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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김아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4-17 14:15
조회
850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네일(nail) 기술을 배워 샵을 내면 먹고는 산다더라. 남들보다 조금 더 성실히 일하면 아주 괜찮게 살 수 있다더라고. 너는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을 내고 나는 그 한 켠에서 네일샵을 하면 되겠다. 배관 기술은 남자들이 주로 배워가지만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수입은 그게 더 낫다더라. 한국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다는 편견 덕에 한국인 목공도 인기가 있다는데 우리 중에 네가 가장 손재주가 좋으니 나무 다루는 기술은 네가 배우는 게 어때. 아참, 타일공도 아주 괜찮다던데. 너 퍼즐 잘 맞추잖아.


 구한말 한약방 컨셉이라고 알려진, ‘힙스터’들은 꼭 가본다는 을지로의 어느 커피 가게에 앉아 우리는 그런 말들을 나누고 있었다. 몇 해 전 이맘때였다. 작정하고 만나 돈을 쓰는 날이었다. 비싸고 예쁜 밥을 먹고 나서, 인테리어가 독특하고 커피가 맛있다는 곳을 일부러 찾아갔다. 사실 그런 날은 두 세 달에 한 번 만들기도 힘들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웬만큼의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하는 형편에, 그런 작은 사치라도 없으면 숨통 틀 일이 없었다.


 한국을 떠나 1세계 어느 나라로든 정착해, 우리가 익혀보지 못한 기술들로 먹고 사는 상상들이 농담과 객담, 진담 사이에서 즐겁게 오갔다. 아니, 사실은 즐겁지 않았다. 농담과 객담을 오가다 짐짓 진담으로 향하는 내밀한 순간에 특히 그랬다.


 A는 작은 영화를 만든다. 내가 그녀를 알아온 20여 년간 영화일을 떠나본 적이 없다. B는 그림을 그린다. 책이나 달력, 다이어리에 들어가는 그림을 주로 그린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림 그리는 일을 떠나본 적이 없다. 우리는 대학에서 만났고 서로의 젊은 날과 치기, 그 시절 꿨던 꿈,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장점 같은 것들을 알고 있다. 영화를, 그림을, 시민운동을, 익숙한 풍광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새 기술을 배워야 사람다운 수준으로 먹고 살 수 있을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즐겁기만 할 리가 없었다.


 결국 실현되지 못했던 농담 혹은 객담이지만 그때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세월호 사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나라가 나라 같지 않다는 전조들은 많았지만 세월호 사태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세월호 이후, 마치 누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큰 사고들이 이어졌다. 그 모든 순간에 일관되게, 국가는 없는 것 같았다. 이 나라에서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지 알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세월호를 두고 모진 소리를 해대는 이웃들을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이게 가장 근원적이고 무거운 절망이었다. 선거를 잘 하고 법을 바꾸고 제도를 개선하고 상층부를 바꾼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대에는 여기가 지옥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세상이 온통 휘청거리고 갸우뚱거리던, 앞이 보이지 않던 날들이었다.


 이민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로부터 몇 해가 지났다. 강산이 변하기도 전인데 강산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적어도 체감하기로는, 국가라는 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국민을 억압하던 주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는 듯 보인다. 좀 더 후하게 점수를 주자면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다(지금 정부가 이상에 가깝다기보다, 이전 정부가 워낙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사진 출처- freepik


 이웃들도 달라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이들 밥 먹이는 일-무상급식-을 두고 빨갱이 같은 생각이라며 들고 일어나던 어른들이, 이제는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재난기본소득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황당 일색이던 반응도 조금 바뀌어서, 이제는 논의와 토론의 도마에 오르는 수준은 된 것 같다. 코로나 사태만 아니었으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생애 첫 투표를 했을 아이들은 사전투표장에 일부러 교복을 입고 나와 아쉬움을 달랬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N번방 운영에 적극 가담한 성범죄자들을 전례 없는 강도로 수사하고 처벌하며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기준을 세우자는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만 하면 멀쩡한 사람도 간첩을 만들 수 있던 나라, 그것도 서울 한복판의 부촌에서 북한 고위공직자 출신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놀라운 변화도 언급하고 싶다. 앞으로는 빨갱이라는 단어가 적어도 정치적 공격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일은 줄어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어쩌면 매우 높은 확률로, 우리는 다시 갸우뚱거리고 휘청일지 모른다. 헌법을 제외한 그 어떤 법안 처리도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거대여당이 탄생했지만, 세상이 바로, 그것도 아주 극적으로 좋아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선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데다가, 다양한 이해를 조율해야 하는 정치의 세계는 종종, 작은 민의를 외면하기도 할 것이다. 파란 깃발만 들고 있을 뿐, 행적과 철학이 분홍색인 당선자도 여럿이다. 범여권의 압승이어도,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동서로 갈린 한반도 지도는 그 자체로 슬펐다. 세월호를 두고 모진 말을 쏟아내는 이웃들이 여전히 곁에 있고, 약자끼리 서로 혐오하는 광경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갸우뚱거리면서 느리게나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따금 스텝이 꼬여 주저앉을 수도, 길을 가는 과정에 얼굴 붉힐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언제 이만큼 왔나 싶은 순간이 올 것이다. 오직 빨리 가기 위해 자기 체력이나 주위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뛰기만 하다 많은 것을 잃은 예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관건은, 곧은 방향으로, 결국 도달하는가에 있다.


 투표 전날, A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모처럼 모였다. 모두 같은 동네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작은 영화를 만들던 A는 큰 영화회사에 다니게 되었고 B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이제는 다른 이의 출판물에 들어가는 그림이 아니라 온전한 자신의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우리는 밤새 A의 회사에서 만드는 영화라든가, B가 요즘 그리는 그림이라든가, 경기도에 세워질 예정인 오월 걸상이라든가, 우리 동네 선거구에 출마한 후보들이라든가, 요즘 하고 있는 저축과 재테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밤을 보냈다. 날이 밝아오고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시간 6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 앞의 투표소로 함께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