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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인식개선이 되면 인권은 완성되는가? 평생 교육으로서의 인권교육(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9-22 14:57
조회
270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아버지는 20년이 넘는 연남동 회사 택시 운전사이다. 벌이가 좋은 야간 운행도 못 하는 70대 고령이시다. 손님 호출을 받는 각종 앱을 쓰기는 하지만 초기화라도 되면 주변 젊은 기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필자는 아버지로부터 그 흔한 카카오톡 한 줄도 받은 적이 없다. 당연히 기본 PC 사용은 아예 근처에 오지도 않으신다. 그런데 젊은 기사님들이 우리 아버지를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할 만큼 부러워하고 존중한다. 회사 새 차가 나오면 제일 빨리 받는 사람이기에 구성원들의 부러움을 받으시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회사에서 수동 변속기로 택시 운행이 가능한 유일한 분이셔서 존경을 받으신다. 수동 변속기 자동차는 자동 변속기 자동차에 비해 잔고장이 적고 연비도 좋고 가격조차 착하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 아버지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주로 하는 유튜브의 세계에는 입문하셨으나 줌이나 메타버스는 여전히 생경하시다. 그리고 변속기가 필요 없는 자율주행 전기 자동차 시대가 되면 지금처럼 주변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두려움이 크시다. 2030년쯤이면 내연 기관 생산이 전면 중단되니 수동 변속기가 달린 차도 멸종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희귀한 기술과 경험도 사라지고 타인의 부러움과 존경도 사그라질 것이다. 전기차가 내연 기관차만큼 싸지거나 아버지께서 회사를 떠나시면, 하루하루 바쁘게 변화하는 새 문물을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필요할 때 손쉽게 그 사용법을 익히거나 배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균적인 사람들에 비하여 지적 발달이 느리거나 신체의 운용이 어려운 사람들을 이른바 장애인이라 일컫는다. 그들의 발달의 문제가 그들의 장애 때문인가? 사회와 기술이 인간의 발달과 상관없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달하기 때문인가?


 이제 우리는 평균 수명이 백 세를 넘어가는 사회에 직면했으니 이 세상의 모든 비장애인은 반드시 장애를 경험하고 장애인의 삶을 누려보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인구 소멸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비장애인 인구수는 줄겠으나 장애인 인구는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고, 모든 비장애인 가구에서 장애를 가진 가족을 만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지금처럼 장애와 장애인에 대하여 존중과 인권을 필수적으로 교육하고 구체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불안해지고 서로를 혐오하는 게 일상인 삶을 살지도 모른다. 타인의 소수성을 공격하고 차별하여 나의 그림자로 삼지 않으면 내가 먼저 쬘 수 있는 햇빛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번져갈지 모르는 것이다.


 이른바 장애인 시민권 확보를 위한 이동권 투쟁에서 유례없이 정치권에서 터져 나온 장애인 관련 ‘민폐이론’ 이나 그로 말미암아 촉발된 지하철 대중들의 장애인 당사자의 공격은 단순한 혐오나 차별을 넘어 혐오 범죄, 증오 범죄로 확산할 여지를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그간의 인권교육의 한계를 보여 준 동시에 희망을 보여 준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간의 장애인에 대한 인권을 ‘배려와 사랑’이나 ‘이해나 인식 개선’이란 이름을 붙여 도덕 교육과 사회 교육 시간에 교육한 것이 과연 어떤 효과가 있었는가? 지금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장애인 인권교육을 통해서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중간에 장애인 가지는 것이, 내 손자녀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만들어 주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장애인과 한마을에서 이웃과 친구로서 살아야 하고 장애인의 삶의 경험이 비장애인들이 누리고 있는 삶의 경험과 별반 차이가 없도록 우리 사회 자원을 공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정말 그렇다면 왜 학교에서는 아니 왜 유독 장애인 인권에만 사랑과 배려 이해 인식 개선이란 말 따위를 붙이는가? 그런 감정과 개인의 가치관을 투영하는 말들과 표현들 장애인 인권 보장을 위한 구체적 실천의 책임과 검증을 은폐할 뿐이다.


 학교에서 장애인 인권 교육을 진행했으면 학교 교장이 특수학급을 유치하는 실천을 해야 하며 담임이 보다 다양한 중증 장애인 학생을 위한 통합 교육을 하려고 서로 담임을 맡으려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비장애인 학생들이 어렵고 힘들어도 장애인 학생과 같은 반, 같은 학교 학생으로서 같이 공부하려는 모습으로 누구나 특수교육이 필요하면 특수학급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학교 현장의 인권교육이 이런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연습과 훈련을 하게 하고 있는가? 세상에 어느 학교도 장애인 학생을 배려해서 입학을 시키거나 담임을 맡지 않는다.


 우리가 장애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불안해하며 장애인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이유가 이런 변화와 방향을 개인의 책임과 문제로 돌리도록 ‘선택 압력’을 받기 때문은 아닌가? 이 왜곡된 ‘선택 압력’을 줄여서 안전과 안정을 확보하고 각 개인 고유의 경험과 기술을 실시간 바뀌는 기술과 환경에 서로 연결하여 상호 간의 존경과 존중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교육’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과거 누군가의 삶을 고리타분한 꼰대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레트로’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 ‘평생 교육’ 일 것이다. 우리가 장애인의 삶과 문제를 지역사회와 함께 공유하는 이유는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알 수 없는 사회 변화와 발전의 ‘선택 압력’으로부터 각 개인들을 상호 보호하는 사회 보험이자, 공동체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이에 평생 교육도 장애인과 같은 다양한 사람들과 소수자들이 다 함께 어울려 소통하면서 각자가 존경과 존중을 받을 만한 필요한 교육을, 공공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순식간에 변하는 사회와 기술에 같이 가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한순간에 어느 위치에서 어느 관계에서 소수자로 되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란 말도 소수자란 존재도 시의적절한 지원을 제대로 잘하기 위한 분류일 뿐이다. 아버지에게도 메타버스를 즐겁게 배울 수 있는 평생 교육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수동 변속기 운전 방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것을 가르칠 수 있는 평생 교육도 역시 중요하다. 자동 변속기의 개발과 확산이 소아마비를 가진 장애인 때문에 촉발되었고 발달장애인을 위해 초기 개발되었던 운영체계가 윈도우 개발의 계기가 되었으며 스마트폰 영상 통화의 발명이 수어를 쓰는 농아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처럼, 평생 교육은 우월한 사람들이 모자란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삶들을 존경과 존중으로 연결하고 소통하기 위함이다. 전기나 인터넷을 어떤 사람을 선택해서 공급하거나 따로 주거나 하면 차별이라고 하듯이 어떤 교육 기관이나 교육 전문가 담당자들이 장애를 이유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지 않거나 따로 대우한다면 차별이자 사회적 보험 사기이며 우리 공동의 인프라를 스스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 언론들은 특히 장애인 문제에 대하여 가족들에게 온정주의가 가득하다. 감동과 극복의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장애인의 출생과 양육까지 온통 혈연 가족들의 책임으로 세뇌하니, 세뇌된 책임은 가족의, 부모의 권리로 착각한다. 과연 이런 세뇌로부터 학교는 자유로운가? 장애인의 죽음도 다른 사람과 동등하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적어도 학교라면, 교육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학교를 결석하고 수술을 자행하는 부모에게 그것은 아동 학대, 장애인 학대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자가 교육도 학교에서 배우는 또래문화도 중요하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수업시간에 장애가 차이이자 다양성이라고 가르쳐봐야 그게 설득이 되겠는가?


 아무리 국가지원이 늘어도 같은 아동과 당사자의 살해사건에 장애가 있든 없든 동등하게 포함하지 않으면 절대 이런 사건은 줄지 않을 것이다. 인권이 이런 억울한 차별에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제 학교 교육도 ‘장애인을 죽이지 마라, 부끄러워하지 말라, 우리가 함께 하겠다’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