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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그 무거운 절망과 냉소에 갇혀 있지 말자 (전국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3:51
조회
224

전국완/ 중학교 국어교사



지난 밤 동료들을 배웅하고 집 앞을 산책하면서 만난 촉촉한 봄비. 참 신기하기도 하지. 이제 막 돋아난 새순 다치지 말라고 요렇게 보드랍게 내리는구나. 자연의 조화란 참 …….

이 비(혹은 는개?)를 온몸으로 맞으며 공원을 몇 바퀴 돌면서 보니, 아침에는 산수유 몇 그루만 꽃을 피웠었는데 어느새 나무들마다 꽃망울이 영글어 내일쯤이면 꽃을 볼 수 있겠다 싶다. 울타리에 심어 놓은 쥐똥나무, 그 작은 새 잎들도 알알이 물방울 하나씩 보석처럼 달고 있는 모습이 어찌 그리 어여쁜지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그 팍팍한 겨울동안 온몸으로 추위를 받아내며 서 있던 나무들, 이제는 축복처럼 내리는 봄비에 한껏 힘을 내고 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머리맡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이른 기상을 했다. 괜시리 어정댄다.

지난 몇 년 간, 살다 살다 별 해괴한 일들이 자고 나면 뻥 뻥 터져서 이제 웬만한 일 앞엔 눈 하나 껌벅이지 않은 정도로 단련이 됐다 싶은데도 밤새 뒤척이다 일어났다. 가슴만 두근거리는 게 또 증상이 도졌지 싶다. 스스로 기대는 이제 그만! 이라 구겨박는데도 이놈의 희망이란 놈이 또 슬금슬금 밑에서부터 기어오른다.

지난 80년대엔 그래도 상대할 괴물들이 이렇게 많진 않았던 것 같다. 무식한 군부독재 앞에 넥타이부대까지 스크럼 짜고 외치면 매운 최루탄을 마셔도 우리는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뭐 사방이 괴물들이다. 국민의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그것도 모자라 시민들 뒷조사에 겁박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오만무식한 정권에, 선거철에만 국민 운운하고 여의도가면 기득권이나 챙기는 금배지분들에, 정권에 개노릇이나 하는 검찰에, 서민들 삶이야 어찌 되든 제 배불리는데 혈안이 돼 있는 재벌에, 이 괴물들 변호하느라 진실왜곡에 여론조작까지 못할 짓이 없는, 이미 또 다른 괴물이 돼 버린 언론까지 …….

하지만, 이 괴물들을 이만큼 키운 건 정작 우리들 자신이었음을 뼈아프게 인정해야 한다. '부자 되세요!’, ‘1% 당신을 위한 차’,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을 말해 준다’ 는 자본의 달콤한 독약에 취해서 자신의 계급정체성도 망각한 채 그 괴물들이 빨대 꽂고 우리를 빨아먹도록 내버려 둔 건 우리 자신이다. 지난 세월 수많은 청춘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얻은 민주주의의 많은 것들이 부정되고 헌 걸레처럼 발에 채이도록 방기한 것도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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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민주항쟁'이 52주년이 되었다.
김주열 열사 시신인양지점


지금, 그렇게 ‘부자’가 되고 싶었던 우리 국민들은 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고용유연성을 위해 많은 우리들은 해고자가 되고, 사교육비 · 아파트 대출금에 빚더미에 앉았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또 철거민이 되고, 이제는 우리의 산하까지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파헤쳐지고 있다.

눈뜬 장님처럼 달콤한 유혹에 빠져 참·거짓도 분간하지 못하도록 어리석었던 우리들 탓이다. 기득권세력들이 귀신같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선점한 정보들을 총동원해 날쌔게 그들의 파이를 늘려가는 동안에 우리는 그저 침 흘리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거다. ‘나도 언젠가는 저 파이를 먹을 수 있겠지.’ 하고 말이다.
10년 전 우리를 흥분케 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거대한 몸집의 괴물이 끔찍스럽게 큰 입을 쩍 벌리고 많은 것들을 삼켜대던 장면, 끝내 괴물에게 먹힐 뻔한 딸을 구해내던 아슬아슬한 장면 …….

어리석었던 만큼 잃었던 걸 되찾으려면 할 일이 많다. 문제는 시스템일 것이다. 지금 괴물들이 합동으로 만들어 낸 시스템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 첫 번째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계급정체성을 제대로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행히 아직 빼앗기지 않은 우리의 단추를 제대로 누르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입에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이제는 단추를 제대로 누르자. 그래서 저 잔혹한 시스템을 멈추게 하자! 그것만이 기득권의 철옹성에 균열을 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절망하지 말자. 다들 내맘같지 않다고 섣불리 냉소적이 되지도 말기로 하자. 그들의 철옹성이 어디 쉽게 허물어질 수 있겠는가? 수십 수만 개의 균열이 모여 허물어지는 그 때까지 마음의 스크럼을 짜고 버텨야 할 것이다.

어째 점점 글이 비장해지고 있을 즈음, 경남에 계신 지인으로부터 아름다운 메시지를 받았다. 어제 내린 봄비를 맞으며 보았던 꽃망울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오늘 선거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봄은 올 것이고, 피어날 것이다. 그 분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우리에게는 아직 절망할 권리가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오늘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인양 52주년일입니다.

불의를 미워하고 선을 실현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습니다.

3·15와 4·19의 사이에서 열사의 선한 눈빛을 마음에 담습니다.

아침 대한통운 앞 바닷가에 왔습니다. 벌써 누군가가 하얀 국화꽃을 바쳤군요.

저도 집 앞을 예쁘게 장식하고 있던 동백꽃과 목련을 제단에 올렸습니다.

‘악에 분노하고 선의 실현을 위해 행동하라’ 열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명복!