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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강사 처우는 학생인권의 문제 - 고은애/ 전남대 학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8:04
조회
368
고은애/ 전남대 법학과 학생

- 이번 글은 허창영씨가 진행했던 글쓰기 공부모임의 글로 대신 합니다.-

얼마 전 지방 모 대학의 시간강사들이 해당 대학을 노동청에 고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대학이 2000년부터 8년 동안 강사료의 일부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다. 그 액수만 해도 수십억에 이른다고 한다. 시간강사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평균적으로 시간강사가 대학 강의의 50%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대학에서 그들에게 보장하는 것은 그러한 노력의 50%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학이 주는 것이라곤 강사료 몇 푼이 고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대학의 냉대는 물론이고 불확실한 미래라는 더 큰 짐은 시간강사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런 시간강사를 대상으로 지성의 요람인 대학이 벌인 일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렵지만 현재 이것이 우리 대학의 사정이다.

시간강사의 처우 문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듯 하다. 그런데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어야 할 대학만 오히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나누어 쓰면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 연구실 공간이지만 시간강사에게는 해당이 없다. 그나마 휴게실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시간강사는 차 안에서 연구한다”는 말이 우스개 소리가 아니다. 강의에 대한 연속성도 보장되지 않는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일방적인 통보만 있을 뿐이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일상화되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대학과 시간강사 사이에는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만이 존재 할 뿐이다.

그런데 이는 시간강사의 처우가 단순하게 개인적 이익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대학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인권과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이 시간강사를 냉대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이는 연구실 공간조차 주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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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교양과목을 수강했을 때의 일이다. 성적에 의문이 들어 담당 강사와 면담을 하고 싶었다. 전임교원이라면 연구실로 찾아가면 되지만 시간강사는 그럴 수가 없다. 연락처도 몰랐던 터라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주소가 틀렸는지 ‘확인되지 않음’이라는 메시지만 있고 답도 오지 않았다. 의문만 잔뜩 담긴 성적을 받아들여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연락처라도 알면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시간강사들은 대부분 교양과목을 담당한다. 때문에 강사의 연락처를 알기 위해서는 교양과목을 개설한 해당 단과대학의 행정실이나 조교실에 문의를 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성적에 대한 것이라 여차저차해서 겨우 연락처를 얻기는 했다. 당시에는 연락처만 알면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웬걸. 강사와 통화를 하는데 만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연구실이 없어 강의 때만 학교에 잠깐 머무르니 당연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학생들이 오고가는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아 성적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성적 확인을 위해 기꺼이 와준 강사의 착한 마음씨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렇듯 성적 확인이라는 쉬운 일도 시간강사에게는 그렇지 않다. 면담할 공간도 문제려니와 그 한 명을 위해 먼 거리를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이런 불편함은 고스란히 학생의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시간강사에게 개인연구실을 제공하는 것이 재정적인 부담과 공간 부족 등의 어려움이 있다는 대학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그렇지만 이는 손가락 뒤에 숨은 달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태도이다. 시간강사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다. 결국 학생을 위한 일인 것이다. 시간강사를 냉대하는 대학, 그것은 결국 학생들의 교육권을 방치하겠다는 반인권적인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