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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역과 용산역을 지나가며 (이상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3:41
조회
265

이상재/ 대전시민아카데미 운영위원



굳이 인권연대 오모국장이 틈만 나면 내게 했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나는 ‘시골사람’이다. 전국지도에는 나오지 않은 남해안의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지난날도 그렇지만 특히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낯설어 하는 나를 확인할 때마다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내가 3-4년 전에는 대학원을 다닌답시고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서울을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인천방향으로 20여분을 가야 도착하는 대학이었다. 처음에야 시골사람의 정체성에 맞게 지하철의 종착역도 두 세 번씩 확인하고 두리번거리며 긴장했지만 차츰 시간이 가면서 전철 밖의 풍경도 살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다 가끔씩은 자연스레 지나쳐가는 역 이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네이름의 유래 같은걸 궁금해 하는 수준도 아니었다. 노량진역이면 수산시장, 신도림역이면 밴드 자우림의 노래가사가 생각나는 그야말로 시골에서 올라온 무료한 지하철승객의 심심풀이였다.
용산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사람이 서울의 ‘용산’ 지명 뒤에 쉽게 붙일 수 있는 단어라고는 ‘상가商街’나 ‘미군기지’정도였다. 적어도 2009년 1월 20일 새벽 이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나는 용산역을 지나칠 때마다 용산에 이어서 생각나는 단어는 ‘참사慘事’ 이 말 하나뿐이었다.
악명 높았던 대공분실이 있었던 남영동은 서울역 바로 다음역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지나가는 적이 대부분이었다. 책에서만 ‘87년항쟁’ ‘박종철’ 등을 배운 세대이기 때문에 현실감이 떨어져서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갔다.
그 생각 없음은 그 이후로도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작년 여름 인권연대에서 진행하는 교사 직무연수 때 남영동 대공분실(현재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을 직접 보고 나서는 남영역 역시 지나갈 때면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고문하다’라는 말의 뜻을 검색해보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어떤 것을 자백시키거나 원하는 일을 시키기 위하여 인권을 유린하면서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가하다.”라고 나온다. 이 정의에 충실히 따른다면 1976년 만들어진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할은 정권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시민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했던 곳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집권과정의 정당성은 물론 지배과정의 정당성도 상실한 국가 지배세력과 그 주구들은 악마의 건물에서 민청련의장 김근태와 대학생 박종철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을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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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층 조사실 복도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고문은 대체로 부당한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해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2009년의 용산 참사는 개발주체인 재벌과 부동산 주인들의 이익을 위해 행해진 국가폭력이란 점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그것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럼에도 용산 참사는 국가가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거리로 내몰리게 된 세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행해진 고문의 작동기제와 여러 가지 점에서 닮아있다.
우선 용산 참사가 일어난 이후 경찰의 무혐의 발표와 검찰의 수사기록요청 거부는 김근태 전의원이 고문을 당했다고,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죽었다고 폭로 했을 때, 경찰이 즉각적으로 보인 후안무치한 발뺌과 일치한다. 또한 용산 참사 당시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했던 당시 서울경찰청장 김석기의 오사카 총영사 영전과 올해 4월 국회의원 출마소식과 같은 화려한 변신은, 수배되고도 무려 12년의 유유자적한 도피생활과 징역살이 이후 목사로서의 변신을 보여주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할 것이다.
세밑에 고문후유증으로 운명을 달리한 김근태 전의원과 같은 수많은 고문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의 세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대사의 아픔이었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 역시 쉽게 치유되지 않을 성질의 아픔이라는 점에서 고문피해자들이 겪은 고통과 일치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현재 공식명칭은 ‘경찰청인권보호센터’이다. 비록 잔인한 고문의 현장이었던 건물이 인권보호센터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고 해도 국가권력의 잔인함과 무책임함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불과 3년 전에 일어난 용산 참사의 전후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비단 용산 참사뿐이 아니라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용산 참사와 같은 고문의 작동기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평택의 대추리와 쌍용차 공장에서, 촛불시위의 현장에서, 전국의 4대강 공사현장에서, 부산의 영도 85호 크레인에서, 제주도의 강정마을 등에서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국가의 정책과 너무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시장의 이익만을 위해 민중의 삶에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국가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오직 국가와 시장만의 이익을 위해 민중들에게 가해진 고문에 다름 아니었다.
21세기의 초입인 현재 대한민국에서 적어도 남영동 대공분실과 같이 국가가 운영하는 고문전문 기관에서 개인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고문은 사라진 것 같다. 하지만 용산 참사 같이 국가권력이 물리적 힘에 의존해 시민들과 마주하는 사례는 점차 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힘없는 개인과 압도적인 힘을 가진 권력과의 일방적인 관계라는 점에서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확장된 고문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대표되는 야만스러운 고문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꽤 멀리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산 참사를 겪으며 실상은 그간 국가에 의해서, 시장에 의해서, 이러저러한 권위에 의해서 다른 형태와 다른 이름의 고문이 진행되고 있다는 자각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용산 참사의 거리는 확실히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시골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더 설명하자면 지하철 1호선의 남영역과 용산역은 한 정거장 사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