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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여기가 로도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부터 뛴다!(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9-02 14:30
조회
293

신종환 / 공무원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은 고용인들에게 당신들 피고용인은 사람이 아니라 숫자라고 말한다. 토요일 퇴근 후 헬스장에서 마주친 주민센터 동료는 내게 다음 주부터 힘들어질 예정이라며 푸념을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는 다음 주부터 주민센터에 지역 코로나지원금 현금 지급 대상인 거지새끼들이 온다고 했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진 공무원이 적지 않아서 그의 단어 선정과 기분 자체는 놀랍지 않지만 당연히 내가 그 어조에 동조할 거라 생각하는 그의 생각은 조금 놀라웠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래도 거지새끼라는 말은 그렇다고 타박을 했을까 싶지만 나는 순간 당황했다가 고생하시라며 너스레를 떨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저 친구 처음에는 안 저랬는데? 나는 왜 뭐라고 안했지? 어떤 기분이었더라? 전에는 어땠지? 해소되지 못할 퇴사 욕구만 남고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쉽게 이해하는 나를 문득 느꼈다. 수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떻게 저 직장인들은 한결같은 고충과 퇴사 욕구와 퇴근이라는 한정적인 주제만을 외칠 수 있는지. 시간의 풍화작용을 버티지 못한 내 모습. 이를테면 나를 둘러싼 것들은 모두 작거나 큰 고통이고 머릿속은 그에 대한 회피방안 뿐이었다. 죽을 만큼 우울하지는 않지만 협소해진 생각을 보며 자살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상상력이 완전히 포섭되었을 때 죽는다던 문구가 생각났다.(<철학 듣는 밤>, 김준산, 김형섭 지음. 프리렉 출판사)

과 서무 회계 담당자의 일상은 절반 정도는 짱구의 하루와 같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는 가고 사람들은 나를 못 말려 하니 과반은 맞지만 나는 짱구처럼 대단하지도 않고 천재도 아니고 다음엔 무엇을 할지 염두 하지 않으니 나머지는 틀렸다.

출처: 저작권 없음.


변수를 줄이고자 초과근무가 허용하는 가장 이른 시간 04시에 쏟아지는 졸음 반과 조용한 사무실을 만끽하며 일을 한다. 대여섯 건의 지출과 서너건의 제출문서, 그리고 승진을 위한 교육...교육.... 갑자기 이 모든 게 쏟아지는 까닭은 쉬이 지휘부가 회식을 잡는 까닭이요, 제출기한이 다가온 까닭이요, 아직 나의 업무가 완료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로또 번호 하나에 퇴직과 로또 번호 하나에 주식과 로또 번호 하나에 아른거리는 자취방과 로또 번호 하나에 남은 대학 졸업과 로또 번호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나는 번호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명예퇴직, 의원 면직, 정년퇴직 공로연수, 이런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정시출퇴근이 멀 듯이.

라는 잡념을 두르고하며 일을 하다 해가 뜰 것 같아 사무실 블라인드를 열고 창문을 열고 뭉텅이로 온 일간지를 정리하고 있자니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내 동공도 활짝 열린다. 의원 의전을 위해 수원으로 가는 계장님은 이렇게 일찍 나올 일이 무엇이 있냐는 말을 멋있게 던지고는 수원을 향해 당당히 간다. 음....그에게 화가 나는 자 그에게 돌을 던지자는 생각으로 실제 투석을 갈음하고 업무의 마무리와 아침을 맞이한다. 앞서 말했듯 하루 업무는 짱구가 운전하는 타임머신 같아서 정신 차려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 있다.

오늘은 노조에서 내가 담당하는 영화모임이 있는 날이라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극장으로 가서 좌석을 예매하고 동료들을 기다린다. 보기로 한 영화는 이정재 배우의 입봉작인 ‘헌트’이고 상영시간은 18:22. 모이기로 한 시간은 18:15 지금은 18:13... 공무원에게 기한과 정시란 대체로 허용되는 가장 늦은 시간이거나 자기가 정한 시간이다. 18:15이 되니 사람 대신 카톡이 답지한다. “주사님 죄송해요 을지연습 때문에 일이 늦어서 오늘은 초근해야 할 것 같아요”와 이와 유사한 카톡이 일곱. 을지연습이 국가의 안보에 이바지하는 목적을 이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임의 목표치인 12명은 덕분에 이루지 못했다.

영화를 보며 이정재와 정우성도 나처럼 하루가 정신없고 자기 시간 없어서 어리둥절한가 싶은 생각이 들게 영화는 내 하루처럼 복잡미묘하게 끝났다. 복잡하게 꼬인 승진심사의 소식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내 속을 치킨에 돌돌 말아 먹어가며 뒤풀이를 시작하려는 순간, 처음 온 주사님이 이번 영화의 이런 점이 재미있었고 다음에는 이런 영화를 보고 싶다고 묻지 않았는데도 말을 한다.

어떤 제안을 해도 침묵을 일관하는 윌슨같은 회원들의 태도를 긍정이라 해석하던 나날에 자발적 의견을 들으니 약간의 울음을 삼키며 속으로 ‘이 사람을 보라!’를 연발했다. 마침 9월에 같이 볼 영화가 마땅치 않던 차에 그는 예전에 개봉한 ‘위대한 쇼맨’을 같이 보고 얘기를 나눴으면 한다고 했다. 가만있던 동기는 돌연 자기는 이런 영화를 보고 싶다며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가뭄 끝에 비를 보는 농민은 이슬비에 울었을까. 내가 내적으로 오열했으니 그도 울었을 것이다.

새로운 멤버 덕인지 영화에 대한 의견도 전보다 활발하게 오갔고 다음 달 고정 참석 다섯 명을 확보하고 귀갓길에 한동안 잊었던 생산적이라고 기억되던 감각들을 새삼 느꼈다. 퇴행을 간신히 막는 날을 넘어서 모두 다시 이것저것 해볼 날은 올까? 그런 생각을 하기에 지금이 최적은 아니지만 하다 보면 다시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사람들은 폐허에서 울지만 거기서 다시 밥을 먹는다지. 들뢰즈 선생님, 여기가 로도스인지는 이제 까먹었지만 뛰어는 보겠습니다. 누군가 뛰고 있는 저를 기다릴지도 모를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