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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소식, 2003년 그리고 2011년 지금 (이동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1:35
조회
192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개인적으로 소셜 네트워크라는 것에 시큰둥하다. 싸이월드도 안하고 트위터도 개설만 해 놓고, 그나마 페이스북만 지금 단체에서 활동하기 전에 사귄 외국의 친구들의 성화로 4년 전 즈음에 개설 해놓고, 가끔 외국친구들의 근황을 알기 위해 들어 가 보는 정도였다. 근데 요즘 이 소셜 네트워크가 난리다. 특히 트위터하고 페이스북은 완전 붐이다. 그리고 그 위력 또한 대단하다. 최근에 나도 페이스북의 위력을 실감했던 사건이 하나있었다.

평소 때처럼 잘 들어가지 않는 페이스북에 별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낯익은 이름 하나가 친구를 신청하여 왔다. 쉐이마 하심, 내가 2003년 중순경에 이라크에서 반전평화팀 일원으로 있을 때 바그다드 빈민지역 알 마시텔 놀이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개인적으로도 친하게 지냈던 여성 선생님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수락을 하였더니 그리 오래지 않아 그쪽에게서 대화를 신청하여왔다. 당시 일과 중이라 여유가 있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기대반 의혹반이어서 대화를 시작하였는데, 맙소사! 2003년 이후에 연락이 끊어졌던 이라크 바그다드 알 마시텔 놀이방의 그 선생님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고 너무나 반가웠다.

운이 좋게도 페이스북 상의 내 이름은 이전 외국 친구들을 위해서 영어 이름으로 적혀있어서 그 선생님은 어렵지 않게 나를 찾았다고 했다. 난 바그다드에서 어떻게 페이스북을 통해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도 했다. 참고로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내 기억속 2003년도 당시의 이라크 바그다드의 상황은 이메일 한통 보내기 위해서 시내 한복판으로 나와서 비싼 돈을 지불해야만 하고, 컴퓨터도 굉장히 열악하였다.

반가움과 흥분을 감추며 대화를 진행하였다. 그 선생님은 당시에도 바그다드의 주요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인재였으며, 영어도 능숙하였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변화된 개인상황에 대해서도 주고받으면서 나는 아주 당연한 듯이 요즘의 바그다드 상황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현재 자신이 미국 마이애미에 있다고 했다. 갑자기 바그다드에서 마이애미로 이동한 그 이유가 궁금하여 물었더니, 상황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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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자살폭탄공격사진
사진 출처 - 신화통신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후, 이라크 내부는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혼란은 전쟁을 주도했던 미군조차도 컨트롤 할 수없는 극한의 불안정 상태로 진행되었고, 2005년 2006년이 되면서 이라크 내 종파간 지역 간 가족간 극한 갈등상황으로 치달았다. 당시 매일 종파간 분쟁으로 수십, 수백명씩 죽어가고, 서로가 복수를 다짐하며 상대편에 무력을 행사하며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2005년 초반에 결혼을 한 그 선생님 집안도 위험이 닥치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의 집안이 종파간 분쟁에 휩싸이면서 그 선생님과 그 가족은 신변에 큰 위험이 닥쳤고, 그들은 무작정 바그다드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간 정처 없이 인근 국가를 떠돌다가 미국에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선생님은 현재 난민이 되어 2년 전 2008년부터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고 했다. 놀라움에 미국에서의 생활을 물었다. 그 선생님은 거의 2년간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고 있었고, 그 남편은 얼마 전부터 어디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려움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나에게 자신의 지난 몇 년간의 과거를 담담히 이야기하는 그 선생님의 모습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지 짐작이 가서 마음이 먹먹했다.

그 선생님은 조만간 자신도 외부생활을 하고 싶고, 공부도 더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향 이라크의 모든 것이, 이라크에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립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 계속 이야기 하자고 했다.

요즘 그 선생님과는 페이스북의 열렬한 친구가 되었다.
이전에도 몇 차례 이 공간을 통해서 언급한 바가 있었는데, 2006년 말까지 이라크 전쟁과 점령으로 인하여 이라크 인근 국가인 요르단과 시리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수백만의 이라크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라크 내부에도 수백만 명의 내부난민들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2005년 2006년 내가 요르단에 있을 때 나와 함께 지냈던 분들도 이라크 난민 가족이었다.

2003년 초반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으며, 2004년 한국 사회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으로 격렬히 갈등하였으며, 2008년말 한국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한다. 그리고 2010년 미국도 이라크에서 전투 병력을 철군시키고 있다. 그리고 2011년 오늘 페이스북을 통해서 나의 2003년 친구는 난민이 되어 이라크가 아닌 미국에서 2011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리고 아마도 이 전쟁과 점령으로 인하여 수백만의 이라크 난민은 지금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2003년도 이전을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