, 키와 몸무게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력서가 아니라 문자로 보내라는 것이었죠.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 하며 경악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채용절차법’이 통과되기 이전에는 일상이었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는 방식에 ‘인간의 얼굴과 몸’이 있다니 다시금 소름이 돋았습니다. 노동할 수 있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 노동자가 될 수 있는 얼굴과 그렇지 못할 얼굴. 도대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알바사이트를 닫고 워크넷으로 들어갑니다. 사진을 요구하거나 남과 여 이분법적 성별을 묻는 곳은 여전합니다. 순간 내가 만약 얼굴에 큰 흉터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성별 정정을 하지 못한 트랜스젠더였다면 이 이력서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가족관계를 묻는 칸도 있습니다. 미혼, 기혼 그리고 부모가 있는 사람인지도 알아내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질문이네요. 대체 일을 하는데 왜 이런 정보가 필요할까요? 이런 질문이 적힌 이력서만 봐도 어떤 회사인지 짐작이 갑니다. 마음은 이미 떠났지만, 코가 석 자인 저는 자기소개서로 넘어갑니다. ‘성장 과정’ 가장 난해한 질문이죠. 어떻게 회사와 성장 과정을 연결할지 고민해봅니다. 키보드 위로 손가락이 열심히 움직입니다. 타다닥. 다음 단골 질문 ‘동기’. 사랑을 고백하기 딱 좋은 질문입니다. 만들어낸 사랑을 읊습니다. 마침내 ‘해냈어!’하고 전송을 누르죠. 세상에 거짓말이 사라진다면 제일 위험한 영역은 이력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피곤한 과정을 거쳐서 입사하고 시간이 지나 퇴사를 결정할 때 사직서에는 딱 한 줄 적습니다.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합니다.” 애정 없는 무미건조한 답변을 선택합니다. 빨리 이별하고 싶어서죠.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이력서를 작성하는 키보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