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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인생, 톱니바퀴 사회 (임아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3:45
조회
258

임아연/ 한밭대 학생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한국전쟁의 끝자락에 태어났다. 포화도 비켜간 충청도 어느 깊은 시골마을에서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다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지기 시작했다. 드라마처럼, 6남매 가운데 장남이라는 무게를 어깨에 이고 학교라는 문턱을 넘어 본 적 없이 청년이 됐다. 사람들을 따라 상경했다. 배움이 없는 그에게 주어진 건 온갖 잡일과 궂은 일뿐. 몇 푼 되지도 않는 돈벌이로 가족을 부양했다. 모래알만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 농약도 마셔봤지만 죽는 것조차 그에겐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날들이었다.

결혼을 했다. 배움에 한 맺힌 그에게 서울에서 이름난 상고출신의 여자는 꿈 같은 일이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 여자는 가족과 일에 대한 그의 성실함이 좋았다. 딸 셋을 낳았다. 사글세 단칸방에 행복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우유배달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울에서 대구, 대구에서 대전으로 안 가본 곳 없이 십 수 번씩 이사를 다녔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구김 없이 자랐고 드디어 몇 일 전, 막내딸까지 대학공부를 마쳤다.

나는 그의 막내딸이다. 자신을 위한 치장이라곤 로션 하나 바르지 않는 엄마, 그런 ‘아내 바보’ 아빠. 매일같이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부모에게 “집이 가난해서 부끄럽다”고 불평할 만큼 철없는 자식들은 아니었다. “돈이 없어도 마음이 부자라야 진짜 부자”라는 말을 가훈처럼, 아니 신앙처럼 믿었다. 다행히 가족은 돈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을지언정 불행하진 않았다.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의 부모는 “우리에겐 자식이 노후 연금”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나는 더럭 겁이 났다. 학위와 함께 내게 쥐어진 건 천 만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 빚이었다. 지금까지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피부로 느낄 만큼 구체적인 상황으로 인지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 부모의 일로 미루어 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물 여섯, 막 사회로 접어드는 내가 갚아야 할 빚이 천 만원이 넘는다니. 그나마 사립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나.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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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들이 서울역 인근의 한 대부업체 앞을 지나가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뉴스 속 한 꼭지 짜리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우리 집에선 연쇄반응을 하고 있다. 아버지가 십 여 년 전부터 해 온 두부장사가 최근 5, 6년 사이 계속해서 늪으로 빠져드는데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터 인근에 대형마트만 세 개다. 작은 틈새까지 비집고 들어온 SSM(슈퍼슈퍼마켓)까지 합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용할 지경이다. 명절 밑이면 줄 서서 두부를 사가던 사람들을 추억할 뿐,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빈 몸으로 결혼한 큰언니 부부는 박봉으로 소문난 사회복지사다. 늦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그들은 학자금 5천만 원을 빚으로 안고 시작했다. 아이가 둘인데 더 낳고 싶어도 낳아 기를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사람들은 지금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아이마저 불행에 빠뜨리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했다. 돈으로 행복을 치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상황이 계속 된다면 아이들도 우리와 같이 대학 졸업과 동시에 몇 천 만원의 빚으로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둘째 언니는 올해 결혼하고 싶어한다. 5년 차 교사인데 모아둔 돈이 없다. 부모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어 언니가 벌어놓은 돈의 상당 부분이 엄마가 빚을 갚는데 쓰였다. 벌어도, 벌어도 모이지 않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만 같았다. 지난 겨울 초입, 함께 백화점에 갔다가 언니는 5년동안 일했는데도 겨울코트 한 벌 못 사 입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돈을 모아 결혼하려면 올 한해, 새 옷은커녕 ‘돌봄 교실’과 같은 업무 외 일을 더 맡아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하는데 이렇게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몰랐다. 허니문 푸어(Honeymoon Poor)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때때로 답답할 때가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빚이 우리가족 모두를 이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조여오는지 대상 없는 원망을 할 때가 있다. 가족들 누구 하나 나태하게 살아본 적 없고,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자 때문에 다시 빚을 지는 상황이 온 적도 있었다. 물가든, 대형마트 규제든, 대학 등록금이든, 취업이든, 복지이든 사회 어느 한 부분에서 악순환의 고리 하나만 끊어지면 조금이나마 나아질텐데,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견고하게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힘겨운 상황은 반복되고, 심화되고, 대를 잇는다.

최근 들어 엄마의 입에서 로또와 연금복권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대한 무력감은 일확천금에 대한 꿈으로 옮겨 갔다. 어떤 때는 사주팔자를 탓하기도 하고 때로는 종교를 찾는다. 나만의 일, 우리 가족만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주변의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내고 있다. 정책에 대한 신뢰보다 운명을 믿는 게 차라리 위로가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

곧 총선이다. 우리가 힘겨워 하는 이 현실들이 어찌 보면 우리 손에서 나온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선거만으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겠지만 사회의 작은 고리 하나를 끊어낼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었으면 한다. 다가오는 4월이 또다시 ‘잔인한 달’이 되지 않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